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그 길을 묻다는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릴레이 인터뷰 모음집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인터뷰어인 안희경 씨는 2013년 12월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시작으로 2014년 5월 스리랑카의 A. T. 아리야라트네를 인터뷰하기까지 22만 리 길을 이동하며 세계의 지성들을 만나 우리가 가야 할 문명의 길에 대한 답을 구했다.



개인적으로 사회과학 분야를 무척 좋아하는데 한 권의 책으로 열한 분의 석학들을 만날 수 있다 하니 더욱 기대가 컸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 리처드 윌킨슨, 지그문트 바우만, 장 지글러, 하워드 가드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웬델 베리, 원톄쥔, A. T. 아리야라트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 중 한 분은 이 시대 살아 있는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 인터뷰할 당시 그의 나이는 88세였지만 목소리와 몸짓에는 청년 같은 기백이 넘쳤고,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뿜었으며, 그가 풀어내는 말에는 세밀하게 집중해도 다 품기 힘든 방대한 지식과 사유가 넘쳐났다고 한다. 미리 준비했던 수많은 질문은 물거품이 되었고, 흰 눈송이가 바다로 빨려 들듯 그가 품고 있는 생각들 속으로 저자의 모든 질문과 의도는 녹아버렸다고 한다. 나도 그런 장면을 떠올리며 1925년생 노학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겸손히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불안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예를 하나 들면 <뉴욕 타임즈> 일요판 한 회에 담긴 정보가 18세기 개화기에 살던 가장 똑똑한 남자나 여자가 아는 정보보다 더 많습니다. 그들이 온 생을 거쳐 흡수할 수 있는 양보다 많죠. 이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적으로 숙달할 수 있는 양이 얼마나 빨리 늘어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 (p183)



그는 이 책의 영어 제목인 「Seeking the Way To Save Our Civilization」의 가장 기본 전제부터 짚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인터레그넘(interregnum), 즉 공위(空位) 기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 (p183)



인터레그넘은 두 왕의 재위 기간 사이를 말하는데 옛 왕은 죽고, 새로운 왕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기를 뜻한다. 이는 옛 방식이 매우 빨리 노화되어 더 이상 적절하게 작동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활동 방식들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를 비유한다. 확신하기 어려운 시대라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리스크는 옛날 방식과는 달라요. 매우 유동적이고, 신비롭고, 짙은 안개 속에 있죠. 우리는 위험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무엇을 강타할지 모릅니다. ˝ (p188)



'지금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유발된 문제에 대해 개인이 알아서 자구책을 찾도록 기대 받고 있다고' 말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말을 언급하며 문제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건데, 책임은 개인이 지는 이 모든 것의 뒤에는 권력과 정치의 이혼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권력이란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이고,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요즘은 권력이 지구 전체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과 무역이 세계화되었고, 무기 교역과 테러리즘까지도 세계화된 현실에선 모든 종류의 권력이 국가가 조절하는 영역 밖에 거주하게 되었다. 세계화된 권력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불확실성은 매우 불쾌한 상태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에 지금 무엇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안다면, 적어도 이론이라도 알 수 있다면, 우리가 변화를 독려할 수 있겠죠. ˝ (p196)



우리의 한 손에는 정치적인 조절로부터 벗어난 권력을 갖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지속적으로 권력의 부재로부터 고통받는 정치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권력과 정치가 통합된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시는 이 둘의 동거가 가능합니다. ˝ (p204)



˝각 도시의 시장들은 다른 도시의 시장이 하는 일을 지켜봅니다. 뭔가 흥미롭다 싶으면 더 자세히 살피다가 쓸모 있다고 여겨지면 자기 시에 적용하죠. 강압 없이, 입법 없이, 경찰 없이! 효율적인 소통 규모이기 때문에 빠르게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배우고 있어요. 한 도시에서 시작된 긍정적인 변화가 트렌드가 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갑니다. ˝ (p204)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서로 협력하고 의존하면서도 배척과 차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진보를 추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만년에 와서야 도달한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그것은 똑바로 뻗은 직선이 아니었습니다. 젊어서 상상할 때 진보란 얽히고설킨 장애 없이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라고 여겼습니다. 구부러진 비틀림 없이 말이죠. 그러나 실제 진보는 추의 운동 같습니다. ˝ (p205)



