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



읽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카프카 변신이 아르헨티나의 유명 아티스트 루이스 스카파티의 삽화와 만났다. 오직 검은색으로만 표현된 <변신> 속 일러스트는 강렬하면서 고독했고 슬펐다. 사람의 말을 하고 싶지만 애처롭게 버둥거리는 다리를 가진 벌레라는 걸 온몸으로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카프카의 저작들은 비평가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릴 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고 싶은 독자로선 실존주의니 인간 존재의 무근저성이니 하는 평가가 오히려 읽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같다.

 

 

 

「작가란 무엇인가」 밀란 쿤데라 인터뷰 중엔 이런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카프카를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카프카의 탁월한 상상력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알레고리를 찾으려 들기에 결국 상투적인 해답만 들고 옵니다. 예를 들어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둥(아니면 부조리하지 않다는 둥), 아니면 신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둥(아니면 우리와 닿을 수 있는 존재라는 둥) 그런 것들이지요. 상상력이 그 자체로 가치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 특히 현대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카프카의 소설은 꿈과 현실의 결합입니다. 즉 꿈도 현실도 아니지요. 카프카는 무엇보다도 미학적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미학적인 기적이지요. ˝

 

 

 

이언 매큐언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카프카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가장 흥미로운 소설은 역사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말한다.

 

˝첫 줄에 놀란 저는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습니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어요. (...) 이 이야기의 첫 줄을 읽으며 이런 것을 쓰도록 허락받은 작가가 있다는 것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걸 알았더라면 저는 이미 오래전에 글쓰기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



마르케스는 비평가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작가란 이래야 한다는 이론을 갖고 있지요. 그들은 작가를 그들의 틀에 맞추려 들고, 만일 작가가 그 틀에 맞지 않으면 그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요. (...) 그들은 스스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중재자라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저는 항상 매우 분명하고 정밀한 작가가 되려고 노력했고, 비평가를 거치지 않고 독자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도록 애를 썼습니다. ˝



열다섯 살 때 카프가의 「성」을 읽었고, 아주 위대한 책이라고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생각은 이렇다.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활짝 열어두고 싶거든요. 저는 비평보다는 번역을 좋아한답니다. 번역할 때는 판단을 내리도록 요청받지 않으니까요. 그저 한 줄 한 줄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 제 몸과 마음을 통과해가도록 할 뿐입니다. ˝



폴 오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이야말로 두 낯선 사람이 절대적인 친밀함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독자와 작가가 소설을 함께 만드는 겁니다. 어떤 예술도 소설처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예술도 소설만큼 인간 삶의 근본적인 내면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



「변신」의 책날개에 있는 설명이나 옮긴이의 말을 꼼꼼히 읽어 보는 것도 좋겠지만 단어와 표현의 무게에 짓눌리기 전에 변신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변신」은 이런 느낌이었다. 마치 가수면 상태의 꿈처럼, 나의 몸은 꿈속에 있지만 현실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의 감정을 가진 나는 꿈속의 다른 인물들과 소통할 수 없었기에 더없이 무기력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차원으로 소외된 듯 고립감을 느꼈다. 외롭고 슬펐고 두려웠지만 소리 낼 수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기도, 아니기도 했는데 깨어나도 같은 현실일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둥대는 것을 멈추고 딱딱한 등껍질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나는 벌레로 취급되었고, 결국 벌레가 됐고, 벌레로서 소멸했다..



「변신」을 다 읽고 나니 슬픈 꿈을 꾼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속의 기억이 흩어져 버리듯 책을 읽었다는 기억도 점점 옅어졌다. 카프카의 글은 꿈의 언어로 읽히는 것 같다. 읽는 동안엔 모든 것들이 선명하지만 읽고 나면 추상적인 느낌만 남으니 말이다. 장면 장면의 인상들이 마치 꿈의 기억처럼 기시감을 남기는 것 같다.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가 언젠가 나의 경험이나 기억처럼 연상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일어난 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알고 있거나 알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재현이 아니라 창작을 통해 살아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진실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요. 당신은 그것을 살아 있게 할 수 있고, 만일 당신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면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이고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



