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할매가 돌아왔다'는, 애석하지만 제목과 분홍색 표지 거기에 그러진 캐릭터 그림의 조화가 한데 어우러져 키치해보인다. 솔직히 좀 뻔하게 느껴지는 가족환장극의 기운에 '요절복통'이란 말이 써 있어도 얼마나 재밌겠는가 싶었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최후의 만찬'이라는 역사소설을 진중하지 못하게 읽어서 그런지 이런 가벼움에 홀랑 넘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역시 처음부터 주인공은 요즘 트렌드에 맞는 88연속 각종 시험과 구직 낙방을 자랑하며, 혼자 노래방에 등록되어 있지도 않은 뭔 종점? '종점 보관소'라는 노래를 애창하는 인물이었다. 문학상까지 받은 소설은 무겁다고 별로 재미있게 읽지도 않았으면서 이천년대 양산형 소설같은 '할매가 돌아왔다'는 재밌게 읽었다고 하면, 아무리 '책을 읽는 이유가 재미있어서'라지만 너무 뻔한거 아닌가 싶었다. 차갑게 읽어야지. 마음먹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아니, 근데 '광복 직전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할머니'가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 게다가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치매를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하며 '평소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 처럼 행동하던 할아버지의 입에서 '더러운 잡년'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비밀스러운 과거는 무엇이고? 핏덩이같은 자식들을 버리고 외국나가서 잘 살다가 다 늙어 돌아온 할머니라니, 자기는 88번이나 탈락된 주제에 네 할머니란 말에 가족의 짐덩이같은 할머니란 존재를 무작정 대문을 통과 시켜줘버린 동석에게 짜증이 나버렸다. 다행이? 동석이빼고는 야무진 가족들이 할머니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을때 슬며시 안도했다. 그냥 이 책의 내용은 굴러온 돌이 박히게 두지 않으려는 가족간의 긴싸움이 되겠구나 예상했는데 갑자기 분위기는 60억이 된다. 제니-끝순 할머니가 가지고 돌아온 유산 60억! 가족들의 머리에서 돈계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상황에서 홀로 터져나오는 할아버지의 고함은 애처로워진다.

 

 대체 할머니는 왜 67년동안 집을 나갔던 것인가! 67년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왜 이제서야 다시 가족에게 돌아게 된 것일까. 무엇보다 할머니가 가지고 돌아왔다는 유산 60억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60억의 유산은 누구에게 얼마나 배분될 것인가! 이 모든 의문과 비밀, 진실 그리고 돈을 둘러싼 가족들의 치열한 물밑작업이 시작된다. 이 정도의 상황까지는 좀 흥미로울 뿐이었는데 스트레스 때문에 갑자기 전립선이 막혀 오줌을 눌 수 없는 여든넘은 노인의 고통 앞에서 나는 무너졌다.

 " 아버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할머니는 누워 있는 할아버지 바로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비켜라, 더러운 년, 뭘 하려고. 내 몸에 손 대지 마라. 할아버지의 마지막 저항은 참으로 서글펐다. 시끄러워, 이 짝불이 자식아, 누군 뭐 네 조그만 잠지 만지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가만히 있어. ...중략...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할머니 손을 피하려 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급해진 할아버지가 용을 쓰다가 그만 뭔가를 지린 것. 할아버지의 얇은 바지 위에 노란빛이 퍼져갔다. 아휴, 똥까지 지렸네, 더러운 새끼. 어멈아, 응급차 오기 전에 갈아입혀야겠다.(95) "

 할아버지가 똥을 지리듯, 나도 모르게 지려.. 아니,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고작 똥오줌 얘기에 무너지다니 자존심 상하게.

 

 거기다 동생이 밥 사준다고 불려나간 강남역 8번 출구 회전초밥집에서 동석이 보인 태도는 나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친구라는 놈한테 여친 뺏기고도 밸도 없이 술이나 얻어먹고 시집가서 살고 있는 전여친이나 아쉬워하는 지질한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지한 모습도 있었다. "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47)" 이건 동석의 생각이자, 요즘 내가 음식점 갈 때마다 하는 진중한 다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밥통이 작아지는지 기량이 전같지 않아 마음이 아픈데, 동석의 이런 진지한 태도가 깊은 공감을 낳았다. 그리고 그 회전초밥집 진짜 있는 가게라면 나도 한 번 가고 싶어졌다. 가성비 맛집이라는 설정이 참 좋았다. 12년도에 처음 나온 책이니 아마 예전엔 있었어도 지금은 이미 사라졌겠지.

 

 어쨌든, 이 책은 그냥 웃기기만한 가벼운 내용도 아니다.

 " "나 아니여." 할아버지의 무지막한 대꾸가 이어졌다. "아니긴 뭐가 아니여. 개잡년아." "나 아니라니까." "이것이 또 거짓부렁이여."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빨리 자수를 해야 했다. "전데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고 할머니는 입을 앙다물고 눈을 감았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약 3분 뒤 할머니가 드디어 침묵 대결을 깨뜨렸다. "넌 그때도 날 믿지 않았어." ...중략... "넌 마누라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165) " 

 차 안에서 동석이 뀐 방구 때문에 툭 불거져 나온 과거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씩 풀려지는 회한의 세월과 함께 웃음속에서도 마음이 말랑말랑 아려온다. 그러다 문득 아, 이래서 이 책이 사랑받을 수 있었구나 싶어진다. 하다못해 짝불이란 말까지 마음이 아려오게 만드는 과거가 숨겨져있다. '할매가 돌아왔다' 제목이나 가벼워보이는 표지만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괜찮았다. 책을 다 읽고나서 한참동안 '마음이 동한다'는 것(217)에 대해 생각해봤다. 미소가 지어졌다. '60억'도 떠올려봤다. 광대가 솟고 잇몸이 마른다. 마음이 더 동한다.

 

 결말은 글쎄, 가장 적당했지만 소설다운 통쾌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설다운 통쾌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더니 더 좋았다. 다 때려부숴버리면 얼마나 속이 다 시원하고 좋았을까. 하지만 이런 결말도 있는 법이다. 한편으로는 앞을 열어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삶이 계속되듯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봤는데 이 책을 쓴 작가가 63년생이다. 젊은 감각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63년생이라니. 재미와 더불어 감탄도 나온다. 재미와 감동은 아쉽지 않은 책이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12년도에 진작 못 발견했던게 아쉽다. 여기저기 판권이 많이 팔린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연극 무대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작품이라 무대에서도 꼭 만나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