우리에겐 자유와 안전이 모두 필요하지만 결코 자유와 충분한 안전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기 때문이다. 문명 속에서 산다는 것은 서열 지어진 환경 안에 있다는 의미이고 사람들은 더 안전해지기 위해 더 많은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불행은 말이죠, 사람들이 사실상 무제한의 자유를 구하고 싶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안전을 투항시키는 데서 오고 있습니다. ˝ (p208)



그가 청년기였을 땐  '일생을 거는 프로젝트를 만들라'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말이 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젠 그런 조언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요즘 학생들에겐 당장 내년에 할 프로젝트라도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란 문제로부터 자유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에요. 대신 행복은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것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없는 인생은 행복의 레시피가 아닙니다. 이는 지루함의 레시피입니다. ˝ (p212)



행복은 어려움을 직면하고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상업적인 마케팅에 의해 잘못 이끌리고 있다고 말한다. 마케터들이 이런 문제들을 단박에 해치울 해법들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우리에게 삶의 실제를 직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견을 달자면 약이냐 요리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아플 때마다 처방을 받기 위해 약국으로 달려갈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건강을 도모해 나갈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권력과 정치를 재혼시켜야만 해요. ˝ (p215)



우리가 행동으로 다시 심어내고 재생하고 뒤바꿔내는 전환이 없다면 우리는 못난 이데올로기를 대치하는 아름다운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믿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찾아 나설 것이고, 그 답은 세상에 나올 거라고요. 나는 당신 세대가 그 길을 이루도록 모든 행운을 전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그 대안들은 어딘가에서 당신들이 발견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창조해야 합니다. 기회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거니까요. 저는 그저 사회학자일 뿐입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살라고 조언해주는 카운셀러가 아니에요. 우리의 삶에 어떤 선택 상황이 놓여 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 (p216)



내가 바우만의 인터뷰에 이끌린 이유도 그가 구체적 방법보다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우만의 말대로 진보가 추의 운동이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만 볼 것이 아니라 왜 뒤로 밀려나갔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연한 기대나 희망보단 다음 세대가 다치지 않게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 중 또 한 분은 스리랑카의 간디라 불리는 A. T. 아리야라트네였다. 스리랑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인데도 모든 교육이 무상이며 GDP가 비슷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삶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지수가 월등히 높다고 한다. 아리야라트네는 스리랑카 최대의 민중 조직인 사르보다야 운동의 창시자다.



저자는 첫 인터뷰 대상자가 정해지기 이전부터 마지막 인터뷰이는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 박사라고 마음에 품었단다. 사르보다야 운동의 실천 덕목은 불교의 팔정도라고 하는데 고전적인 방식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안운동으로 버티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시각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개인, 가족, 이웃, 그리고 나라가 스스로의 전망을 가져야 해요. ˝ (p413)



˝우리네 삶은 물질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마음과 물질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형식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개발까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p413)



˝세월호가 물에 잠길 때 나도 울었어요. 세계가 함께 울었습니다. 뒤늦게 드러나는 보도를 보니 역시 구조의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대체 그 어린 목숨이 잠길 때까지 조직의 꼭대기에서는 무엇을 한 겁니까? 언론은 누가 주무른 걸까요? 조직의 꼭대기를 좌우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돈, 권력을 부르짖는 사람들인 겁니다. 권력과 돈이 그들의 종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참사가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는 권력과 돈이 우두머리가 된 사회적 순위를 교체해야 합니다. ˝ (p413)



당장의 돈 흐름을 살리겠다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땅도 주고 권리도 팔지만 초국가적 기업들은 성장이 아닌 가난을 만들고 떠난다고 그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 성장지수만 높이고 결국에는 빈곤만 남는다는 것이다.



