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을 겪어 본 인류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해 갈 것만 같았다. 원자력의 시대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 다른 길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체르노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흙과 집은 주인을 잃은 채로 남아 있고, 들판은 다시 숲으로 변하고 있으며, 사람의 집에 동물이 살고 있다. 수백 개의 죽은 전깃줄과 수백 킬로미터의 도로가 의미 없이 연결되어 있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 - 「체르노빌의 목소리」 한국어판 서문, 2011년 3월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과거가 아닌 미래의 목소리였다. 읽는 동안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특히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분노와 슬픔과 공포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쉽게 잊힐까 그것이 더 두려워졌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쓰는데 거의 20년이 걸렸다는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일본의 원전 보호 체계도 규모 9.0의 강진 앞에서는 아기 옷에 불과했고, 배냇저고리처럼 약했다고..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다 보니 「문명, 그 길을 묻다」에 실린 제레미 리프킨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지난 10년간 유럽연합의 자문으로 활동해왔던 리프킨은 그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도 자세히 거론했었지만 재생에너지가 중심이 되는 시대로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이미 학문적인 단계에서 실용적인 단계로 넘어왔다고 하는데 전 유럽연합 의장, 독일의 메르켈 총리, 프랑스의 올랑드르 대통령 그리고 중국의 리커창 총리가 재생에너지 사용으로의 전환에 대한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를 3차 산업혁명이라 일컬으며 '에너지 민주화'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유럽의 변화는 물론이지만 중국 역시 전력 분산을 위해 에너지 인터넷을 구축하는데 4년 동안 82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인터뷰어인 안희경씨는 '깨끗한 에너지', '값싼 에너지', '안전한 에너지'로 홍보되는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견해를 묻는다. 그러자 순간 리프킨의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나는 듯했고 이미 결론이 다 난, 시대에 뒤떨어진 안건을 왜 다시 끌어내는지 답답해하는 눈치였단다. 리프킨은 핵 발전이 청정에너지라는 홍보는 황당한 말이라고 답한다. 이 주장에는 큰 문제점이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2,000개의 핵발전소가 있지만 모두 노화해져서 가동을 멈춰야 할 처지인데다가 2,000개의 핵 발전소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세계에서 필요한 에너지의 6퍼센트만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후 변화에 최소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퍼센트의 에너지를 생산해야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 영향력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핵발전소를 더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세계 필요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채우려면 노후된 핵발전소를 다 철거하고, 40년 동안 매달 3,000개의 새로운 핵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 리프킨은 이를 전혀 이득이 없는 사업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국제원자력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우라늄 매장량은 매우 부족해서 2030년이 되면 비용이 올라가 적자가 될 것이며, 테러리즘이 강도를 더해가는 시대에 세계 곳곳에 플루토늄이 퍼지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우 네바다주에 핵폐기물 지하창고를 세우는데 16년 동안 80억 달러를 썼지만 이후 단 한 번도 그 지하창고를 열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이미 그곳이 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핵폐기물을 완벽하게 저장하고 있는 처리장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  

 

 

 

70년 동안 핵폐기물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음에도 아직 방법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핵발전은 죽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물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 담수의 40퍼센트를 냉각수로 사용하는데, 기후 변화로 인해 물이 뜨거워져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과 프랑스는 이른 시일 내에 핵발전소의 문들 닫아야 한다. 해양에 핵발전소를 세울 수는 있지만 쓰나미와 태풍이 더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나게 된 원인 역시 핵연료봉이 마당 창고 안에 있었고, 쓰나미가 몰려오자 핵연료봉이 무너지게 되면서 원자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은 왜 비싼 핵발전을 사용하려는 거죠? 모든 사람이 다 생산할 수 있는 공짜 그린 전기가 있는데요. "

 

 

 

핵발전은 몇몇 회사에게만 이득이 돌아간다고 리프킨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사회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조합으로 소유할 수 있는 우리만의 에너지를 생산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 독일이 하는 것처럼, 모든 한국인이 자기 집 마당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이를 'Power to the People', 즉 '국민에게 권력을 쥐여줬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에너지 민주화를 통해 가능합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

 

 

 

이에 대해 이미 에너지를 선점하고 있는 기업들의 반발은 없는지 인터뷰어가 묻자 리프킨은 독일과 덴마크의 예를 들며 거대 전기회사들이 생산 분야에서 발을 빼고 있다고 답한다. 분산적인 에너지 생산은 수직적인 거대 기업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기업들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이동하고 있단다. 기존 기업들의 새로운 역할은 네트워크를 통합하도록 돕는 서비스 제공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조직하고 연결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해결사가 되는 것이다. 독일의 전력회사인 RWE AG, EnBW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전력회사이며 세계적인 기업인 EDF도 새로운 전환에 동참했다고 한다. 생산양식이 바뀌면 정치 시스템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정치 시스템은 변할 겁니다. 중앙집권화에서 분산화될 거예요. 중앙 정부는 코드, 규정, 표준, 정보를 상호 교환하여 처리하는 틀을 세우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지역의 활동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3차 산업혁명을 위한 그들만의 마스터플랜을 여건에 맞게 창조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지역 단위들은 와이파이처럼 연결될 것입니다. 수평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분권화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지금의 권력구조를 바꿀 겁니다. 이는 권력 안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동입니다. "

 

 

 