우리는 현실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를 경험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는 지금도 누군가를 잠에서 깨우기 위해 여전히 변신 중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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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29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의 단편소설들을 모은 책을 권합니다. 민음사판 <변신>은 선집이라서 추천하고 싶지 않고, 솔출판사에서 나온 카프카 전집이 짱입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사실 카프카의 단편이라고 하면 ‘변신’이 먼저 떠오르잖아요. 그런데 ‘변신’만큼 재미있고, 인상 깊은 단편이 더 있습니다. 저는 카프카의 단편소설 때문에 카프카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07-29 19:28   좋아요 0 | URL
지금 찾아 보고 왔습니다^^ 카프카 단편이 꽤 인상적인 것 같은데 재밌다니 기대되네요 ㅎ

지금행복하자 2015-07-29 19:42   좋아요 0 | URL
번역도 괜찮아요? 카프카 전집이 있다는 건 첨 알았어요~
까뮈. 카잔차키스. 카프카까지.. 전집 어떻하죠? ㅎ

cyrus 2015-07-29 20:40   좋아요 0 | URL
지금 행복하자님 // 카프카 전집에 카프카가 여동생,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도 포함되었어요. 돈만 좀 많이 있다면 절판되기 전에 카프카 전집을 장만하고 싶어요. 서평을 몇 편 봤는데 번역에 대한 불만 내용은 못 봤습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7-29 21:01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바로 검색 들어가서 찜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7-29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시리즈가 전부 흑백일러스트인가봐요~ 몇권 있는데.. 최근들어 하나씩 읽고 있어요.
변신도 조만간 다시 읽어보려고요~~^^

물고기자리 2015-07-29 20:56   좋아요 0 | URL
일러스트 시리즈는 지금까지 총 9권인 것 같은데 확실히 느낌이 색다른 것 같아요 ㅎ <소송>은 문학동네 번역이 더 좋다는 것도 같고, 검색해보니 솔출판사 <카프카 단편 전집>은 카프카가 출판하지 않았던 단편들과 유고집에 수록된 특색 있는 단편들도 많은 것 같아서 기대되더라고요~
 

˝정말로 좋은 추리소설은 설사 누군가 마지막 장을 찢어 버렸더라도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 (1947년 12월 16일)

 

 

 

필립 말로 시리즈로 유명한 하드보일드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독특한 문체와 특유의 직유로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를 자신의 영웅이라 말했고, 스티븐 킹챈들러를 읽으며 문체를 공부했다고 한다. 폴 오스터, 마이클 코넬리, 하라 료 등의 수많은 작가뿐만 아니라 마틴 스콜세지, 코언 형제 등 유명 감독들 역시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 책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쓴 편지를 발췌해서 편집한 서간집이다. 챈들러는 자신의 이력에 대해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력 따위를 원하는 걸까요? 그게 왜 중요해요? 그리고 왜 작가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논해야만 합니까? 그저 지루할 뿐인 것을. 나는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너무 오래 전이라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싶은 언젠가 태어났습니다. ˝ (1950년 11월 10일)

 

 

 

1888년 7월 23일 생인 챈들러는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가 1939년 51세의 나이에 첫 장편 소설인 「빅 슬립」을 출간했다.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도 큰 성공을 거둔 챈들러는 1945년 무렵 《챈들러리즘》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소설가로서 큰 인기를 누렸다. 생전에 그토록 명성을 누렸지만 장례식엔 고작 십여 명만 참석했을 정도로 평생 주거지 없이 떠돌며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챈들러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심플 아트 오브 머더 중의 바로 이 문구이다.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로 한 남자는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두려움도 없는 채로. ˝

 

 

 

챈들러에게 스타일이란 -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섬세함을 얻는 것, 그것이 관건이죠. ˝ (1939년 2월 19일)

 

 

 

˝좋은 이야기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추출해야 하지요. 아무리 말을 아껴도 장기적으로 보자면 글쓰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스타일이고, 스타일은 작가가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 ˝ (1947년 3월 8일)

 

 

 

챈들러가 생각하는 스타일이란 개성을 반영한 것이고, 개성을 반영하려면 먼저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타일에 집착한다고 해서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 글의 특색이란 작가의 감정과 통찰의 본질에 따른 산물이라고 말이다.