˝길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까지 고려하자는 거지요. ˝ (p416)



아리야라트네는 사르보다야 운동이 스리랑카 전체 마을의 3분의 1인 1만여 마을이 참가하며,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



˝그 답은 정치적 중립에 있습니다. ˝ (p424)



그들은 지독하게도 독립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며, 기업이나 단체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아무런 조건이 없을 때만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 때문에 지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만, 동시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 (p425)



사르보다야 운동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들 대신 아리야라트네가 한국의 대통령에게 전할 메시지를 그대로 옮겨 적어보려고 한다.



˝그래요, 제가 좀 오래 살았으니까 감히 말을 꺼내보겠습니다. 마담 프레지던트, 부디 기억해주세요. 당신의 첫 번째 목표는 당신의 모든 권력과 돈, 지식, 지혜를 모아 당신의 내각과 각계 리더들이 이 한 가지를 마음에 새기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네 단어입니다. 'The Last, The First'예요. 마하트마 간디가 우리에게 남긴 말입니다. 진정한 개발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그 사회 속 마지막에 놓인 사람이 이익을 얻도록 하는 겁니다. 당신 나라의 번영을 부자나 중간 계층에 맞춰서 꾸려가면 안 됩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약한 사람이 조금 성장할 때, 나머지 모든 국민도 혜택을 보게 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부자들에게 말하세요. 부는 반드시 가난한 이들과 나눠야 한다고요. 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세요. 그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지 마세요. 당신의 권력도 국민과 나누세요.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생각의 자유, 결사의 자유, 결정의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반드시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약속되어야 하는 겁니다. 저는 정치권력을 잡아본 적도 없고, 재산도 없는 노인입니다. 그저 나이 많은 행복한 사람으로서 드리는 조언이에요. 당신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 (p438)



인터뷰어인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소 팔아 대학을 다녔던 30년 전 청년들은 졸업과 함께 정규직이 되었지만, 대출로 대학에 다니는 그들의 자식들은 무보수 인턴을 버텨낼 재력과 스펙 쌓기에 투자할 자금 지원이 없으면 서른까지 이어지는 아르바이트, 혹은 마흔이 되어도 잡기 힘든 정규직 전환 기회를 바라보며 가난과 울적함을 버텨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p8)



요즘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공허해 보인다. 불안해 보인다. 늘 화가 나 있는 듯 보인다. 사회의 흐름이 곧 우리들의 표정 같기만 하다. 그래서 문명, 그 길을 묻고 있는 것이고, 떠도는 마음들이 서로 공감하고 협력하여 희망 쪽으로 다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열한 분의 지성들이 문제점을 파악하거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고 있지만 결국 우리들의 답은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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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얄따가 보이고, 산 정상에는 흰구름이 걸려 있었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매미들이 울고 있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영원한 잠, 평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 바다와 산과 구름과 넓은 하늘이 펼치는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여명을 받아 더욱 아름답고 편안하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나란히 앉아, 구로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도 잊은 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 -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p262)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으로 예민했던 나는 하늘과 바람, 햇빛과 어둠, 날마다 다른 공기 냄새, 정적의 풍요, 소음 속의 적막함 등 평범한 일상의 어떤 순간들을 온 감각으로 느끼며 그 속에 잠시 머물곤 했었다. 지금도 아주 어린 시절 어떤 장소의 후각적 기억이나 공기의 무게가 떠오를 때가 있는데 이런 성향의 나에게 체호프가 묘사하는 자연의 정경이란 읽는다는 의식 없이 바로 체화되는 느낌이다. 아름답지만 애틋하게 말이다.



