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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남겨지기까지는 지리하고 길었던 소련과의 대결이 있었다. 이른바 냉전으로 불리우던 동서진영의 차갑고도 첨예했던 순간 언제나 소련은 미국에게 버거운 상대였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들은 유럽의 거의 절반을 장악했고 나치가 사라진 그곳에 그들의 붉은 군대를 진주시켰다. 그러한 그들에 맞서 미국의 모든 관심은 더이상 그들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데 모아졌다. 그리고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미국의 적이 도발한다면 그 행위는 미국을 공격하는 행위로 보아야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그들은 소련과의 대결을 선언한다. 그리고 1947년 6월 비밀정보기관인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창설해 그 지휘를 맡긴다.
이 책 <잿더미의 유산>은 미국방부와 CIA등 미국의 정보기관을 파헤친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한 '뉴욕 타임즈'기자 팀 와이즈가 미국 현대사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CIA의 역사를 1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집필해 낸 책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CIA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또한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통해 얼마나 수많은 인명이 아무런 의미없이 희생되었는지 생생하게 고발한다. 그의 취재에는 수많은 CIA의 전현직 요원의 인터뷰가 있었으며 이제는 비밀에서 해금된 CIA의 문서들이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CIA의 요원들이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만나는 그러한 완벽하고 강력한 요원들만이 아님을 이야기 한다. 책에서 가끔 거론되는 동유럽이나 소련에 잠입한 스파이들의 정체를 보면 실소를 금할수가 없다. 어쩌면 그만큼 우리가 CIA를 보는 눈은 실제와는 많이 달랐을지도 모르는것 같다.
법에 명시된 CIA의 공식적인 임무는 미국이 수집한 모든 정보를 분석하며 평가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설초기 CIA에게는 그러한 권한이나 자금이 너무나 부족했다. 결국 의회에서 의결된 CIA법은 이루 말할수 없는 커다란 권한을 부여했다. 그들은 이제 여타기관의 견제없이 예산을 쓸수 있게 되었으며, 어떠한 사건이라도 기밀사항이라는 이름 아래 법률적인 저촉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본격적으로 스탈린과 맞설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발칸과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에서의 잇단 패배에도 불구하고 CIA는 소련, 중공, 북한을 잇는 전신내용을 해독해내는 정보력을 통해 극동에서는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단 한명의 첩보원으로 인해 그러한 시스템이 모두 파괴되어 버릴정도로 그들은 허약하기만 했다. 한국전쟁은 그러한 그들이 맞이한 첫번째 시험대가 되었다.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고 수많은 한국인의 목숨이 희생되었지만 CIA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정보력의 부재는 CIA를 곤경에 빠뜨린다. 30만에 이르는 대규모 중공군이 국경에 집결했을 때도, 그 이후 미군이 기습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을때도 CIA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없을거라 판단했다. 전쟁이 끝나고 많은 세월이 지나서야 그들은 그것이 중국과 북한이 만들어낸 역정보였음을 알게 된다. 역정보의 피해는 심각했다.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이 모택동의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완전히 물러난 이후 CIA는 중국본토에 대규모의 저항군이 존재한다는 역정보에 속아 엄청난 양의 무기와 군사물자를 공급했으나 그것은 모두 모택동의 손으로 넘어가 버리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만큼 그들은 정보에 대해 무지했다. 헝가리에서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을때도 진짜 봉기가 일어난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되며 소련은 과연 이 봉기를 진압할 것인지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부산 앞바다로 놀러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요트에 총격을 가할정도로 그들은 인력이나 장비 그리고 체계마저도 허술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이란에서의 쿠데타 성공과 과정되어 전해진 과테말라 정부의 전복은 그들에게 어떤 국가의 정부도 무너뜨릴수 있다는 허황된 환상을 심어주기 시작한다. 이제 첩보세계의 초보자 CIA는 소련에 맞설수 있는 상대가 된 것처럼 보여졌다.
최고조의 냉전으로 언제나 일촉즉발의 위기가 오가던 시절 CIA는 현대사의 두가지 커다란 사건을 만난다. 존 F.케네디의 지휘 아래 승리한 대결로 비춰졌던 쿠바사태는 소련과의 협상의 결과물일 뿐이었으며, 미국에게는 잊을수 없는 전쟁인 베트남전은 다시한번 정보부재에 시달리는 CIA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회였을 뿐이다. 이후로도 저자가 고발하는 CIA의 오판은 끝이 없다. 소련의 아프칸 침공때도 CIA는 소련의 의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으며, 걸프전 역시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CIA는 워싱턴을 방문한 고르바초프를 열렬히 환영하는 미국인들의 의중조차도 몰랐으며, 소련의 와해 직전 소련경제는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또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CNN의 보도를 통해 접할만큼 그들은 그들의 임무조차도 방관하는 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목적도 있을 수 없습니다."
9.11은 완벽한 정책과 외교의 실패를 의미했다. 또한 적이 누군지조차 알지 못하는 재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이라크전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정보는 오판이 아니라 추측의 결과였고 그 여파는 너무나 컸다. 결국 저자 와이너는 이라크전이 CIA의 사망을 선고했다고 표현하며, 지식이 없는 행동, 정보가 없는 전쟁을 통해 미국인들은 CIA가 더이상 세상을 바꿀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현재의 CIA는 그 기능이나 권한이 많이 축소되었고, 많은 영역을 펜타곤에 넘기기까지 했다. 이제 CIA는 완벽히 추락했으며, 미국의 지도자들까지도 정보가 필요하면 CIA보다는 펜타곤을 그리고 민간 정보회사를 이용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미국의 국가 안보를 책임졌던 거대한 하나의 축이 사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60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의 조직은 그렇게 2류로 물러나버린 것이다.
방대한 이 책을 통해 조작과 과장 그리고 나아가서 오만에 이르는 과정을 낱낱히 보아왔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정보전은 너무나 중요한 현실이며, 승부를 좌우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요소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는지에 대해서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 같다. CIA 한국전쟁 관련 일급 비밀문서의 글귀가 눈에 띤다.
"지나간 일은 알지만 다가올 일은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