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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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한 김에 커피숍에서 책을 좀 읽어보려 자리를 잡았다. 한낮은 아직도 햇빛이 뜨겁기에 챙겨다니는 1리터 텀블러 가득 벤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얼음 추가로 주문했다. 책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컵에 남은 얼음을 분리대에 쏟아버리는 일이 어쩐지 두려웠다. 이걸 버려도 되나? 혹시 지금 버린 이 얼음이 아쉬워질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카페를 나서며 1리터 가까이 되는 음료를 방금 마시고 난 뒤인데도 입술이 바짝 마른 것 같아 신경쓰였다. 건조해진 날씨 탓에 진짜 말라있긴 했지만 이 건조함이 어쩐지 불편이 아닌 위협으로 느껴진다. 나는 양이다. " 눈앞의 일원을 그대로 따라가는 습성, 어쩌다 조금이라도 길을 잃으면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는 성향. p.72 " '드라이'는 양에게 충분히 " 무자비한 현실을 일깨 " 운다.

 

 표지의 '워터좀비'라는 단어 때문에 장르를 오해했었다. 알 수 없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물을 마시지 못하면 좀비가 되는 그런 내용일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좀비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물 때문에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워터좀비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목마름에 예민한 편이 아니어서, 혹은 물부족이라는 문제를 현실적으로 겪어본 적이 없어서 수분이 부족하고 목이 말라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에 잘 공감하지 못하며 읽었다. 위기 대응 메뉴얼 같은 것을 미리 읽어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변기를 내릴 물이 없어서 겪는 더러움이나, 씻을 수 없는 상황 같은 건 저절로 끔찍해졌다. 구호물품으로 기저귀가 포함되는 장면(334)에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 생리 중이었다면, 하고 떠올렸다. 극단적으로 수분이 부족해지면 생리도 멈추려나, 어쨌건 씻어야 할 텐데, 하고.

 

 하지만 재난 상황에서는 그런 사소한 문제는 등장하지 않는다. 상처가 생겨서 감염의 위기(149)를 겪거나, 심각한 전염병(219)이 돌아야 한다. 폭도가 되어버린 사람들(130/203) 혹 매춘(268)이나 강간(142/396)같은 상황은 등장할 수도 있겠다. 이런 굵직한 문제들이 함께 등장하면서 '드라이'는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밌어진다. 텔레비전에서 아무리 물부족을 경고해도 정말 물이 전혀 공급되지 않는 날이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물이 나오지 않아도 습관처럼 수도꼭지를 돌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이 이입된다. 자연스럽게 나라면 어떨까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지난번에 주문해뒀던 생수는 몇 개 남아있었지, 물티슈로 샤워를 대신하면 될까. 집에 먹을만한게 얼마나 있었더라, 밖으로 나면 위험할테니 집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미국인들은 총이 흔하니 극단적일 때는 총 한 방으로 끝낼 수 있겠구나.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비현실적으로 해봤다.

 

 전에는 '워터월드'라는 영화를 좋아했었다. 오래된 영환데 온난화로 빙하가 다 녹아 지구상에 땅이 사라진 미래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배 위에서 생활하게 되고 가장 귀한 화폐는 흙이다. 영화에서 인류는 아가미와 물갈퀴가 달리도록 진화된다. 혹은 반대로 '매드맥스'처럼 사막화 될지도 모르겠다. 바닷물이 넘쳐나건, 온세계가 사막화되어 사라지건 마실 수 있는 물이 중요해지는 건 비슷했다. 전에는 물과 관련된 재난이라고 하면 '워터월드'만 생각났었는데 '드라이'를 읽으면서 '매드맥스'가 함께 떠올랐다. 어느 쪽이 앞으로의 미래와 더 가까울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불안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지금처럼 풍요롭게 행복하게 잘 지내는 미래를 갖게 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전에는 이런 재난 영화들이 그저 막연히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해수면이 진짜로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 오니 문득 우리가 그린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전부 다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아보카도가 식재료로 대유행하면서 칠레, 멕시코 등지의 아보카도 재배지역이 물보족 현상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몇번이나 봤다. 그 뒤로 아보카도를 먹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보카도는 재배지역 땅 속의 물을 빨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모 샌드위치 프랜차이즈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보카도를 곁들인 신메뉴를 내지 않았던가. 어차피 수입국인 우리나라와 그 쪽의 물부족같은 문제는 큰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니까. 이런 식으로 보고도 지나쳐가는 위험 신호들이 얼마나 많을까. 북극곰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롤리라는 혼종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나 한 사람이 해서 뭘 변화시킬 수 있겠어 하며 지나친 실천들을 떠올려본다. 원인이자 결과인 인간에 대한 인류애가 사라지고 혐오감이 남는다. 나도 인류에 속하기 때문에 그마저도 금방 잊겠지만.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드라이'의 매력은 깔끔한 마무리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요즘 재난물들은 극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사랑보다는 연대에 더 초점을 맞추나보다. 관계성이 최근에 재밌게 봤던 영화 '엑시트'를 떠올리게 한다. 엑시트에서 조정석이 윤아를 과거에 짝사랑했던 역으로 나오는데, '드라이'에서도 켈턴은 옆집소녀 얼리사를 짝사랑한다. 때문에 찌질하게 군 적도 있지만, 이들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통해 좀 더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 성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이 반드시 헐리웃 영화처럼 간신히 목숨을 구한 두 사람의 진한 키스 장면으로 페이드 아웃되지 않는다. 그 뒤에도 삶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신뢰가 쌓인 관계를 신중히 발전시키도록 마무리하고 끝난다. 그래서 그 점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원래 재난물을 좋아해서 '드라이'를 아주 읽어보고 싶었고, 또 즐겁게 읽었다. 살아남기 시리즈는 어쩐 일인지 늘 매력적이다. 아이들 도서 중에서도 '000에서 살아남기' 시리즈가 폭발적 인기를 얻었었는데, 이런 류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건 나이가 상관없는 듯하다. 생존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어서일까 싶다. 재난물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고 싶다면, 그레타 툰베리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아보카도를 안 먹기로 결심했다면 '드라이'도 읽어본다면 좋겠다. 당신이 궁금해할 미래 물부족 재난에 대한 모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캘리포니아 주의 상황에 대한 모의실험 정도는 만족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고 남은 요점은, 갈증을 느끼지 않도록 수시로 물을 잘 마시도록 하세요. 그리고 물을 아껴씁니다. 우리 환경을 보호합시다. 계몽적인 독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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