더욱이 체호프가 묘사하는 자연의 정경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투영하고 있어서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레 공감하게 만든다. 어떤 풍경이든 자연의 모습은 계속 변화해간다. 사람들의 생각은 구름처럼 모였다가 다시 흩어져버리고, 마음 역시 짙은 안갯속에 갇히기도, 삶을 향해 환하게 걷히기도 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아름다움이나 벅참은 곧 황폐한 슬픔으로 변해버리기 마련이고, 완벽한 환희로 지켜봤던 순간이 완벽한 지옥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봐야 할 곳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잘 살펴보라며 조근조근 속삭여주는 듯한 체호프의 글은 담담한 듯 깊이 파고든다.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포장하지 않고, 진실과 사실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약함과 허무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켜켜이 사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한 지평을 향해 열리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 그는 슬플 때면, 머리에 떠오르는 온갖 논리로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제는 논리를 따지지 않고 깊이 공감한다. 진실하고 솔직하고 싶을 따름이다..... ˝ (p273)



새로운 기쁨 뒤엔 새로운 실망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나의 소박한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살아간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 같다. 새삼 글을 읽을 수 있고,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비록 번역된 글이지만 활자를 통해서라도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을 살았던 천재적인 작가와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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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13 12: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겐, 지금은 고인이 된 알라디너가 준 선물이라 더욱 소중한 책이에요.

물고기자리 2015-08-13 12:13   좋아요 2 | URL
그러셨군요.. , 책이란 게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저자의 손에서 벗어난 후에도 이런저런 사연들과 함께 소중한 그 무엇이 되거나 연상시켜주니 말이에요. 책이 곧 사람인 듯도 싶고, 책이 있어 감사한 것 같아요..

AgalmA 2015-08-14 0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속 표현은 제가 뒤라스를 읽었을 때 심정과 비슷해서 응?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책을 다시 읽어야 되나 봅니다....
꽤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도 <부영사>를 못/안 읽고 있는 저를 책망하게 되네요.

아마 물고기자리님께 떠넘기려는 술수인가 봅니다....

물고기자리 2015-08-14 10:17   좋아요 1 | URL
책을 읽을수록 느껴지는 건 잘 쓰는 것에 앞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작가의 진짜 실력인 것 같다는 거예요. 포장하지 않는 진짜 삶의 별것 없음을 말하지만 그걸 성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오히려 삶에 열기가 생기는 것 같거든요. 타인에게 드러나는 상대적인 진실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실망이나 후회도 담담히 끌어안을 수 있는 진짜 삶에 대한 용기 같은 거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도 유부남, 유부녀의 불륜이란 관점보단 전 그런 시선으로 읽게 되더라고요^^ 그나저나 뒤라스의 <부영사>는 완곡한 권유인가요?ㅎ

AgalmA 2015-08-14 12:00   좋아요 1 | URL
뒤라스도 일탈과 불륜 내용이 많잖습니까. 그런데 물고기자리님이 체홉에 대해 말씀하신 대로 뒤라스도 생에 대한 활력과 무력함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게 참 대담/섬세/담담(이 성질이 나란히 묶이는 게 신기)해서 독자가 쉽게 소설적 상황을 재단하지 못하게 만들죠...
체홉에 대해 이런 느낌을 말씀하고 계셔서 제가 뒤라스도 떠올린 걸 거예요.
뒤라스를 읽으시든 안 읽으시든 자유지만, 연결해 읽으시면 다른 말, 같은 느낌의 기묘한 일체감을 느끼시겠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읽어도 좋겠죠. 화양연화 같은 순간도 있어야 삶....

물고기자리 2015-08-14 12:07   좋아요 1 | URL
본질을 성찰할 수 있는 작가는 본질을 말할 수 있어 대담하고,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고 떠오르는 본질만을 말할 수 있으니 담담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실력이 있기에 섬세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심플하게, 진실하게, 깊이 있게 말이죠. 뒤라스도 읽어 보고 싶어요^^
 

˝체호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이다. 그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예술가이다. ˝
- 수전 손택


˝체호프는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이다. ˝
- 레이먼드 카버


˝당신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 나니 다른 사람의 작품은 모두 펜이 아닌 막대기로 쓴 것처럼 여겨집니다. ˝
-막심 고리끼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민음사에 이어 이번엔 열린책들의 선집으로 읽었는데 역시 체호프의 글은 담담한 듯 강렬했다. 몇몇 단편의 감상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니 이렇게 비슷한 내용이 되어버렸다.