제레미 리프킨은 수평적 권력으로의 이동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정보를 생산할 수 있는, 수십억의 인구가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에너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고, 이는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문제는 그런 시대적 기류를 적절한 시기에 함께 타고 흘러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결단을 과연 적시에 내릴 수 있는지, 이것이 한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능력이며, 국민의 능력일 것이라고 말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는 동안 핵발전소에 문제가 생길 땐 해결할 답은 없다는 것 단 하나만 떠올랐다. 불행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외엔, 아픈 것 외엔, 절망하는 것 외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의 정부가 30년 전의 체르노빌보다 더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국민들을 무관심과 무기력으로 이끌어내고 급기야는 분노조차 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정부의 목표라면 모를까, 때론 슬퍼하는 것조차도 지친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이젠 개개인이 똑똑해져야 할 것 같다. 스마트 시대에 살면서 서로의 생활을 염탐하듯 기웃거리는 것으로, 분노를 배설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기술력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수직적 에너지 체계를 거부하는 것으로, 수평으로의 이동을 도모하는 것으로 변화를 꿈꾸어야 할 것 같다. 전 지구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신구 세력의 움직임, 그리고 오늘 우리의 문명이 맞닥뜨린 전환점을 과거의 두려움으로부터 배워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체르노빌 사람이 되어버린다. 돌연변이가 된 것이다! 모두 궁금해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런 생물체가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고 싶지만 이제 불가능하다.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내 딸의 이름은 카타였다. 카튜센카..... 일곱 살에 사망했다. " - 니콜라이 포미치 칼루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소. 그곳에서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쓰레기통에 던졌소. 막내아들이 졸라서 군모를 줬소. 아들은 절대로 벗지 않고 매일 쓰고 다녔소. 2년 후 아들은 뇌종양 진단을 받았소. 나머지는 알아서 쓰시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소..... " - 어느 군인

 

 

 

"우리 머릿속에서 군사적 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것 같은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나 1초 만에 재로 변한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평화적 핵은 안전한 전구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아이처럼 보았다. " - 게나디 그루세보이 (벨라루스 의원, 체르노빌의 아이들에게 재단 대표)

 

 

 

"저는 비가 무섭습니다. 바로 그게 체르노빌입니다. 눈이 무섭습니다. 숲도, 구름도, 바람도 무섭습니다. 체르노빌, 그는 내 집에 있습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 1986년 봄에 태어난 내 아들 속에 있습니다. 아들은 아픕니다. 얼마 전 신문에 1993년 한 해 동안 벨라루스에서 여성들이 임신중절을 20만 번 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주요 원인은 체르노빌입니다. " - 알렉산드르 레발스키 (역사학자)

 

 

 

"두려움과 억울함. 그 두 가지 강력한 감정을 아직도 기억해요. 모든 것이 일어났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었어요. 정부는 침묵했고, 의사들도 아무 말이 없었어요. 우리 지구는 주 정부의 지시를 기다렸고, 주 정부는 민스크를, 민스크는 모스크바의 연락을 기다렸어요. 아주 긴 사슬이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는 무방비 상태였어요. 어딘가 멀리에서, 고르바초프와 또 몇 명이, 두세 명이 우리 운명을 결정짓던 거예요. 모두를 대신해 판단했어요. 수백만 명의 운명을..... 그리고 동시에, 얼마 안 되는 몇 명의 사람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미치광이도, 머릿속에 테러 계획이 든 범죄자도 아닌 원자력 발전소의 평범한 당직 직원 말이에요.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어요. 체르노빌이 콜리마와 아우슈비츠,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넘어선다는 걸 알게 됐어요. " - 류드밀라 드미트리예브나 폴랸스카야 (시골 교사)

 

 

 

"방송국에서 촬영을 나오면 KGB가 필름을 가져갔다. 그리고 빛을 쏘여 못 쓰게 된 필름을 돌려줬다. 얼마나 많은 문서가, 증거가 파기됐는지, 과학을 위해서도, 역사를 위해서도 쓰지 못하고 잃어버렸다. " - 이리나 키셀레바 (기자)

 

 

 

"핵보다 상부의 진노를 더 두려워했다. 모두 전화와 명령을 기다렸지만 직접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개인이 지는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역사를 믿는다. 역사의 심판을 믿는다. 체르노빌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했다. " - 바실리 보리소비치 네스테렌코 (전 벨라루스 과학 아카데미 핵에너지 연구소 소장)

 

 

 

""우리가 죽으면 학문이 될 거야. " 안드레이가 말했어요. "우리가 죽으면 다 우리를 잊을 거야. " 카탸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죽으면 무덤에 묻지 마. 나는 무덤이 싫어. 거기에는 죽은 사람들이랑 까마귀밖에 없잖아. 나는 들판에 묻어줘. " 옥사나가 부탁했어요. "우리는 죽을 거야..... " 율라가 울었어요. 이제 하늘을 보면 하늘이 살아 있어요. 내 친구들이 거기 있으니까요. " - 어느 어린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 - 노발리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왜 읽고 싶은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책장에 읽지 않은 파묵의 책이 꽂혀 있으면 나의 시선이 자꾸 그곳을 향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다른 책들이 비교적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다면 파묵의 책들은 읽힐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터키 이스탄불 태생이며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한 그의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을 통해 처음 접했었는데 그땐 그저 인상적이란 느낌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작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으로 선택한 책은 자전적 회고록인 「이스탄불」이었고, 지적이며 집요한 작가로서의 정신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다음으로 읽은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집인 「아버지의 여행가방」이었는데 책의 제목으로 인용되기도 했던 그의 수상 연설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나는 어느덧 이렇게 오르한 파묵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 (p9)