 

 

 

˝내가 얻은 지혜란, 글쓰기 기술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빈약한 재능이나 재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시 뿐이라는 믿음과 다소 상통하니까요.˝ (1947년 3월 8일)

 

 

 

표절에 관하여 -

 

 

 

˝대개는 누군가의 결점만 훔칠 수 있을 뿐입니다. ˝ (1948년 9월 4일)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

 

 

 

˝스스로 터득할 수 없는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움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 

 

 

 

˝글을 쓰기 전에 아주 세세하게 플롯을 구상하는 작가들이 있지요. 하지만 나는 그런 작가가 아닙니다. 나에게 플롯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라나는 거지요. 플롯이 자라나길 거부하면 그 작품은 버리고 다시 시작합니다. ˝ (1951년 7월 2일)

 

 

 

스타일 모방되거나 심지어 표절되다 보면 -

 

 

 

˝마치 내가, 나를 모방하는 이들을 모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오거든요. 그러니 그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겁니다. ˝ (1952년 5월 14일)

 

 

 

글을 쓰는 법을 알려 달라는 이들에게 -

 

 

 

˝과거에 이룬 성과가 무엇이든, 작가는 지금 현재 하려고 하는 일 앞에서 다시 아이가 됩니다. 아무리 상투적인 기교를 많이 익혔다 한들, 작가에게 지금 도움이 되는 것은 열정과 겸손함뿐입니다. ˝ (1957년 3월 26일)

 

 

 

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에는 쓰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당장 알만한 작가들에 대한 독설이나 칭찬들도 등장한다. 애거서 크리스티, 제임스 케인, 대실 해밋, 헤밍웨이, 서머싯 몸, 오스틴 프리먼, 존 딕슨 카 등등 그들을 향한 신랄 또는 경탄의 생각들이 담겨 있다. 그의 편지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나 헤밍웨이도 독설을 피하지 못한다. 그중 챈들러가 생각하는 피츠제럴드의 매력은 이렇다.

 

 

 

"그는 문학사적으로 아주 드문 자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바로 '매력'입니다. ˝

 

 

 

˝잘 쓰거나 스타일이 깔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일종의 은은한 마법이에요. 절제되고 우아하며, 현악 4중주를 듣고서나 느낄 무엇 말입니다. ˝ (1950년 11월 13일)

 

 

 

시나리오를 쓴 경험 때문인지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많이 등장하는데 작가로서 할리우드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글 그 자체에 집착하는 건, 좋은 영화에는 치명적인 일입니다. 영화는 글을 위한 매체가 아니에요. ˝ 

 

 

 

˝내가 쓴 영화 속 최고의 장면들은 실질적으로 단음절로 구성된 장면들이었습니다. 내 생각에 내가 쓴 가장 짧은 최고의 장면은, 한 여자가 매번 다른 억양으로 ˝으음˝ 하고 세 번 내뱉는 장면이었어요. ˝ (1951년 11월 7일)

 

 

 

챈들러의 캐릭터 필립 말로에 대한 이야기 -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타락한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입니다.˝ (1949년 10월)

 

 


˝필립 말로와 나는 상류층 사람들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돈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 (1945년 1월 7일)
 

 

 

 

그리고 그의 소설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필립 말로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다. 독자의 편지에 대한 답변의 글인데 말로가 태어난 곳이나 학력, 경력, 취향, 사는 집, 사무실 전경, 소지하고 있는 총의 종류 등등 상세한 설명을 해주는 답장의 말미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정도가 지금 당신한테 말해 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만, 또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다시 편지해요. 문제는, 당신이 나보다 필립 말로에 대해 정말로 더 많이 아는 듯하다는 겁니다. 당신이 나한테 묻기보다는 내가 당신한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 (1951년 4월 19일)

 

 

 

이렇게 독자 한 개인에게 상세한 답장을 해주는 작가가 또 있다면 나도 당장 편지를 보내고 싶어진다. 챈들러의 소설은 「기나긴 이별」밖엔 읽지 않아서 필립 말로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하드보일드 문체임에도 서정적인 문장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꼈었다. 알고 보니 「기나긴 이별」을 쓸 당시 그의 아내는 폐 섬유종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훗날 편지에서 챈들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내가 조금씩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봤고, 그 사실을 안다는 고뇌 속에서 내 최고의 책을 써야 했으며, 그럼에도 써 냈습니다. ˝ 

 

 

 

˝나는 서재에 들어가 눈을 감고는 생각을 모아 스스로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지요. 그러는 데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 (1957년 2월 11일)

 

 

 

「기나긴 이별」은 챈들러의 최고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열여덟 살 연상이었던 그의 아내는 이 책이 출간된 후 사망했다. 유일한 친구이자 든든한 지원자이기도 했던 아내와의 사별 후 그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술을 끊지 못했으며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단다.

