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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복희라는 이름이 주는 어감과 원더랜드가 조합된 제목도 독특하고 경쾌해보이고 내가 읽기를 기대해왔던 재기발랄한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 읽고 난 뒤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재밌다기 보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싶었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의 배경이 캄보디아라는 걸 알고나자 친구가 떠올랐다. 박지우가 특별한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캄보디아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가 그렇다. 친구는 자꾸만 캄보디아로 떠났다. 추운 것이 싫어 추운 계절이 오면 한국을 떠나있곤 하는데 작년에는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어도 좀체 돌아오질 않았다. 나에게도 잠시 놀러오라'고 권했는데 차마 놀러가질 못했었다. 한달살기가 유행이라던데 친구는 한달이 아니고 여러달을 살고 나서야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올해의 찬바람이 불자 친구는 또 캄보디아로 떠난다고 했다. 대체 캄보디아 땅에는 무슨 매력이 있길래 친구는, 또 한달을 사는 사람들은 자꾸만 캄보디아로 떠나는걸까.
책은 한달살기의 매력이나 진짜 '원더랜드'같은 무릉도원을 만들어놓은 수수께끼의 호텔 주인에 대한 판타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리얼하게 담았다. 세계 어딜가도 끈끈하게 얽혀서 차이나타운을 만든다는 중국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국도 저래야 되는데 하고 맹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왜냐면 우리는 암암리에 외국나가면 한국 사람들이 사기치는 걸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이 퍼져있지 않은가. 그래서 서로 도와주고 가게도 겹치지 않게 개업하도록 해서 과열경쟁도 막는다는 중국사람들 얘기가 부러웠다. 그런데 막상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면 끈끈하게 얽혀오는 한인회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춤...더랜드'에서 보여준 교민들의 삶은 조금 더 유쾌하고 부드럽게 풀어냈을 뿐, 내가 나가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를 주축으로 모여있는 사람들, 신자가 아니더래도 한인들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장소에서 정보나 도움을 얻고 낯선 땅에 자리잡아 살기 위해 찾아가게 되는 곳. 그리고 그 안에서 빠르게 도는 소문이나 돈에 관한 문제- 단순히 돈을 빌리고 투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누구의 씀씀이, 가난하고 부유해보이는 외견에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서는 일같은 건 어디서나 사람들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볼 수 있겠지만 외국의 좁은 한인사회라는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면 좀 더 숨막힐만한 것이다.
지우의 친구가 무시하듯 말한 "거기 거지나라 아님?(37)"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한 못사는 나라라는 선입견에,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좁은 한인사회. 거기에 고복희씨의 원더랜드 부지를 탐내는 사람들의 욕망이 더해지면 '춤더랜드'의 무대가 다소 환멸나게 보인다. 심지어 교회에서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는 서스펜스 적 사건이 더해지면서 복희씨는, 원더랜드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과 의문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 불유쾌한 내용을 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않고 깔끔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풀어가는 책의 중심에는 잘 설정된 인물들이 있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의 강점은 인물이다.
책 안에 나오는 인물들은 분명하다. 이래저래 뭉그스름하게 그려진 사람이 없이 다들 자신만의 분명한 선과 색이 있다. 그래서 이들이 책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재밌다. 각자 자기만의 생각과 욕심을 가진 인물들을 보며 책을 읽는게 아니라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결같은 인물, 변화하는 인물, 방황하는 인물, 막혀있는 인물, 반성하는 인물. 수많은 인물들 중에 우리의 고복희씨는 모난 돌처럼 튀어나와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꿈꾸는 어떤 이상적인 면을 가진 인물에 가깝다는 점도 좋았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할말은 하고, 치우치거나 쉽게 흔들리지 않을 중심을 분명히 갖고 있으면서,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복희씨는 보는 이의 속을 시원하게 만드는 통쾌함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고복희씨처럼 단단하고 곧게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렵단 말인가. 장영수같이 사는 척은 흉내낼 수 있지만 고복희처럼 사는 일은 흉내내기도 어렵다. 한결같고 부지런해야 하니까. 둘이 참 달라서 안 맞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담당하고 있던 것은 이 둘의 과거였다. 다 읽고 나니 영수씨가 왜 복희씨를 사랑했는지, 복희씨는 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수씨와 결혼하게 되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춤더랜드'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산다는 걸 복희씨가 내지르는 한방이, 감정적이고 줏대없던 박지우의 변화가, 린이, 안대용이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는건 따뜻한 경험이 되었다.
친구처럼 캄보디아로 여행을 떠난다면- 여행지에 가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편이 아니라, 원더랜드에 묵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원더랜드가 청결하도록 관리에 힘쓰는 복희씨가 있어서 믿음직하고 조용한, 무엇보다 '저렴한' 숙소가 될 것이다. 물론 조식이 맛없다는 건 큰 문제이지만.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를 읽으며 즐거웠다. 젊은 작가다운 재기와 기대 이상의 따뜻함을 보여주었다. "원더랜드는 여전하다.(259)"고 독자가 꿈꾸게 만들만큼. 앳된 얼굴로 다부진 소설을 내놓은 작가 문은강이 보여줄 다음 무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