 

 

 

오르한 파묵「새로운 인생」 역시 이처럼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굉장한 흡인력을 지녔다. 이 감상이 보편적인 감상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파묵의 문장은 늘 뜨겁고 진지하다. 꾸밈에 치중하지 않는, 지적이며 진정성 있는 그의 표현들을 접하고 있으면 글자 하나하나와 일일이 눈을 맞추는 느낌으로 읽게 된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정독했는데 두 번째 읽을 땐 처음 보다 훨씬 좋았고 좀 더 강렬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읽더라도 책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며 큰 노력 없이 저절로 읽히는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지만 오르한 파묵은 명쾌한 감상이나 유희, 또는 일종의 도피로서의 독서가 아닌 매 순간 모든 문장에 집중하게끔 만든다. 파묵의 글엔 어떤 절실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심히 또는 가볍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마치 문장 속에 통증이 동반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든다.

 

 

 

"모든 단어, 모든 비유가 마음에 와 닿았던 이유는 문장이 비범하거나 단어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이 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3)

 

 

 

몰두하게 되는 책들에선 대개 이런 느낌을 받게 된다. 문장들이 몸으로 흡수되는 것 같달까, 서로 낯설지 않아 내가 책을 읽는 것인지, 책이 나를 읽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새로운 인생」의 내용이 나에게 완벽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터키의 역사와 현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정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파묵의 날카롭고 예민한 글은 어쩐지 나도 그 거리에 가 본 것 같은, 살아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을 만들어 준다. 마치 언젠가의 생에서 겪어본 적 있는 경험을 글로 다시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는 특수한 환경에서도 보편적인 정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작가로서의 능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로 말하면 기억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애쓰는 불행하고 바보 같은 주인공이다. " (p362)

 

 

 

이 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저 우연히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일들이 완벽히 짜인 구조 안에서 움직여 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다양한 해석으로 읽는 것이 가능한 열린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더없이 매력적이다. 터키의 역사와 현실로도, 개개인의 정신으로도, 두 영혼으로 분리된 작가 오르한 파묵 자신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결말에 대한 생각과 등장인물들의 의미 역시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다 읽은 후에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눈으로 읽었지만 어쩐지 손에 열기가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모든 구석구석을 충분히 주의하면서 지능적으로 보았는가?" (p373)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난해함을 지닌 파묵의 소설은 꼼꼼히 읽어나가야 한다. 글이 알아서 나를 채워주길 기다리고 있다간 그가 소설을 위해 설계한 내용들의 기초를 놓치고 지나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파묵은 독자들이 자신의 글에 완벽히 집중하길 바라고, 또 그렇게 쓰는 작가인 것 같다. 그냥 이유 없이 여백을 메우기 위해 쓰인 문장도, 독자를 위한 친절하고 섬세한 묘사 같은 것도 없다. 오직 한 사람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세밀하게 스케치하듯 채워진 문장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통증과도 비슷한 만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완벽히 닫힌 생각으로의 만족이 아닌 모든 가능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정신으로서의 만족을 말이다.

 

 

 

"때로, 계속해서 여러 권을 읽으면 그 책들끼리 속삭이는 게 들렸고, 이렇게 해서 내 머릿속이, 모든 구석에서 각각의 다른 악기가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머릿속의 이 음악 때문에 내가 인생을 견디며 산다고 인식했다. " (p323)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오르한 파묵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장들 때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는 파묵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에겐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떨어져 나오게 만드는 자기 파괴적인 면이 있는데 상상력을 작동시키기 위해선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묵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절실함은 이런 고통과, 고통에 뒤따르는 희열의 잔상인 것 같았다. 파묵의 매력은 담담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맨 얼굴의 정신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실려있는 파묵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의 일부를 다시 옮겨보고 싶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 글을 읽노라면 모든 작가와 독자들이 더더욱 행복해지길 바라게 되니 말이다..

 

 

 

˝저는 쓰고 싶어서 씁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제가 쓴 것 같은 책들을 읽고 싶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많이 화가 나기 때문에 씁니다. 방에서 하루 종일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오로지 현실을 바꾸었을 때에만 그것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에 씁니다. 저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이 이스탄불에서, 터키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지를 전 세계가 알았으면 해서 씁니다. 종이, 연필 그리고 잉크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을, 소설을 무엇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에 씁니다. 저의 습관과 열정이기 때문에 씁니다.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씁니다. 문학이 제게 가져다준 명성과 관심이 좋기 때문에 씁니다. 홀로 있기 위해 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제가 왜 그토록 화가 많이 나 있는지를 어쩌면 이해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씁니다. 제 작품이 읽히는 것이 좋아서 씁니다. 한번 시작한 이 소설을, 이 글을, 이 페이지를 이제 끝마쳐야지 하는 생각에 씁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게서 이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씁니다.



