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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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한 소설이었다. 소원을 말해달라는 상큼한 제목과는 다르게, 음울하고 축축한 느낌이 물씬 드러나는 내용이었다. 읽으면서 계속, 이게 뭔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국내 최초 재난.공포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역작!'이라는 띠지의 문구를 보면서 역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소설은 확실히 국내 최초이긴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표지 디자인이 예뻐서 겉만보고 어떤 내용일지 꽤 기대했었는데, 읽고 나니 아무래도 책을 앞에 두고 산길을 걷다 뱀 한마리를 마주한 것처럼 호감이 일지 않는다. 뱀을 싫어했던가, 재난물을 좋아하는 편인데, 왜 그럴까. 

 

 "소원을 말해줘"에는 두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뱀이다. 소설에서는 뱀을 전설 속의 존재로 그려낸다. 도시를 사로잡은 불치의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전설을 품은 뱀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도시에 나타난 전설-일지도 모르는-의 뱀을 두고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뱀에 애정을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동물원의 주인이 가끔 찾아와 핸들링을 하거나 사육사가 뱀과 교감하는 장면들은 놀라움과 더불어 약간의 불쾌감을 준다. 뱀도 주인을 알아본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 몸을 타고 구불거리는 것으로 묘사되는 교감의 순간이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막연히 좀 징그럽게 느껴진다. 

 

 또 하나는 피부병인데, 이 특정 구역 사람들에게 주로 발명하는 병은 피부껍질이 각화되면서 간지러움과 통증이 생기고 심해지면 악취를 풍기는 피고름을 흘리는 증상을 보인다. 이들이 사회에서 격리되고 불이익을 감수하며 생존하는 모습은 과거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떠올리게 만든다. 소설 속에서 증상이 심해진 피부 껍질을 치료해서 새 살이 돋게 한다는 치료방법은 꼭 뱀이 허물을 벗어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탈피 과정을 연상하게 한다. 때문에 책을 읽으며 이 두가지 키워드가 꽁꽁 얽혀 도시전설에 지나지 않는 롱롱의 존재를 마음 속 깊이 바라게 된다. 기적이나 영웅이 나타나길 바라는 것처럼 '소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만 소설은 뱀처럼 교묘히 독자를 홀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거대한 뱀이 궁에서 도시로 이동할 때의 모습은 설명으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헬스장에서도 타이어가게에서도 뱀은 때로 거대해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처럼 느껴지다, 갑자기 이성적인 크기의 파충류로 작아지기도 했다. 그 점은 읽는 동안 아쉬웠다. 거기에 사육사와 척의 감정선은 갑작스럽게 깊어졌고, 공박사와 척 사이의 끈은 설정보다 약해서 존재감이 미미했다. 양념처럼 끼얹어진 노파나 두목 원숭이의 존재는 거칠게 두드러져 나왔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등장한 인물들이라 구심점없이 기능만 하고 흩어진 느낌이었다. 좀 더 탄탄했다면 훨씬 더 매력적으로 읽히지 않았을까 싶다. 

 

 읽으면서 종종 작가에게 있어 뱀이란 대체 무엇일까 생각했다. 뱀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뱀을 너무나 무서워하는 사람일까. 어찌되었든 작가가 뱀이란 것에 깊이 사로잡혀있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뱀이 이렇게나 중요한 존재였던가. 소설 안에서 뱀은 실제로 존재하고, 전설이 되고, 상징이 되어 등장한다. 사람들에게 허물이 생긴다는 것은 그저 부수적인 것이고 모든 것이 마치 뱀에 의한 뱀에 대한 뱀을 위한 소설같았다. 한번도 뱀을 이렇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읽으면서 조금 당황했다. 뱀이란 단어를 단시간에 이렇게 많이 본 것은, 동물원의 파충류사를 구경할 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이 점은 재밌었다.

