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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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p.8 "

 

 '딸에 대하여'를 읽으려고 전부터 생각을 해왔지만 이제서야 읽었다. 책을 읽을 것이라는 계획이 늘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내용을 전혀 모르는 채로 있었다. 제목만 보고 엄마와 딸에 대한 내용이겠거니 했다. 무심결에 오래 전 영화 '마요네즈'나 전도연이 나온 '인어공주' 같은 영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때문에 사실 좀 더 보편적인 모녀관계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뜻밖의 내용이 있었다. 동성애에 대한 내용인가, 하고 주춤하다가 보편적이라는게 뭐지' 그린과 엄마가 나누는 대화가 결국은 모녀 사이의 보편이나 다름없는 것들 아닌가 생각했다. 다툼이나 친근함의 정도만 좀 다를 뿐 엄마와 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존재이면서 자신의 인력 안에서 상대방을 끝내 밀어내지 못하는 연관성이다.

 

 한참을 읽지 못했던 책을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문득 엄마에 대한 생각을 자주하게 되면서다.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쩍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 엄마가 그만큼 늙는다. 철없이 엄마, 엄마하고 쓰지만 실제로는 불혹에 가깝게 생각할 때가 되니 이제는 도리어 부모가 물가에 내놓은 애마냥 염려스러울 일이 많아졌다. 늙어가는 부모를 대신해 이런저런 물건을 주문하고, 볼일을 접수하고, 정보를 알아보다보면 내 시간을 쪼개 마음을 들이다가도 무심히 부모의 애정과 보살핌을 받는 다른 친동기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필요하다 하셨던 물건을 이제껏 없이 지내시게 말고 진작 사드리지 그랬어, 하는 불만이 불현듯 여직 시샘으로 번지는 탓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금반지 끼우고 싶은 손가락은 따로있다'는 우스갯말이 한동안 자주 입에 오르내렸다. 이제 노년으로 들어서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오를 일도 잦고, 부모가 된 사람들과 이야기 할 일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종종 농담처럼 입에 올린 말이고 머리로 이해하는 말이지만, 때때로 "엄마에게 나는 어떤 손가락이야" 묻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물을 수 없을 것 같은 말이라 생각되면서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질문을 마음속에 뭉쳐 이리저리 쓸어보는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딸이니까 '딸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이 질문이 조금은 흐려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엄마에게 딸이 무엇인지, '너같은 딸 낳아보'라는 엄마의 말을 잘도 피해간 딸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며.

 

 기대는 엄마와 딸이라기보단, 엄마와 자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내가 낳아 세상을 보이고 가르치고 기른 자식이 크면서 점점 하나의 완벽한 인간이 되어 엄마 앞에 섰을때. 엄마는 한때 자신이 가꾸고 정리하며 속속들이 알았던-혹은 그랬으리라 착각했던- 이 익숙하면서 낯선 우주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것은 못 본 척하고, 어떤 것은 물고늘어지고, 어떤 것은 포기하고, 어떤 것은 헤집는다. 하지만 자식은 마치 저혼자 커버린 것처럼 묵묵한 타인의 얼굴을 하고 이렇게 존재하는 나라는 우주를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문득 내가 엄마에게 숨겼던 것들, 전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 것들, 그리고 나의 결정만으로 선택한 것들을 떠올린다. 엄마에게도 때로 숨이 막힐 듯한 부서짐의 시간이 있었을까. 내 딸이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낯선 얼굴을 하고 있냐고 묻고싶을 때가 있었을까.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엄마에게 하지 않듯이 엄마도 나에게 내 딸의 얼굴을 한, 너무도 다른 생각과 말을 가진 이 여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갱년기와 함께 그런 시간들을 흘려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안에서 엄마는 그린을 다그친다. 남들처럼 살고 나서지말라고. 너를 너무 많이 교육시켰는가보다 후회도 한다. 그린은 엄마를 향해 대꾸한다. 나를 가르치고 키운 것이 다름 아닌 엄마라고. 해고된 강사들을 위해 시위를 하는 그린을 속상해하면서도 권과장에게 속엣말을 다 쏟아낸 것도 자신이다. 남들은 다 보아넘기는 것을 끝내 마음쓰고, 억지를 부려서라도 젠을 시설에서 빼내어 집으로 들인 것도 자신이다. 그린이라는 우주 안에서 빛나고 있는 별들은 분명 그녀에게서부터 왔다.

 

 엄마와 그린이라는 두 우주가 만나 언성을 높였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했다가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시나브로 스며들기도 하는 과정을 보며 '컨택트(arrival:2016)'를 떠올렸다. 영화에서 주인공 루이스는 갑자기 지구에 등장한 외계 비행체-셸과 소통하기 위한 임무를 얻는다. 영화는 현재와 미래를 교묘히 교차하며 전개되는데, 셸에서 만난 외계 생명체들과 반목하지 않기 위해서 루이스는 반드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 우리의 뜻을 전달해야만 한다. 영화에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 그들의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하게 됩니다. 미래를 보게 되요. 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 가지 않아요." 란 말이 나오는데 루이스가 셸과 소통하는 것이, 엄마와 그린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주인공 루이스에게도 딸 한나가 있었다. 그 막을 수 없는 존재가.

 

 젠을 보며 품는 딸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아직 젊은 딸이 몰라주는 것이 답답했을 것이다. 딸이 여자 연인을 데려와서 같이 사는 일이 남들 눈에 뭐 어떻냐고,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이 사실 이리저리 보따리 옮겨 다니는 시간강사라는 것은 또 뭐 어떻냐고 생각하다 엄마가 하는 고민이 지극히 현실적임을 불쑥 깨닫는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날 그린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면 그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엄마 뿐인 현실이나 젊을 적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이라도 연고없이 혼자 늙어버리고 난 후에는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고 만다는 처참함이 있었다. 나이를 더 먹었다는 뜻일까, 자꾸만 그런 모퉁이들이 더 눈에 밟혔다. 어쩌면 나같은 사람도 이제 점점 굳어서 뭔가를 '막고 있'는지 모른다.

 

 가볍게 읽었는데 생각보다 이리저리 길어졌다. 책을 읽으면 내 안에 뭉쳐둔 것을 조금 풀어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읽는 동안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이 나름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끝맛이 남아서 좋았다. 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는지 이해되었다. 그동안 읽어야지, 생각해왔던 책 중 하나를 읽었으니 책 한 권 만큼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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