하찮은 것 -

나에게 하찮은 것이 타인에게도 하찮을 리 없다.



쉿! -

현실의 볼륨을 아무리 줄인 들, 아무리 비장한 들, 좋은 글이 나올 리는 없다. 현실과 격리된 채 추구하는 그 무엇이 아닌, 주변의 하찮은 모든 것들이 삶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6호 병동 -

고통을 모르는, 고통을 경험하지 못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강박적으로 완고한 사람들은 자신의 완고함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른다. 생생한 감정을 만나면 생각 속으로 도피할 수 없다. 닿을 수 없는 이상이 아닌, 삶은 현실 속에 있기 때문에..



검은 수사 -

 

˝인생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그런 하찮거나 아주 평범한 이득을 위해 인생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강요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예를 들어, 나이 마흔이 다 되어 강좌를 얻기 위해, 평범한 교수가 되기 위해, 시들고 지루하고 따분한 언어로 평범한 그것도 남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한마디로 평범한 학자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꼬브린은 15년을 연구해야 했고, 밤낮없이 공부해야 했고,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아야 했고, 실패한 결혼 생활을 겪어야 했고, 기억하기도 싫은 온갖 어리석고 옳지 못한 행동을 저질러야 했다. 이제 꼬브린은 자기 자신이 아주 평범하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p162)



˝그런데 바다에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와 편지 조각들이 창턱에 흩어졌다. 다시 그에게 공포와 불안감이 엄습했고....., ˝ (p163)

 

 

 

소설 속 이상적인 삶은 한 번의 생각만으로도 긍정적이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체호프의 소설에선 이야기의 방향이 현실과 똑같이 흘러간다.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게 실제의 삶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과 괴리된 이상만을 추구했던 주인공은 자신과 주변의 실제 삶을 망가뜨린 채 이상 속에서 행복한 미치광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체호프가 소설에서 다루는 내용은 어려운 학문이나 철학적 이야기들이 아니다. 일상의 소박한 소재들로부터 삶의 정수를 파고들며 개개인의 삶과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머릿속의 피상적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진짜 이야기를 장황하지 않게, 정곡을 찌르는 단편의 미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짧지만 강렬하고 깊다. 뜨끔하고, 슬프고, 허무하지만 상대적 진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의 진실을 찾고 싶어진다. 빨리, 멀리는 못 가더라도 소박하게 한 걸음씩 움직이며 나의 모든 풍경을 바라보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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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13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편소설의 대가를 계보로 만든다면, ‘체호프-오 헨리-레이먼드 카버-앨리스 먼로’로 정하고 싶어요. 이야기가 어렵지 않아서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작가들이에요.

물고기자리 2015-08-13 22:16   좋아요 0 | URL
오헨리 단편은 접해보질 않았는데 궁금하네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은 저도 좋아해요^^ 잔상이 꽤 오래가는 단편들이고 읽어도 읽어도 지겹지 않고요. 굳이 저도 순서를 꼽자면 앨리스 먼로보단 카버가 더 좋아요 ㅎ
 

˝법률이나 규칙이 어떻든 생명이란 가장 가치 있고 절대 낭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 ˝

- 관전둬


˝죄악에 대항해야 하는 것은 경찰이지 피해자의 가족이 아니다. ˝

 - 뤄샤오밍

 

 

 