 

 사실 동물원에서밖에 뱀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리창 너머로 격리되어 있는 무기력한 기묘한 생김새의 동물을 별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흥미롭게 책을 읽었다. 다만 내 가까운 친구는 어린시절 집이 농장을 했었는데, 길에서 가끔 뱀을 마주칠 일이 있었던 터라 뱀을 아주 싫어했다. 단지 뱀의 생김새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위협을 느끼며 뱀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주변에 오직 그뿐이라 나는 뱀이란 말이 나오면 무심결에 그를 떠올리곤 한다. 책을 읽으며 그 친구를 내내 떠올렸는데, 아마 이 책은 읽기조차 싫어하지 않을까 싶다. 독특한 느낌을 주는 인상적인 소설이기는 하지만 뱀 때문이 아니더라도 피부병같은 소재로도 충분히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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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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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다.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 생각이 변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다 읽고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생각해보니 불쑥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 표지의 색감이 좋아서 찬찬히 살펴봤는데 띠지에는 '가족과 못 다한 삶을 후회하는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안한 일생일대의 거래'라고 되어 있고, 뒷면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 당신이 영원히 지워진다면' 하고 써있길래 이 곤경을 이겨내는 가족이야기가 담겨있으려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결말이...

 

 지나온 시간동안 일만 하며 살아온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그는 유명하리만큼 성공했고, 부유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암에 걸렸다. 그 사실을 하나뿐인 아들에게 차마 털어놓지도 못할만큼 가족과 멀어져 있었다. 그는 그저 아들이 일하는 바의 창문 밖에서 아들을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다. 그가 내뱉는 과거의 한 장면장면마다 후회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고비마다 나타났던 의문의 여자가 병동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명부에 이번에야말로 그의 이름이 적히게 될지 그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책을 읽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들이 만났던 순간마다 그의 삶이 어땠는지 돌아보는 과정 동안 이맘때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인공 스크루지였다. 주인공은 돈에 있어서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명부를 가진 여인과 그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이 스크루지에게 세명의 유령이 찾아와서 그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날이 추워지는 요즘, 커피숍에서 나오는 캐롤이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더불어 '일생일대의 거래'도 지금 시즌에 잘 어울릴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주인공이 내린 선택이 가족에게 있어서는 더욱 이기적인 선택인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서사도 아니고 그동안 가족에게 있어 무심했던 아버지였는데, 그가 내린 결정마저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본인이 명예롭다고 생각하는 선택으로 만족을 얻고자하는 이기적인 결정 아닌가 싶었다. 영웅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이지만 평생을 결여로 성장해 온 아들이 알면 오히려 가슴에 대못이 박힐 전개였다. 한국적 신파를 섞어 영화로 만들 수도 있을 법한 느낌으로.

 

 가끔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폐쇄적이고, 나와 내 가족, 내가 버리고 떠나온 과거를 잘 아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버티고 있는 집단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작은 동네에서의 생활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나 전작 '베어타운'에서 떠나고 싶고 떠나야만 하는 곳으로 보여지는 고향에 이렇게까지? 싶어질 때가 있었다. 이번 '일생일대의 거래'에서 나오는 헬싱보리의 장소들은 실제 그가 자라온 곳을 배경으로 한다. 대체 고향이 그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이렇게 고향을 깊게 의식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책을 처음 다 읽었을 때는 마지막 장까지 덮고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짧지만 잘 짜여졌다는 것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 싶었다. 내용에 대해서는 감동을 떠나서 내 생각과 다른 점이 있긴 했지만, 내 생각일 뿐이고 책을 읽고 감동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책을 이제 몇 권 읽어봤을 뿐인데, 신간을 읽을 때마다 점점 더 마음에 든다. 처음엔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꽤 좋다고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된다고 마음이 바뀌었다. 프며들었나보다. '일생일대의 거래'를 통해 당신도 프며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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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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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복희라는 이름이 주는 어감과 원더랜드가 조합된 제목도 독특하고 경쾌해보이고 내가 읽기를 기대해왔던 재기발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 읽고 난 뒤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재밌다기 보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싶었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의 배경이 캄보디아라는 걸 알고나자 친구가 떠올랐다. 박지우가 특별한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캄보디아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가 그렇다. 친구는 자꾸만 캄보디아로 떠났다. 추운 것이 싫어 추운 계절이 오면 한국을 떠나있곤 하는데 작년에는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도 좀체 돌아오질 않았다. 나에게도 잠시 놀러오라'고 권했는데 차마 놀러가질 못했었다. 한달살기가 유행이라던데 친구는 한달이 아니고 여러달을 살고 나서야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올해의 찬바람이 불자 친구는 또 캄보디아로 떠난다고 했다. 대체 캄보디아 땅에는 무슨 매력이 있길래 친구는, 또 한달을 사는 사람들은 자꾸만 캄보디아로 떠나는걸까.

