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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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는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 있어. p.52 "

 

 본업을 너무나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찬혁의 소설이 궁금했다. 종종 듣는 좋아하는 노래도 있고, 남매 뮤지션이라는 끈끈한 관계성 때문에 악동뮤지션에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설을 썼다는 신간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에 이런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음악과 가사로 보여줬던 세계를 소설로 보여준다면, 나는 또 어떤 느낌을 받을까 궁금했다. '물 만난 물고기'를 읽기 전에는 그가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이기 때문에 내용이 궁금했다면, 책을 읽는 동안은 그를 악동뮤지션의 이찬혁과 분리시켜야 하는 것일지 고민했다.

 

 소설 속 해야는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해야에게 빠지는 선이의 모습을 보면 볼 수록 나도 해야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자신에게 있어 너무나 큰 존재로 받아들이는 선이를 불안정하고 미숙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 그녀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못했으면 난 이 마지막 여행 이후로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음악가보다 환경미화원이 더 멋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야는 나의 음악에서 결핍된 자리를 정확히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가 나의 음악이었다. 그녀의 말고 생각은 나를 번뜩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그녀였다. p.115 "

 

 " 그녀의 책에는 결말이 있을 것이고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가장 마지막 챕터가 나올 것이다. 내가 그녀의 책 가장 마지막까지 등장하는 조연이라면 난 주저 없이 가장 멋진 결말을 그녀에게 선물할 것이라 다짐했었다. p.161 " 언뜻 로맨틱하기도 하고, 멋진 것 같은데, 이를 두고 낭만적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표현이 어색했다. 오히려 그녀가 나의 책-인생-에 등장하는 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이의 생각이 자기파괴적이라 느껴질만큼. 하지만 저자를 떠올렸을때 어쩌면 그는 그럴수 있을 것이라는 이해를 하게 된다. 그가 가진 젊음과 그가 보여준 젊음만큼의 순수같은 것들에선 저런 낭만이 가능할 것이라고.

 

 자유롭고 부드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쩐지 안전벨트를 푸는 해야의 행동(38)에 주춤하게 된다. 요즘은 티비 프로그램에서도 사람들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 나오면 전좌석 인원이 모두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다. 미착용한 모습을 발견하면 시청자 게시판 같은 곳에 이를 지적하는 글이 올라오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엄격한? 규정에 대한 지적과 수정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일까, 소설을 읽으면서도 마치 실제처럼 '저러면 안되는데'하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두 사람이 드라이브를 하는, 그러면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장면인데도 나는 티비를 보듯이, 출연자와 제작진들이 지켜야 할 사회의 규범을 연상한 것이다.

 

 빨간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기로 한 일, 처음엔 꽤 그럴싸한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죄수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조차 만약 그들이 입은 죄수복이 진짜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속으로 자꾸 브레이크를 거는 동안 소설의 내용은 더욱 자유로워졌다. 선과 해야의 만남이 애매한 착각같았다면 선의 여행이, 해야의 존재가, 그들의 이별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어떨때는 의미를 알 수 없어졌다. 소설의 사소한 장면들을 끌어와 현실에 끼워맞추려는 시도들이 내 기준점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같았다. 이는 내가 소설 속에 푹 빠져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호기심이 가긴 했지만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창작해 낸 곡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내면에 맑은 장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만족스러웠다. 음악을 들으며 '어떻게 이럴 수 있지'하고 생각했던 걸 '이런 사람이라 그랬구나'하고 멋대로지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어쩐지 알몸이나 키스라는 단어가 나와도 외설적인 뉘앙스가 전혀 연상되지 않는 글이었다. 얼룩말들이 옷을 걸치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포옹으로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형태와 감정의 교류로 보였다. 이쯤되니 만약 그가 죽음과 거짓으로 점철된 스릴러나 추리소설 같은 것을 썼다면 혹은 인간 밑바닥의 추악한 본성에 대한 글을 썼다면 덜 잔인하게, 자연스럽게 보였을까 궁금해졌다.

 

 읽는 동안 내가 멀어진 곳에 서서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작가의 존재가 의식되었다. 유명인이 냈다는 특징은 그 책을 찾아 읽게 만드는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결국 그 안의 '나'를 자꾸만 '그'로 바라보게 만드는 점도 있었다. 어느 작가의 글을 보더라도 '나'를 두고 작가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의식하고 덧그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물 만난 물고기'를 읽는 동안은, 어쩌면 책을 읽을 때 카페에서 그의 신곡이 나왔기 때문에 더 그랬을지 모르지만 새 앨범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었단 문구와 함께 자꾸만 작가가 아닌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이 떠올랐다. 지금은 '물 만난 물고기'를 읽으면서 조금 아쉬움을 느껴졌지만 앞으로 그가 더 다양한 분위기의 글을 지금처럼 순수하게 계속해서 쓴다면 어떨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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