도서관들이 영원할 것이며, 저의 책들이 그 서가에 꽂힐 것이라는 것을 순진하게 믿기 때문에 씁니다. 삶, 세계,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롭기 때문에 씁니다. 삶의 그 모든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씁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씁니다. 항상 갈 곳이 있는 것 같지만 마치 꿈속에서처럼 도저히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씁니다. 도무지 행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씁니다. 행복하기 위해 씁니다.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5-11-1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쳐 거쳐 내이름은 빨강이랑 새로운 인생 담았어요 :-)

물고기자리 2015-11-10 15:25   좋아요 1 | URL
닉이 바뀌셨나 봐요^^ 제게 파묵은 정말 인상적인 작가예요. 계속 읽게 될 것 같고, 파묵이 무척 좋아졌어요~

살리미 2015-11-10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설이 너무 멋지네요!! 저도 꼭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내 이름은 빨강>만 읽었는데, 물고기자리님 글을 읽고나니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싶어지네요.

물고기자리 2015-11-10 16:53   좋아요 0 | URL
저도 빨강으로 시작했다가 계속 읽게 되었어요^^ 쉽고 편안한 글은 아니지만 자꾸 읽고 싶게끔 만드는 흡인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 연설은 읽을 때마다 뭉클해져요. 꾸밈없이 파고드는 글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AgalmA 2015-11-14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새로운 인생>으로 오르한 파묵을 읽었는데요. 한 작가를 만나는 첫 책으로 너무도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제 얘기 같았거든요. 영화처럼 장면들이 눈에 선했죠. 파묵의 다른 책을 봐도 그 이미지들이 참 선명하다 했는데, 역시나 오르한 파묵이 그림을 그렸던 영향이!
위의 댓글은 지워주세요. 갑자기 강제탈퇴가;;

물고기자리 2015-11-15 09:14   좋아요 0 | URL
저도 책 속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눈에 선하더라고요. 거리의 냄새나 공기의 무게감까지 느껴지는 기분이었어요.. 저는 파묵의 절실함이 참 좋아요. 글에서 느껴지는 집중력과 집요함도 좋고요. 존경심과 애틋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드는 작가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왜 아갈마님을 튕겨 낼까요^^
 

 

 

음악을 들을 때면 청각을 통해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진동을 통해 몸과 소리가 서로 공명하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하물며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음원을 듣노라면 음악의 진동이 손으로도 전해져온다. 그래서 가끔씩은 비트나 베이스 음이 강한 음악을 손으로(?) 들어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을 때에도 문장이 온몸으로 휘감겨오는 느낌이 좋다. 단지 눈으로만 좇는 것이 아니라 문장 속으로 고요히 잠기는 기분 같은 거 말이다.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는 건 음악을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불필요한 끈적임 없이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장의 리듬이 몸을 감싸오는 것 같다. 그런데 요 네스뵈의 소설은 잔혹할 땐 굉장히 잔혹한 미스터리 장르이고, 그래서 더 역설적인 매력이 있다. 음악적인 리듬과 미스터리의 만남은 아름다움과 어둠이 동시에 공존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더더욱 강렬히 대비시켜주는 것과 같다. 따뜻하지만 냉혹하고, 두렵지만 믿게 된다.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이 어둠과 밝음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하모니를 이루어 간다.

 

 

 

요 네스뵈는 실제로 인기 뮤지션이기도 하단다.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소설과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음악을 좋아하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글엔 음악이 흐르는 걸 느낀다. 캐릭터의 목소리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 귀에 직접 속삭이는 것 같다. 이런 작가들은 캐릭터를 잘 만들어 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서사에 뛰어난 작가들도 있지만 캐릭터를 끝까지 이끌고 가는 작가들에겐 캐릭터가 이미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음악에 존재하는 리듬처럼 캐릭터의 목소리를 집중력 있게 유지해 나가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의 「아들은 내 책장에서 꽤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나에게 주는 언젠가의 선물로 아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성」을 읽을 즈음부터 이어지던 무력감은 쉽게 떨쳐지질 않았었다. 나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될 때마다 가야 할 곳을, 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깨어날 때까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는 내용의 꿈을 꾸고는 한다. 이럴 땐 대개 힐링이 되는 좋은 글, 착한 글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간의 극한적 상황을 다루는 글을 더 선호하므로 요 네스뵈를 선택했다.

 

 

 

육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 왜 이리 얇게 느껴지는지, 최대한 천천히 읽었는데도 너무 빨리 읽는 것은 아닌가 싶어 중간중간 멈추고 딴 일을 하기도 했다. '해리 홀레'도 그렇지만 요 네스뵈의 주인공에겐 마음을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다. 모성본능을 자극한다고 할까.. 보살펴주고 싶고, 이야길 들어주고 싶고, 나도 아무 말이든 계속해서 하고 싶어진다. 나이가 많든 적든 소년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아들」의 주인공 소니는 대놓고 '소년'이라 불린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 때문에 믿게 된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재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이 가리키는 옳음을 향해 몸을 사리질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기계처럼 완벽하고 철저한 캐릭터보단 냉기와 온기가 공존하며 감성과 생각이 동시에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좋아하게 된다. 상황을 통제하기보단 모든 감각을 열어 놓고 있어, 자신들도 잘 다치지만 강한 캐릭터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유명 뮤지션이기도, 저널리스트, 경제학자이기도 하단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엔 단지 음악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오슬로의 어두운 실상들, 인간성의 면면들이 설명이 아닌 묘사를 통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상황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여 나가는지를 묘사해낸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주저하고 갈등하지만 그 선을 넘어보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모든 음들이 하나의 음악처럼, 파악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려온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평온하게 만들기 위해 소설에서나마 비극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