 

 

 

˝작가들이란 모두 자기 중심적이기 마련입니다. 마음과 영혼을 소진하며 글을 쓰다 보면 결국 자기 안으로 파고들게 되니까. 최근에는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칭찬을 너무 많이 듣는 데다, 너무 외로운 삶을 살고 있고, 이제 다른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 (1957년 5월 16일) 

 

 

 

글을 쓰기 위해선 주변의 말들에 귀를 열어 놓을 필요도, 일정 부분 닫아 놓을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작가들 중엔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이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쓰기 위해 외로움을 선택하고, 외롭기에 또 쓰며 말이다.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읽어 본 느낌으론 챈들러는 외로움에 취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외로움을 추구했던 게 아닐까도 싶지만 희망이 부재한 상태의 외로움은 오직 외로움일 뿐인 것도 같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영향을 주었던 작가들의 이야기는 늘 흥미롭다. 하지만 인간적으론 연민하게 되는 부분들도 있다. 애초에 읽고, 쓰고자 하는 사람들 중엔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도 같으니 말이다. 어떤 목적 때문이 아닌, 결핍을 메우기 위해 읽는 사람들이나 자신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야 하는 사람들 역시 자발적인 외로움을 선택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먼드 챈들러는 그의 말들을 이루었다. 그의 책은 마지막 장이 찢겼다 하더라도 읽었을 테니 말이다.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큰 몫을 했던 그에게 영감을 받는 이들 역시 여전하다. 챈들러 스타일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으로 그의 고독했던 고민들이 보상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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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7-26 2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플롯은 대개 자라난다, 공감해요. 첫 문장이 이끌어가지요. 표절에 대한 인용문도 적절합니다

물고기자리 2015-07-27 00:04   좋아요 0 | URL
읽다 보니 공감 가는 내용이 많더라고요. 저도 철저히 계획하는 글보단 챈들러와 같은 성향의 작가들 글이 잘 읽히는 것 같아요 ㅎ

AgalmA 2015-07-27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챈들러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다 팔아버렸는데-하루키가 왜 좋아한거야! 나한테 사기를...툴툴대며-다시 한 번 도전해 봐야 겠어요~_~; 저는 물고기자리님이 보내주는 댓글이 그렇게 좋더라고요ㅎ;;
챈들러가 사망해서 보내지 못한 편지 같은 이런 글을 우리에게 보내줘서 고맙습니다 📝

물고기자리 2015-07-27 01:03   좋아요 1 | URL
전 하루키가 추천해주는 작가들이 좋더라고요 ^^ 다 이유가 있더라니까요 ㅎ 전 아갈마님께 댓글을 달 땐 (알아서 이해해 주실 거라 믿어서) 긴장이 덜 돼요 ㅎ 그래서 쓸데없는 수다가 길어지는 걸 텐데 좋다고 해주시니 고맙네요~

2015-07-27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7-27 20:5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챈들러는 대실 해밋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챈들러의 책은 이 책과 <기나긴 이별>을 읽은 게 다예요. 하루키가 그 책을 무려 열두 번 이상 읽었다길래 도대체 어떤 책일까 싶어 읽었더랬죠 ㅎ 확실히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책인 것 같았어요.