 

 책은 한달살기의 매력이나 진짜 '원더랜드'같은 무릉도원을 만들어놓은 수수께끼의 호텔 주인에 대한 판타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리얼하게 담았다. 세계 어딜가도 끈끈하게 얽혀서 차이나타운을 만든다는 중국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국도 저래야 되는데 하고 맹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왜냐면 우리는 암암리에 외국나가면 한국 사람들이 사기치는 걸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이 퍼져있지 않은가. 그래서 서로 도와주고 가게도 겹치지 않게 개업하도록 해서 과열경쟁도 막는다는 중국사람들 얘기가 부러웠다. 그런데 막상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면 끈끈하게 얽혀오는 한인회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춤...더랜드'에서 보여준 교민들의 삶은 조금 더 유쾌하고 부드럽게 풀어냈을 뿐, 내가 나가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를 주축으로 모여있는 사람들, 신자가 아니더래도 한인들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장소에서 정보나 도움을 얻고 낯선 땅에 자리잡아 살기 위해 찾아가게 되는 곳. 그리고 그 안에서 빠르게 도는 소문이나 돈에 관한 문제- 단순히 돈을 빌리고 투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누구의 씀씀이, 가난하고 부유해보이는 외견에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서는 일같은 건 어디서나 사람들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볼 수 있겠지만 외국의 좁은 한인사회라는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면 좀 더 숨막힐만한 것이다.

 

 지우의 친구가 무시하듯 말한 "거기 거지나라 아님?(37)"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한 못사는 나라라는 선입견에,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좁은 한인사회. 거기에 고복희씨의 원더랜드 부지를 탐내는 사람들의 욕망이 더해지면 '춤더랜드'의 무대가 다소 환멸나게 보인다. 심지어 교회에서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는 서스펜스 적 사건이 더해지면서 복희씨는, 원더랜드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과 의문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 불유쾌한 내용을 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않고 깔끔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풀어가는 책의 중심에는 잘 설정된 인물들이 있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의 강점은 인물이다.

 

 책 안에 나오는 인물들은 분명하다. 이래저래 뭉그스름하게 그려진 사람이 없이 다들 자신만의 분명한 선과 색이 있다. 그래서 이들이 책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재밌다. 각자 자기만의 생각과 욕심을 가진 인물들을 보며 책을 읽는게 아니라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결같은 인물, 변화하는 인물, 방황하는 인물, 막혀있는 인물, 반성하는 인물. 수많은 인물들 중에 우리의 고복희씨는 모난 돌처럼 튀어나와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꿈꾸는 어떤 이상적인 면을 가진 인물에 가깝다는 점도 좋았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할말은 하고, 치우치거나 쉽게 흔들리지 않을 중심을 분명히 갖고 있으면서,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복희씨는 보는 이의 속을 시원하게 만드는 통쾌함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고복희씨처럼 단단하고 곧게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렵단 말인가. 장영수같이 사는 척은 흉내낼 수 있지만 고복희처럼 사는 일은 흉내내기도 어렵다. 한결같고 부지런해야 하니까. 둘이 참 달라서 안 맞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담당하고 있던 것은 이 둘의 과거였다. 다 읽고 나니 영수씨가 왜 복희씨를 사랑했는지, 복희씨는 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수씨와 결혼하게 되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춤더랜드'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산다는 걸 복희씨가 내지르는 한방이, 감정적이고 줏대없던 박지우의 변화가, 린이, 안대용이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는건 따뜻한 경험이 되었다.

