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순간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서 가감 없이 정수만을 골라 우아하게 표현하는 서정적인 문장을 읽고 있는 동안 이 책을 읽는 순간이 영원히 지속됐으면 싶었다. 안톤 체호프는 아름다움과 추함, 차오름과 허무함, 사랑과 증오, 기쁨과 고통, 이 모든 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단편의 미학으로 보여준다. 읽다 보니 가슴이 뛰었다. 행복이 아닌 허무함으로 가슴이 뛰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허탈감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극한 슬픔과 아름다움은 서로를 동반한다. 그래서 씁쓸하지만 아름다웠다. 이런 감정을 경험하고 나면 삶이 무용하게 느껴져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가슴속은 애틋하게 피어오른 안개로 포근히 감싸인 듯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체호프는 안개에 대한 묘사를 자주 하는데 우울, 공포, 사랑, 무력감 등 인물들의 감정에 따라 다른 느낌의 안개가 그들에게 밀려온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 역시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를 직관적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수록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모함, 가벼움, 나약함을 연민하게 된다.
체호프의 글에서 사색하게 되는 허무함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막다른 느낌이 아니라 발 앞을 조심하라는 포근한 속삭임 같았다. 좀 더 생각해보라고, 고민해보라고, 화내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그저 그런 순간들에 대해 정직하게 묘사함으로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때문에 살아 있고, 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근거렸다.
알 수 없음을 거듭 깨닫게 되는, 안개 속을 부유하는 듯한 삶일지라도 모든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의 허무함이란 완벽한 공백은 아니다. 나를 감싸는 안개의 밀도가 짙어질수록 나 자신의 의식에 집중하게 되고, 꽉 채운 후 스스로 비우게 되는 허무함은 슬프지만 아름답기 때문이다.
안개 저 너머에서 새롭게 다가올 나의 의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려면 허무함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체호프의 허무는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맞서게 해주는 위로였다. 체호프의 글은 삶의 정수였고, 그의 단편소설은 위대했다. 체호프를 왜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하는지 그의 글이 말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