 

 

 

실제로 요 네스뵈의 이 말은 꽤 효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고서 최악의 기분이 되었던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어떤 색의 감정은 비슷한 색으로 해소되는 걸 느낀다. 인간의 잔악함과 나약함, 선한 의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상황마다의 선택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삶엔 동화 같은 환상은 없다는 걸,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걸 알지만 다시 한 번의 그 깨달음으로 오히려 평온해지고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니 말이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

 

 

 

이는 최근에 읽은 「정희진처럼 읽기」의 문장 중 하나이다. 인과론은 원인을 규명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악에는 애초에 원인은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대단히 복합적이라고 말한다. 혹 인과 관계가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왜 하필 나지?"라는 더 치명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란다. 악에는 의도가 아닌 의지가 있을 뿐이라고 정희진은 말한다.

 

 

 

나는 늘 긍정적인 사람들은 오히려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완전한 긍정은 완전한 부정이 될 수도 있고, 일종의 회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어둡고 우울한 기운을 주변에 전파하는 사람들 역시 불편한 게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수용하고 자신을 과신하지도, 자학하지도 않으며 늘 내게 묻고 또 물으며 살아가는 게 좋다. 그러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주저하지 않고 순발력 있게 나의 옳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장르소설의 미덕은 독자를 희롱하는 트릭이 아닌 마지막 한 조각까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퍼즐의 미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 네스뵈의 소설엔 그런 미덕이 있다. 유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누군가가 강요당하거나 선택했던 그 조각들에 의해 맞추어져 가는 퍼즐 같은 인생을 관조하게 되니 말이다. 동시에 들려오는 모든 음들이 하나의 음악을 향해 연주되고 있다. 잔인한 휴식이라고 할까, 요 네스뵈의 습기 없는 서정성을 그래서 좋아한다..

 

 

 

 

 

"모든 아들은 언젠가 자기가 아버지처럼 될 거라고 믿죠. 안 그래요? 그래서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봤을 때 그렇게 실망하는 거예요. 자신의 결함, 미래의 패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p306)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10-30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맛깔나는 표현!!^^
그런 느낌 너무 좋지 않아요?
당장 그 음악을 찾아 내 듣지않곤 못견디게 하는...
글..장르에선..그게 가능한데...
이상해요..
음악을 내내 말하는 하루키는 너무 대놓고 말해서그런지
째즈 이외..나머지는 음악을 불러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았거든요.
오히려..이 부분은 북유럽쪽 작가들이 더 탁월해..장르작가들..클래식이든 팝이든 뭐든 음악적 상상을 불러일으켜요...

물고기자리 2015-10-30 21:5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소설을 읽다가 음악 찾아 들은 적 정말 많아요^^ 그장소님도 음악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ㅎ

하루키는 음악을 글로 묘사하려는 성향이고, 요 네스뵈는 음악을 품고 글을 쓰는 것 같아요^^ 하루키의 글에선 걷는 것 같은 일정한 리듬감이 느껴진다면, 요 네스뵈에게선 음악으로 전신이 휘감기는 기분이 들어요ㅎ

작가에게 그런 감성이 있어서인지 소설을 읽는데도 음악을 들을 때와 비슷한 주파수를 사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이런 스릴러물에서 무슨 음악이 들리냐고 핀잔을 주어도 할 말은 없지만ㅎㅎ, 이렇게 공감을 해주시니 좋습니다^^

저도 장르물은 북유럽 스타일과 코드가 맞는 것 같아요~ㅎ

[그장소] 2015-10-30 22:15   좋아요 2 | URL
그쵸?리드미컬이..관건이네..그래서..하루키는 재즈에서 더 탁월하게 그 감각이 오나봐요.

북유럽쪽은 영화음악부터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진짜..딱 그느낌..스티븐 킹 원작이지만 영화
로는 다들 늦게야 원작자인 줄 알았던 쇼생크 탈출..에서 그 소나기 속 빗줄기 샤워씬 있죠..
음악을 그렇게 받아들이게 한다니까요!.
이 사람들은 ..그랑제..막심..다들..만만찮아요..

물고기자리 2015-10-30 22:28   좋아요 1 | URL
˝음악을 그렇게 받아들이게 한다니까요!˝ 너무 공감되네요ㅎ 갑자기 영화도 보고 싶고, 음악도 듣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 어떤 것에서든 영감을 받고 감각적으로 열리는 느낌이 정말 좋아요!

[그장소] 2015-10-30 22:35   좋아요 1 | URL
음~~이제..사람만 받아들이면 되는데...ㅋㅋㅋ

물고기자리 2015-10-30 22:3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

[그장소] 2015-10-3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 확! 깨죠^^ ㅎㅎㅎㅎ

물고기자리 2015-10-30 22:42   좋아요 1 | URL
전혀요ㅋㅋ 알고 보면 제가 더 깨실걸요?^^

[그장소] 2015-10-3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알고보면..물고기 잡아먹고있는 곰...팅이 자리..그런거요?