 

 친구처럼 캄보디아로 여행을 떠난다면- 여행지에 가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편이 아니라, 원더랜드에 묵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더랜드가 청결하도록 관리에 힘쓰는 복희씨가 있어서 믿음직하고 조용한, 무엇보다 '저렴한' 숙소가 될 것이다. 물론 조식이 맛없다는 건 큰 문제이지만.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를 읽으며 즐거웠다. 젊은 작가다운 재기와 기대 이상의 따뜻함을 보여주었다. "원더랜드는 여전하다.(259)"고 독자가 꿈꾸게 만들만큼. 앳된 얼굴로 다부진 소설을 내놓은 작가 문은강이 보여줄 다음 무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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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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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매가 돌아왔다'는, 애석하지만 제목과 분홍색 표지 거기에 그러진 캐릭터 그림의 조화가 한데 어우러져 키치해보인다. 솔직히 좀 뻔하게 느껴지는 가족환장극의 기운에 '요절복통'이란 말이 써 있어도 얼마나 재밌겠는가 싶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최후의 만찬'이라는 역사소설을 진중하지 못하게 읽어서 그런지 이런 가벼움에 홀랑 넘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역시 처음부터 주인공은 요즘 트렌드에 맞는 88연속 각종 시험과 구직 낙방을 자랑하며, 혼자 노래방에 등록되어 있지도 않은 뭔 종점? '종점 보관소'라는 노래를 애창하는 인물이었다. 문학상까지 받은 소설은 무겁다고 별로 재미있게 읽지도 않았으면서 이천년대 양산형 소설같은 '할매가 돌아왔다'는 재밌게 읽었다고 하면, 아무리 '책을 읽는 이유가 재미있어서'라지만 너무 뻔한거 아닌가 싶었다. 차갑게 읽어야지. 마음먹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아니, 근데 '광복 직전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할머니'가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 게다가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치매를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하며 '평소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 처럼 행동하던 할아버지의 입에서 '더러운 잡년'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과거는 무엇이고? 핏덩이같은 자식들을 버리고 외국나가서 잘 살다가 다 늙어 돌아온 할머니라니, 자기는 88번이나 탈락된 주제에 네 할머니란 말에 가족의 짐덩이같은 할머니란 존재를 무작정 대문을 통과 시켜줘버린 동석에게 짜증이 나버렸다. 다행이? 동석이빼고는 야무진 가족들이 할머니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을때 슬며시 안도했다. 그냥 이 책의 내용은 굴러온 돌이 박히게 두지 않으려는 가족간의 긴싸움이 되겠구나 예상했는데 갑자기 분위기는 60억이 된다. 제니-끝순 할머니가 가지고 돌아온 유산 60억! 가족들의 머리에서 돈계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상황에서 홀로 터져나오는 할아버지의 고함은 애처로워진다.

 

 대체 할머니는 왜 67년동안 집을 나갔던 것인가! 67년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왜 이제서야 다시 가족에게 돌아게 된 것일까. 무엇보다 할머니가 가지고 돌아왔다는 유산 60억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60억의 유산은 누구에게 얼마나 배분될 것인가! 이 모든 의문과 비밀, 진실 그리고 돈을 둘러싼 가족들의 치열한 물밑작업이 시작된다. 이 정도의 상황까지는 좀 흥미로울 뿐이었는데 스트레스 때문에 갑자기 전립선이 막혀 오줌을 눌 수 없는 여든넘은 노인의 고통 앞에서 나는 무너졌다.