장르소설의 서사에만 관심을 가지는 성향이라면 감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제 느낌으론 마치 문장 하나하나의 무게를 저울로 달아보고 쓴 것 같더라고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말이죠. 건조한 듯 서정적이라고 할까요 ^^ 다음엔 <안녕 내 사랑>을 읽어볼까 싶은데 먼저 주문한 체호프 책이 도착해서 그걸 먼저 읽으려고요 ㅎ
 

 

 

삶의 순간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서 가감 없이 정수만을 골라 우아하게 표현하는 서정적인 문장을 읽고 있는 동안 이 책을 읽는 순간이 영원히 지속됐으면 싶었다. 안톤 체호프는 아름다움과 추함, 차오름과 허무함, 사랑과 증오, 기쁨과 고통, 이 모든 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단편의 미학으로 보여준다. 읽다 보니 가슴이 뛰었다. 행복이 아닌 허무함으로 가슴이 뛰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허탈감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극한 슬픔과 아름다움은 서로를 동반한다. 그래서 씁쓸하지만 아름다웠다. 이런 감정을 경험하고 나면 삶이 무용하게 느껴져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가슴속은 애틋하게 피어오른 안개로 포근히 감싸인 듯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체호프는 안개에 대한 묘사를 자주 하는데 우울, 공포, 사랑, 무력감 등 인물들의 감정에 따라 다른 느낌의 안개가 그들에게 밀려온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 역시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를 직관적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수록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모함, 가벼움, 나약함을 연민하게 된다.



체호프의 글에서 사색하게 되는 허무함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막다른 느낌이 아니라 발 앞을 조심하라는 포근한 속삭임 같았다. 좀 더 생각해보라고, 고민해보라고, 화내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그저 그런 순간들에 대해 정직하게 묘사함으로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때문에 살아 있고, 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근거렸다.



알 수 없음을 거듭 깨닫게 되는, 안개 속을 부유하는 듯한 삶일지라도 모든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의 허무함이란 완벽한 공백은 아니다. 나를 감싸는 안개의 밀도가 짙어질수록 나 자신의 의식에 집중하게 되고, 꽉 채운 후 스스로 비우게 되는 허무함은 슬프지만 아름답기 때문이다.



안개 저 너머에서 새롭게 다가올 나의 의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려면 허무함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체호프의 허무는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맞서게 해주는 위로였다. 체호프의 글은 삶의 정수였고, 그의 단편소설은 위대했다. 체호프를 왜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하는지 그의 글이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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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23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레이먼드 카버, 오 헨리의 단편소설은 읽고 나면 여운이 남고, 잊혀질 때만 되면 또 읽고 싶어지는 최고의 글이에요.

물고기자리 2015-07-23 21:51   좋아요 0 | URL
정말 최고예요^^ 지금 체호프 검색 중이에요. 더 읽고 싶고, 다시 읽고 싶어요 ㅎ

에이바 2015-07-23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글에서 느껴지는 감성이 좋아요.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도 괜찮나 봅니다^^

물고기자리 2015-07-23 22:1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는 민음사 괜찮았어요. 전반적으로도 좋지만 몇몇 표현은 반복해서 읽어 볼 정도로 좋았어요 ㅎ

AgalmA 2015-07-23 2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홉 연극을 몇 편 보면서, 이 사람은 정말 철학자이자 시인이구나 느꼈죠...와, 벚꽃동산 참...

물고기자리 2015-07-23 23:29   좋아요 1 | URL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랑 사할린 섬을 주문했는데 희곡 선집도 주문할 걸 그랬나 봐요^^ 체호프 정말 대단한 분인 것 같아요 ㅎ 하루키가 추천해주는 작가는 실패가 없더라고요^^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



1591년 이스탄불 외곽의 버려진 우물 속 시체의 혼잣말로 시작되는 「내 이름은 빨강」은 이처럼 간결하지만 확실하게 집중시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궁정 화원 소속 화공들이 그리는 세밀화와 관련된 살인 사건을 풀어간다. 하지만 그림뿐만 아니라 삶, 예술, 사랑, 역사 또는 현실 등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서 글로 쓰는 세밀화를 보는 듯했다.