물고기자리 2015-10-30 22:46   좋아요 1 | URL
딱 그런거죠!ㅋㅋ^^

[그장소] 2015-10-3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후...매력인데...그거!곰도 잡고..물고기도 접고..1석2조!?^^

물고기자리 2015-10-30 22:49   좋아요 1 | URL
그렇게 되나요? ㅋㅋ

[그장소] 2015-10-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예..ㅎㅎㅎ

물고기자리 2015-10-30 23:03   좋아요 2 | URL
그장소님 만담에 일가견 있으신 건 진작에 알았지만^^ 만담력이 정말 최고이십니다!! 좀 슬픈 발라드를 듣고 있었는데 눈과 귀의 부조화로 인해 덕분에 많이 웃었습니다^^ㅋ

[그장소] 2015-10-30 23:04   좋아요 1 | URL
음..오..그런거 무진장 좋아라 하는데...^^
왜..낙엽이 놓고 말하자고..자꾸..그러나요?ㅎㅎㅎ

AgalmA 2015-10-31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댓글 소나타도 듣기 좋네요~

어느 프로파일러가 그러더군요. 우리 모두 살인을 꿈꾸지만, 살인자는 그걸 실행하는 자라고.
제 생각에도 그래요.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면서도 거기 지배당하고 싶어하기도 하죠. 모든 예술과 문학은 그걸 끝없이 말해 왔고요. 자본주의는 완벽히 거기 부합하는 괴물로 커왔고요. 인간은 참 희한한 생물...

2016-05-23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31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2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0 0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0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 (p11)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위로를 찾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늘 서점으로 향하곤 했다. 지금은 온라인 서점을 훨씬 많이 이용하지만 공간이 있는 서점에서 직접 맡을 수 있는 종이 냄새와 책의 밀도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은 그 자체로 이미 위로와 치유였기 때문이다.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엔 오랫동안 서점에 머물며 책과 책 사이를 서성이고 손이 닿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만져보고 읽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책이 왜 그렇게 좋은 걸까 생각해보지만 그냥 좋기 때문이란 답이 제일 어울리는 것 같다. 단지 머릿속의 충만함이 아니라 향기와 감각으로, 감정과 생각으로, 나의 온몸이 함께 동참하는 즐거움 중 하나이니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장르를 떠나 저자마다 나에게 주는 것이 다르고, 그 다름을 좋아한다. 소설의 경우엔 작가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교훈은 이거야!라고 확언하는 작가보단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던 내면의 깊이를 이야기꾼이 되어 다만 전달하는 것이 좋다. 자신도 왜 그런 이야길 쓰는지, 쓰고 싶은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쓸 수밖에 없어 쓰는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작이 아닌 장르에선 생각을 뚜렷하게,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좋다. 눈치 보지 말고, 배려하지 말고, 자신의 색을 선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독자를 위한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정희진도 그런 사람이었다. 정희진은 조심조심 속삭이지 않았다. 이런 글을 만나면 내용에 동의를 하든, 안 하든 읽는 것이 즐거워진다. 좀 더 분명히 전달되는 생각을 통해 나에게 없던 다름을 만나게 되고, 그만큼 시야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 (p14) 

 

 

 

읽는 것이란 나를 흐르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다시 읽고, 나에게 없는 새로운 시선을 경험하며 고여있지 않게 해주는 것을 치료라고 말한다면, 독서는 분명 나를 환기시켜 주는 '읽기 치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쓰는 것' 역시 치료라고 말하고 싶다. 때론 읽기보다 더 강력한 치료라고 말이다. 읽는 것이 담는 것이라면, 쓰는 것은 구체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표현되어 어떤 의미를 갖게 된 활자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생각에서 몸으로 이동하는 것이 쓴다는 것의 의미이고, 그렇게 육화되고 정화되는 것 같다. 그래서 작가들이 쓰고 또 쓰는 것이 아닐까..

 

 

 

정희진의 독서 노트를 읽는 건 새로웠다. 내가 읽은 책의 리스트와는 겹치는 부분이 지극히 적었지만 그나마도 감상은 조금씩, 또는 많이 달랐다. 하지만 그런 감상의 차이를 읽는 것이 좋았다. 그렇다고 정희진이 읽은 모든 책들을 나도 똑같이 읽고 싶진 않았는데 그 책이 아니더라도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읽어가는 사람인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의 리스트 자체보단 어떻게 읽는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나의 관점이었다. 그래서 내가 읽지 않은 책의 감상을 읽는 것도 즐거웠다. 나는 이렇게 할 말을 해야 할 바엔 용기 있게 직설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이 좋다. 

 

 

 

정희진은 책 읽기에 대한 방향이 뚜렷한 사람이다. 정확히 말해 '자극적인 책'만 읽는다고 말한다. 예상 가능한 내용이나 가독성이 지나치게 좋은 책은 읽지 않는다고 하고, 읽고 난 후의 감상에도 모호함이 없었다. 실제로 어떤 것에 대해서든 감상을 읽는다는 건 그 사람 자체를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정희진의 글에선 치열했던 독서의 흔적이나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책은 피사체를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건물 옆에서, 지하에서, 건물 뒤에서, 아주 멀리서,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배경에 있는 사람이 찍은 것이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즉 피사체, 문제 대상(사회)을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그 안에 있으면 자신을 알 수 없다. " (p23)

 

 

 