 " 아버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할머니는 누워 있는 할아버지 바로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비켜라, 더러운 년, 뭘 하려고. 내 몸에 손 대지 마라. 할아버지의 마지막 저항은 참으로 서글펐다. 시끄러워, 이 짝불이 자식아, 누군 뭐 네 조그만 잠지 만지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가만히 있어. ...중략...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할머니 손을 피하려 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급해진 할아버지가 용을 쓰다가 그만 뭔가를 지린 것. 할아버지의 얇은 바지 위에 노란빛이 퍼져갔다. 아휴, 똥까지 지렸네, 더러운 새끼. 어멈아, 응급차 오기 전에 갈아입혀야겠다.(95) "

 할아버지가 똥을 지리듯, 나도 모르게 지려.. 아니,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고작 똥오줌 얘기에 무너지다니 자존심 상하게.

 

 거기다 동생이 밥 사준다고 불려나간 강남역 8번 출구 회전초밥집에서 동석이 보인 태도는 나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친구라는 놈한테 여친 뺏기고도 밸도 없이 술이나 얻어먹고 시집가서 살고 있는 전여친이나 아쉬워하는 지질한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지한 모습도 있었다. "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47)" 이건 동석의 생각이자, 요즘 내가 음식점 갈 때마다 하는 진중한 다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밥통이 작아지는지 기량이 전같지 않아 마음이 아픈데, 동석의 이런 진지한 태도가 깊은 공감을 낳았다. 그리고 그 회전초밥집 진짜 있는 가게라면 나도 한 번 가고 싶어졌다. 가성비 맛집이라는 설정이 참 좋았다. 12년도에 처음 나온 책이니 아마 예전엔 있었어도 지금은 이미 사라졌겠지.

 

 어쨌든, 이 책은 그냥 웃기기만한 가벼운 내용도 아니다.

 " "나 아니여." 할아버지의 무지막한 대꾸가 이어졌다. "아니긴 뭐가 아니여. 개잡년아." "나 아니라니까." "이것이 또 거짓부렁이여."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빨리 자수를 해야 했다. "전데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고 할머니는 입을 앙다물고 눈을 감았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약 3분 뒤 할머니가 드디어 침묵 대결을 깨뜨렸다. "넌 그때도 날 믿지 않았어." ...중략... "넌 마누라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165) " 

 차 안에서 동석이 뀐 방구 때문에 툭 불거져 나온 과거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씩 풀려지는 회한의 세월과 함께 웃음속에서도 마음이 말랑말랑 아려온다. 그러다 문득 아, 이래서 이 책이 사랑받을 수 있었구나 싶어진다. 하다못해 짝불이란 말까지 마음이 아려오게 만드는 과거가 숨겨져있다. '할매가 돌아왔다' 제목이나 가벼워보이는 표지만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괜찮았다. 책을 다 읽고나서 한참동안 '마음이 동한다'는 것(217)에 대해 생각해봤다. 미소가 지어졌다. '60억'도 떠올려봤다. 광대가 솟고 잇몸이 마른다. 마음이 더 동한다.

 