노벨 문학상뿐만 아니라 유럽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한때 화가가 되길 꿈꾸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화공들이나 그림에 대한 관찰력과 묘사가 탁월하다. 실제로 이 책을 읽는 동안 테두리에 금박 장식을 한 화려한 색감의 세밀화들을 여러 번 검색해서 찾아봤다. 책의 상당 부분이 그림에 관한 묘사여서 저절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는데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었을 다양한 국적의 많은 사람들이 터키의 세밀화에 대한 구체적 인상과 호기심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에서 '나'라고 칭하는 화자는 장마다 번갈아 바뀌어간다. 첫 문장처럼 이미 죽은 시체이거나, 살인자이기도 하며 살인자를 찾는 누구이거나 사랑과 행복을 찾으려는 누구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림 속 개나 말 또는 '빨강'이라는 색깔이 스스로 화자가 되어 독자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소설의 장들은 마치 세밀화의 한 부분인 듯싶었고,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는 하나의 정묘한 그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사건의 추이만을 따르자면 추리 소설로 읽힐 수도 있지만 세밀화를 통해 철학 하게 하는, 사색적이며 지적인 소설이었다.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평면적인 그림인 세밀화는 그림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인간 중심의 그림, 자신만의 스타일과 서명을 가질 수 있는 그림에 대한 욕망과 전통을 지키려는 신념 사이에서 번민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살인자를 찾는 과정에서 세 명의 화공에게 말을 그려보라는 주문을 한다. 화풍으로 살인자를 색출하려는 것인데 세 사람이 제각각 말을 그리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의 정교함은 작가 스스로 화가가 되길 꿈꾸었던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올리브, 나비, 황새라는 애칭을 가진 세 화공들이 말을 그리는 장면의 마지막 문장들은 이렇다.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바로 그 말이 된다. ˝ - 올리브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렸던 위대한 옛 대가가 된다. ˝ - 나비



˝나는 멋진 말 그림을 그릴 때에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 - 황새



화공들이 각자 말을 그리는 과정을 읽을 때 누가 살인자였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살인자가 누구였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소설의 일부이자 세밀화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의미를 찾고자 욕망한다. 하물며 그림 속의 나무 한 그루도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아주 외로운 한 그루 나무입니다.
(...) 제가 외로운 진짜 이유는 제가 어떤 그림의 일부인지 저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솔직히 말하면 저는 세상에서 도망쳐 바다를 건너다가 새와 과일이 풍성한 섬에서 안식처를 찾은 연인의 행복한 풍경의 일부였으면 했습니다! 인도 정복 길에서 일사병으로 며칠 동안 코피를 흘리다 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최후의 순간에 그늘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 제가 어떤 이야기에 의미와 우아함을 더해 주었을까요? (...) 저는 그저 한 그루 나무이기보다는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서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도 있다. 이 소설 속의 '빨강' 같은 사람들 말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 나는 숨기지 않는다. (...)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 나를 보지 않은 사람은 나를 부인하겠지만 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으며 들었던 나의 주관적 감상은 세밀화에 대한 지적인 탐구에 앞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화공들의 번뇌에 앞서, 삶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그림이기보단 어떤 색깔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말이다. 화풍은 시대마다 변한다. 개개인의 화풍 역시 변화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림이기보단 색, 그 자체로 행복하고 싶어졌다.



˝우리는 사실 행복의 그림에 있는 미소가 아니라 삶 자체에서 행복을 찾아요. 세밀화가들은 그걸 알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리지 못한 것도 그거예요. 이 때문에 그들은 삶의 행복을 바라보는 행복으로 대체한 겁니다. ˝ - 《나는, 셰큐레》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르한 파묵은 글을 쓸 때 때때로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을 쓰는 동안 셰큐레가 되는 것이 즐거웠다고 했다. 한 폭의 세밀화와 같았던 이야기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지길 바라지 않고, 스스로 그림이 되길 바랐던 주인공은 셰큐레가 아니었을까 싶다.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이스탄불 최고의 미인이라는 셰큐레는 살인자를 추적하는 카라와 시동생 하산의 끈질긴 사랑을 받는다.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지만 책의 이야기꾼들 중에서 가장 선명한 색깔의 음성을 지녔던 주인공 역시 셰큐레였다.