나는 위의 문장에 격렬히 공감한다. 나와 다른 위치에서 본 세상을 읽는 것, 그것이 책을 읽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글 역시 나에게 새로운 시선을 주었고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나와 비슷한 방향에서 바라본 사람의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어찌해도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에 깊이를 더하거나 정화시켜 나가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유 없이 그냥 좋은 것, 익숙한 행복을 느끼는 것도 좋다. 나에게 책은 끝없는 배움이자 친구 같은 존재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정희진처럼 생각하고, 읽고, 쓰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책과 사람의 만남은 내가 좋아하는 표현으로 말하면, 철저히 발효하여 제3의 물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 (p28)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읽는 사람과 글이 만나면 새로운 물질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자의 수만큼 서로 다른 물질들을 만들어낸다. 같은 것을 읽더라도 각자의 경험이나 지식, 기질에 따라 모두 다른 감상들을 말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자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같은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즐겁다. 그러니까 나에게 읽기란 책 한 권에 대한 나의 경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책과 다른 이의 경험으로까지 확장된다. 나와 다른 위치에서 바라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시선에 새로운 시선이 더해져 발효는 더 깊어진다. 세상에 반응할 수 있는 감각들이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모든 글은 감상문인 것 같다. 자신의 위치에서 본 세상과 삶을 다양한 장르를 통해 묘사하거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왜 읽는지, 어떻게 읽었는지, 왜 쓰는지에 대해서 늘 궁금해한다. 삶에 대한 애정이 있는 한 계속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책이란 '갈증'인 것 같다. "우리가 찾는 것은 물이 아니라 강력하고 생명에 찬 갈증인지 모른다"는 말 역시 어느 책에서 읽은 문장인데 정희진처럼 슬픔이나 아픔, 어두운 감정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사람들이 나는 좋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이 바로 삶에 대한 추동력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 (p19)

 

 

 

나는 '통과'라는 단어의 의미를 늘 체험하고 있다. 단지 머릿속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몸을 반응시키는 경험을 하고 있어서다. 좋은 책을 만나면 실제로 감각 세포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때로는 환희의 전율이고, 때로는 절절한 통증이다. 그렇게 온몸으로의 체험은 경험이 된다. "삶의 결이 달라진다"는 어느 책의 문장처럼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것이다. 반응 요소가 많아지는 건 내적인 풍요뿐만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것, 그러므로 몸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터득한 것은 실제의 행동을 변화시킨다. 책 한 권으로 삶이 달라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 세포들 중 상당 부분은 활자의 영향으로 춤추고 있다 생각한다.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없이 감사하다. 서로를 발효시킬 수 있는,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역시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10-25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읽는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 , ˝모든 글은 감상문˝ - 물고기자리님 문장홀릭 독자 A씨의 밑줄

`자극을 주는 책` 이 아니라 `자극적인 책`은 너무 자극적인 표현같은데, 그런 문장을 만드는 걸로만 봐서도 정희진 씨는 방향이 뚜렷한 분이군요.
˝책은 피사체를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찍은 것˝ , ˝제3의 물질이 만들어지는 과정˝ 밑줄~

저는 `통과`보다 `관통`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쓰기도 하죠^^; 거기에 새 살이 들어차는 과정이 독서 이후이기도 하고...물론 관통할 만한 책을 찾는 건 어렵지만 심마니가 산을 타며 삼을 발견하듯, 농부가 밭을 일구어 자신이 원하는 수확을 얻듯.

도서관에서 이 책 대출을 놓치고는 여직 못 읽고 있었는데, 너무 자극하시는 거 아닙니까^^!

물고기자리 2015-10-25 16:21   좋아요 1 | URL
저는 독자 A 씨의 직관과 감성 홀릭입니다^^ㅋ /정희진 씨는 방향이 확실한 사람이었어요. 가끔 저는 그런 방향성을 가진 사람이 부럽기도 해요. 저는 모든 방향을 기웃거리는 형편이라 말이죠ㅎ
관통이란 표현이 더 강렬하네요. 이렇게 단어의 맛을 음미하는 거 너무 좋아요. 새살이 들어차는 것도요~

살리미 2015-10-25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멋진 리뷰네요^^ 저도 물고기자리님 문장홀릭중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10-25 18:02   좋아요 0 | URL
과분한 칭찬이라 부끄럽습니다^^ 그러고 보니 위에 아갈마님의 댓글에 대한 제 반응은 굉장히 뻔뻔했네요ㅋ(독자 A 씨에 대한 칭찬은 완벽한 사실이니 오해 마세요 아갈마님~)

저도 물 흐르듯 편안한 오로라님의 리뷰를 좋아합니다~
 
창비세계문학 4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화기에서는 보통 전화를 걸 때 들어본 적이 없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많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윙윙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먼 곳,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았다. " (p33)

 

 

 

프란츠 카프카 「성」을 읽는 나의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주파수를 잘 못 맞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집중해서 들으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점점 무기력해지는 느낌이었다. 카프카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초반 50여 페이지를 읽는 동안엔 두 번이나 깊은 잠이 들었다. 내용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낯섦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어쩌면 책 때문이 아닌 나의 컨디션 탓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만 읽자는 마음은 들지 않았는데 읽을수록 느껴지는 무력감이 나의 기분 탓인지, 아니면 카프카의 위력인지 알아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기의 성분조차 고향의 것과는 아주 다른 그런 타향, 너무 낯설어 숨 막혀 죽을 지경이면서 그곳의 어처구니없는 유혹에 빠져서 계속 가다가 계속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타향에 온 기분이었다. " (p63)

 

 

 