 결말은 글쎄, 가장 적당했지만 소설다운 통쾌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설다운 통쾌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더니 더 좋았다. 다 때려부숴버리면 얼마나 속이 다 시원하고 좋았을까. 하지만 이런 결말도 있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앞을 열어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삶이 계속되듯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봤는데 이 책을 쓴 작가가 63년생이다. 젊은 감각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63년생이라니. 재미와 더불어 감탄도 나온다. 재미와 감동은 아쉽지 않은 책이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12년도에 진작 못 발견했던게 아쉽다. 여기저기 판권이 많이 팔린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연극 무대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이라 무대에서도 꼭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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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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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가장 많이 생각한 것 같다. 수상작이라는 이름표를 내려놓고 본다면 아마 이 책은 내가 좋아할만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어쩐지 읽으면서 이래도 되나 싶은 소설적 구성들이 눈에 걸렸는데, 긴 집필기간 동안 작가가 많이 알아보고 생각해서 썼을 것이란 생각에, 어련히 잘 쓰셨을까 하고 찜찜한 마음을 접으며 읽었다. 문득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나랏말사미'가 떠올랐다.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재해석이 큰 논란이 됐었던 까닭이다. 첫머리에 소설은 소설로만 읽히길 바란다는 당부가 있지만 왜 자꾸만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호불호가 있는 성향이란 말을 듣기는 하지만, 내 성향탓이 아니라 이 책은 진짜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가벼운? 재미있는? 글들만 찾아 읽으려고 해서 그런가 무게감이 느껴지는 글에 몰입을 잘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평소에 역사관련물은 책도 그렇고 영화나 드라마로도 잘 보질 않아서 솔직히 단어 하나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이 있었다. 심지어 책을 읽다가 "예"하고 대답이 나올만한 부분에 "제"라고 오자가 있는 것을 보고도 옛날에는 저렇게도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냥 넘어가버렸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오자라고 말해서 '역시'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쓰고보니 괜히 솔직했나 굉장히 무식해보인다. 무식이 드러났다. 학교 다닐 적에 역사 공부를 덜해서 그런거다 하고 말하면 할말은 없지만.

 

 시대물이라는 이유를 빼고서도 책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무겁고 오래되었다. 역사물을 좋아한다면, 그래서 장르소설도 시대물 위주로 보고 드라마도 챙겨본다면 이 책이 좀 더 매력적으로 다가갈지 모르겠다. 거기에 종교가 있다면 더욱.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글쎄 좀 갸우뚱하며 읽게 되지 않을까. 읽으면서 길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아주 간단하게 누구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어떤 사건을 바라봐야할지 잡힌다면 의도나 흐름을 파악하기 더 좋았을테지만, 인물들은 한 틀에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길을 따라 결말이라는 끝을 향해 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각각의 큐브 조각들이 서로의 고리에 연결되어 하나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된 인물인 도향과 약용의 관계에서 왠지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정약용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어쩐지 내심 역사시간 메인 인물인 그에게 경외감 같은 것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도향이 나오는 부분마다 정약용의 모습이 흔들리는 개인으로만 묘사되는 것 같았다. 도향이라는 인물이 가진 것을 오히려 접게 만드는 걸림돌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장벽이 오히려 책을 읽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정말 오랜만에 정약용에 대해 다시 알아보았다. 그의 삶이 책에서 보여지는 것과 비슷한 궤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며 이상하게 오히려 역사와 책속의 정약용이 별개의 서사를 가졌다는 것을 분리할 수 있었다. 반면 읽을수록 장영실의 존재가 너무나 커지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최후의 만찬'을 보며 오른쪽 두번째 인물이 장영실..이 될 수 있는가를 연관짓다니. " "장영실은 정말 밀라노에 갔단 말인가?" (318)" 이 문장은 내 머리속에도 황당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난 뒤에 조심스럽게 재밌어지기 시작한다. 화선지에 살짝 묽은 염료가 번지듯이 은근하게. 처음에 불편했던 도향과 약용의 관계도 어긋남이 보이면서 담담해지고, '변음'에서 오는 불협화음같은 긴장감이 고조되며 점점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어휘들도 익숙해지고 그동안 풀어졌던 떡밥들이 일부나마 회수된다. 시대적 배경도 그렇고 어떤 부분은 판타지인가 싶어진다. 이미 지리적 배경은 밀라노에 다빈치까지 끌어온데다 종교문제까지 있으니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했던 걸까 싶어진다. 그 뒤로도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렀기 때문에 그 이상을 쓸수도 없을테지만. 어쩌면 너무 많이 지나보내고 난 뒤에 재미를 느끼고 읽어서 끝맺음이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모로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전에 잘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장르를 만나본 것 같아 괜찮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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