소설을 읽듯 작가를 읽고 싶어 하는 나의 관점에서 본 오르한 파묵은 다분히 시각적 성향의 사고력을 지닌 사람인 듯싶었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있는 그의 친필 원고를 보면 빼곡한 글 옆과 사이사이에 그의 스케치가 곁들여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시각화하고 구체화시킨 내용을 세밀히 전개시키는 그의 서술 방식은 그림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전체를 보든, 어느 부분을 집중해서 보든 '본'는 행위에 집중해야만 읽히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스스로 보기를 원할 때 볼 수 있는 그림처럼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스스로의 톤과 음성을 지닌 개별적인 인물들이 그들만의 질감을 지닌 채 살아 움직여서 읽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글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때가 있다. 일종의 리듬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라 객관적인 무엇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 작가들은 평소 관찰하는 것 못지않게 듣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작가들은 이야기의 흐름과 결말에 대해 자신도 알지 못 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이야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게 아닐까 싶은데 이런 작가들의 글은 비교적 강한 심상을 남긴다는 것과 섬세하다는 느낌을 준다.



오르한 파묵의 인터뷰를 보면 역시나 시각적 성향의 소유자답게 처음부터 책 전체의 윤곽을 잡아 놓고,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놓는다고 말한다. 세밀하다는 것과 섬세하다는 차이 역시 다분히 주관적이지만 글이 스스로 이야기하게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글은 세밀하지만 섬세하진 않았다. 이런 점이 오르한 파묵의 글을 읽게 만드는 개성이기도 한 것 같지만 말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읽는 것 자체는 수월했지만 감상을 남기는 건 쉽지가 않았다. 생각들이 저절로 연결 되질 않고 조각조각 끊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르한 파묵의 글은 계속 읽고 싶어진다. 파묵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읽고 싶고, 자전적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파묵의 「이스탄불」˝어느 날 나는 책 한 권을 읽었고, 내 인생 전체가 바뀌었다. ˝로 시작한다는  「새로운 인생」에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터키가 두 가지 정신을 갖는 것, 두 가지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하는 것, 그리고 두 가지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신분열은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어줍니다. (...) 당신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죽이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을 많이 하면 하나의 영혼만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분열되어서 아픈 것보다 더 문제이지요. 터키의 정치가들, 즉 나라가 하나의 일관된 영혼을 가져야 하고 동양이나 서양 어느 한쪽에 속하거나 민족주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들에게 제 생각을 알리고 싶답니다. 저는 일원론적인 관점에서는 비판적이지요.˝ - 「작가란 무엇인가」

 

 

 

터키의 동양적인 충동과 서양적인 충동 사이의 끝없는 대립이 평화롭게 해결되리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이니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상상력이 작동하게 하려면 외로움과 고통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했다는 자기 파괴적인 그의 방식은 슬프지만 스스로 위로받기를 거부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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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낯선 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 병적일 만큼 좋아했다. (...) 그들은 마치 말라버린 우물에 돌멩이라도 던져 넣듯이 나에게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마친 후에는 한결같이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두 번째 소설인 1973년의 핀볼의 첫 문장인데 마치 나의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도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그와 나는 기질적으로 닮았다는 기분이 든다. 담고 있는 내용은 달라도 색인 구역이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1Q84」를 시작으로 꽤 많이 읽어왔는데 특히 일본의 군조 신인상을 수상한 그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몇 년 전 처음 읽은 뒤로 지금까지 세 번을 읽었다. 소설로는 불충분하다는 평가들도 있지만 나는 어쩐지 하루키의 불완전한 첫 소설이 좋았다. 스토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내 성향 탓도 있겠지만 완전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넘치는 것보단 다소 부족한 걸 나는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1973년의 핀볼」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좀 더 구체화시켜 진행시킨다. '핀볼'이 그렇고 '나'와 '쥐'도 그렇다. 그리고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나오코'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초기의 두 소설 모두 부엌 테이블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20대에 재즈 카페를 운영했던 하루키는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고 밤중에 부엌 테이블에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특히 「1973년의 핀볼」은 쓸 때 힘들었다는 기억이 없었다는데 쓰고 싶어 견딜 수 없었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때와는 달리 술술 써나갔다고 한다. 그의 첫 소설과 마찬가지로 아직 습작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여기면서도 하루키는 「1973년의 핀볼에 적잖은 애착을 갖고 있단다. 소설 자체의 힘이 딱딱한 껍질을 깨고 그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읽은 후 나의 감상 역시 같았다.