카프카는 나의 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러 작가들이 카프카의 「성」을 왜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는질 알 것 같았다. 이에 비하면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벌레가 되는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 「변신」은 카프카의 가벼운 농담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카프카는 마치 미로를 설계하는 사람처럼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고, 그 길로 오차 없이 이끌고 있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소설을 읽듯, 일상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을 찾으려는 마음을 접어두고 주인공 K를 따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섰고, 이후엔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당신은 이곳 사정에 대해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지해요. " (p82)

 

 

 

카프카의 인물들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물들이 해야 할 말을 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저 자기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정해진 루틴대로 늘 같은 상황, 같은 일이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다. 책 속의 이야길 내 의지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K를 통해 먼 곳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전달받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인물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나의 세상은 서로 다른 성처럼 단절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소설을 읽는 행위에 내 자유를 박탈당한 기분이라고 할까, 나의 주관적 판단이나 인상을 배제 받은 것 같은 소외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신은 이곳의 모든 걸 그런 식으로 잘못 보고 있어요. " (p126)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상념들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모두가 착각인 것 같고, 인물들에 대한 신뢰감도 들지 않았다. 어떤 것이 왜곡이고 어떤 것이 진실일지 막막함을 느꼈다. 대개의 소설은 읽기를 멈추었다가 다시 읽을 때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이야기의 흐름을 떠올리면 연결고리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글은 깊은 안갯속으로 다시 들어설 때처럼 잠시의 주춤거림이 필요했다. 나의 주파수를 카프카의 주파수에 맞추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카프카의 문장에선 시선을 멀리 둘 수가 없다. 바로 지금 내디딘 발 앞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걸어온 자리에 발자국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꿈길을 걷듯이, 나는 다시 텅 비어버린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해야 했다. 그것 또한 무력감의 이유였고, 잠이 들진 않았지만 피로가 쌓여갔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피곤해하니까. " (p367)

 

 

 

「성」은 카프카의 대표작이자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로 언급된다고 한다. 지극히 폐쇄적이면서 한편으론 무한히 개방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신화, 종교, 실존주의, 사회적, 정신분석적, 전기적 등등 많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에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소설의 경우 책을 다 읽기 전까진 작품 해설을 읽지 않는 개인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이론의 관점이라는 틀이 아닌, 사소한 나의 감상을 먼저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앞서 내가 느낀 감정은 무력감과 피로감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던 목소리였지만 주인공 K의 심리에 이미 초반부터 동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무익한 성으로의 여행, 아무리 봐도 헛수고인 하루, 아무리 봐도 허망한 희망인 거죠. " (p253)

 

 

 

읽는 내내 잠이 부족한 것 같았고, 마음이 어수선했다. 성의 토지 측량사로 초빙되었지만 성에는 닿을 수 없던 주인공과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던 것 같다. 과연 그런 일이 있기는 했던 걸까, K가 토지 측량사이긴 한 걸까, 성이란 존재가 있기는 한 걸까 등등의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것에 대한 진실을 한 개인이 얼마만큼 인지할 수 있으며, 그 진실의 진실성을 과연 왜곡 없이 파악해 낼 수 있기나 한 건지를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앎에 대해 얼마나 무기력한지, 그러므로 삶 앞에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여러 일들이 사람을 기죽이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그 장애물들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겠죠. " (p369)

 

 

 

열심인 사람들, 깨어 있으려는 사람들, 측량하려는 사람들일수록 이상할 만큼 중요한 순간엔 잠이 들어 버린다. 힘을 주면 줄수록 튕겨져 나가는 것 같다. 집요하게 예측하고 예감하려 할수록 더욱 멀어지는 것 같다. 개방인 동시에 폐쇄의 이유, 앎과 동시에 왜곡인 이유처럼 결정적인 때일수록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때문에 주저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점은 잘 알아두세요. 가끔은 전체 상황과는 무관한 그런 기회도 생겨난다는 것을요. 그러한 기회가 오면, 한마디의 말, 한순간의 눈길, 한 번의 신뢰 표시만으로도 기력을 소진하면서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것보다 더 많은 걸 성취할 수도 있지요. " (p370)

 

 

 

나도 애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에 속하는 것 같다. 좀 더 살펴볼 것들이 많다며 돌아가길 주저하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삶의 방식이 이럴 땐 피로감이 만만치 않다. 늘 마음에 무거운 추를 매달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선 저절로 힘이 빠지는 걸 경험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나를 개방했던 게 아닐까 싶다.

 

 

 

"곡식알에 비유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체를 통과하려면 별나고 특이한 형태의 작고 능숙한 낟알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 (p378)

 

 

 

삶의 경험이 늘어 갈수록 유연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 같다. 유연함이란 나약함이 아니다. 유연하려면 우선 지탱해줄 근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어에 상당한 힘을 비축하고 모든 근육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유연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책을 읽고 알아가고자 하는 과정도 나를 그 앎 속에 고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벗어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 "

 

 

 

이 유명한 문장은 카프카가 그의 친구인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말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주는 불행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의 버림을 받고 숲 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썼단다. 카프카의 「성」은 미완성으로 끝이 났다. 카프카의 사망으로 더 이상의 이야길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미 하고 싶은 이야길 충분히 한 것 같다. 읽는 동안 내내 피로감과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나의 몸이 나의 생각보다 더 많은 말들을 들려주는 것 같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