˝여기에는 테제(결과적인 테제)가 풀이되어 있다. 그것은 이미 테제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테제가 희박해짐에 따라, 자발적인 스토리가 내 머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소설이 자립하여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나름의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어서 나중에 전집을 묶었을 때 그의 단편들은 다소나마 손질을 가했지만 이 두 작품에 한해서는 전혀 손질을 하지 않았단다. ˝이것이 당시의 나였고, 결국은 시간이 흘러도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라는 이유로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완벽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지만 나는 자신만의 특별한 색을 갖춘 사람들이 더 좋다. 사람이란 이미 충분히 다양하기에 한 사람 스스로 지극히 다양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보단 자신의 색 안에서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걸 더 선호하는데 이런 삶에는 나름의 철학과 용기가 필요하다.



하루키의 소설을 되짚어 나가며 느끼는 감상은 점진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구체화시키고 있음에도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무얼 말하고 싶은 지는 사실 인생의 초반부에 대부분 정해진다. 이후로의 경험은 그 폭을 넓혀 줄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하루키뿐만 아니라 모두의 슬픔이자 피할 수 없는 근원이다. 멀리 간 듯싶다가도 어느새 다시 출발점인 것 같은 게 인생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출발점은 처음의 그것과는 다른 지점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우물을 발견하고 구석구석 탐색하다 보면 빠져나오는 길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에 들어서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빛줄기를 찾을 수 있는 내면을 키우게 된다. 살아가면서 극적인 변화를 겪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같은 우물에 다시 빠지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렬함을 만나지 못 했다면 적어도 한 발, 한 발 내딛게 해주는 자신만의 빛줄기를 찾아 끊임없이 반복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하루키는 그것을 해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평범을 넘어선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를 쓰고 또 쓰는 하루키를 만났고, 그에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나만 끊임없이 우물에 빠지는 건 아니었구나 하는 걸 말이다. 그의 에세이 「슬픈 외국어」에서 하루키는 이런 고백을 한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실을 조금이라도 배운 것은 필사적으로 빚을 갚기 위해 하루하루를 육체노동으로 보낸 20대의 나날이었다고. 그에게 있어서 노동은 가장 좋은 교사였고, '진짜 대학' 이었다고 말이다. 그는 재즈 카페를 운영했었는데 모든 사람이 다 그의 가게를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단다.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소수파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열 명의 손님 가운데 한두 사람만이 가게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 한두 명이 당신이 하는 일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가게에 와야겠다고 생각해 준다면, 가게는 그런대로 유지되어 나가게 마련이다. 열 명 중에 여덟이나 아홉 명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열 명 중 한두 사람만이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런 것을 가게를 운영하면서 피부로 절실히 느꼈다. 정말이지 뼈를 깎듯이 그것을 배웠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이 내가 쓴 글을 형편없고 시시하다고 깎아내려도, 열 명 중 한두 사람에게 내가 전하고자 했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된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굳게, 일종의 생활 감각으로서 믿을 수가 있다. 나에게 그런 경험은 다시없는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소설가로서 살아가기가 훨씬 힘들었을 테고, 이런저런 면에서 내 본래의 페이스가 깨졌을지도 모른다. ˝ 「슬픈 외국어」

 

 

 

실제로 그는 매일 뛰거나 수영을 하며 자신의 페이스를 이어가는 듯하다.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가 말하는 열 명 중 한두 사람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가 자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이나 심오한 철학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들, 그걸 지키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한다. 자신의 색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 용기를 좋아한다. 지금도 또 다른 열 명 중 한두 명은 하루키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자신의 농도에 맞는 부분과 공명하며 필요한 위로를 얻고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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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07-13 2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한두명에 속합니다^^
오늘 이윽고 슬픈 외국어를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물고기자리 2015-07-13 23:42   좋아요 1 | URL
반갑네요^^ 개정판이 나오면서 <슬픈 외국어>에서 <이윽고 슬픈 외국어>로 제목이 바뀐 걸로 아는데 하루키의 뜻으론 <이윽고 슬픈 외국어>가 맞는 것 같고 저도 그게 더 맘에 들어요. 리뷰 쓰느라 모처럼 펼친 김에 다시 읽고 있는데 좋더라고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