13.67은 홍콩의 경찰인 관전둬와 뤄샤오밍이 2013년부터 1967년까지 시간의 역순으로 여섯 개의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 모음이다. 여섯 개의 단편은 완전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주제를 이어받고, 마지막 편을 읽으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개별의 단편이 사건의 해결에 집중하는 추리적 재미를 준다면, 연결된 여섯 개의 단편은 홍콩의 사회현상을 반영한 사회소설로도 읽힌다. 장르소설의 대체적 흐름이 캐릭터와 문학적인 묘사에 공을 들이는 추세인데 반해 이 소설은 철저히 사건 해결 중심이고, 캐릭터를 통한 사회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런 특성이 이 책의 매력이자 장점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인 찬호께이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성장한 세대로 홍콩 중문 대학에서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플로차트를 그려놓고 계획한 흐름 안에서 정확하게 움직여가는 듯 한 그의 글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완벽히 부합되는 것 같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를 반영한 각각의 데이터로서 하나의 아웃풋이 다음의 인풋이 되어 순환하는, 우연 같은 필연성의 구조를 보여 준다.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두 주인공인 관전둬와 뤄샤오밍에겐 그들의 능력과 개성에 맞는 각각의 별칭이 있다.

 

 

 

관전둬 - 'CIB(형사정보과)의 천리안'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고, 발자국만 봐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다는 천재 탐정.


뤄샤오밍 - '날수신탐'
일처리가 매섭고 추리력이 뛰어난 탐정.

 

 

 

이렇게 두 인물에 대해 요약하고 보면 홍콩 영화가 떠오르기도 하고, 유치해 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실제로 책을 읽으면 관전둬에겐 무한한 신뢰를, 뤄샤오밍에겐 지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1967년부터 2013년까지의 홍콩이다. 그 시기에 경찰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관전둬를 통해 한 도시를, 한 시대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전둬는 뤄샤오밍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선배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로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샤오밍, 사건 수사는 관례를 고수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경찰 조직에는 발전도 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매뉴얼대로 일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조직의 기강을 세우려면 상급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게 철칙이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해. 경찰의 진정한 임무는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 제도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한 근거를 내세워서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하네. ˝



1960년대의 좌파폭동, 1970년대의 경찰과 염정공서 분쟁, 1980년대의 강력범죄, 1990년대의 홍콩 주권 반환을 목도, 2000년대의 사회 변화를 증언하고 있는 관전둬는 재치 넘치고 노련하면서 고결하고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인물이다. 이 책의 백미는 마지막 단편인 <빌려온 시간>이었는데 이 단편을 통해 소설을 바라보던 시선은 2013년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이 시대의 홍콩에서 관전둬가 선택한 운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내공에 감탄했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개인적으론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읽기엔 더없이 좋았던 소설이었다. 또한 재능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했고, 선과 악이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재능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선택하는 능력이 진짜 재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현상을 보든, 책을 읽든, 그 속에서 발견하는 그 무엇들은 결국 나를 통한 선택이란 걸 알게 될수록 더더욱 지혜를 갈망하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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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 평생을 살았던 이스탄불은 내게 논쟁의 여지가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이 운명에 관한 것이다. ˝ (p21)

 

 

 

1952년 터키 이스탄불 태생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고요한 집>, <하얀 성>, <검은 책>, <새로운 인생>, <내 이름은 빨강>, <눈> 등을 집필했고 유수의 유럽 문학상들뿐만 아니라 2006년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이스탄불」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청년기까지 도시와 자신의 추억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이다. 파묵은 이스탄불의 역사에서 가장 나약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변방이자, 가장 고립된 시기에 태어났다. 부유한 대가족 속에서 성장한 파묵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해 오십 년간 살았던 집과 거리, 마을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스탄불에 대한 이 예속감은, 도시의 운명도 사람의 성격이 되는 의미이다. ˝ (p20)

 

 

 

이 책의 키워드이자 빈번하게 언급되는 단어는 '비애' 로서 역사적, 문화적인 이스탄불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는데 오르한 파묵은 이를 꽤 집요하게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표현된 비애의 정서는 슬픔과는 다르다고 한다. 가난한 대도시의 무기력과 그곳의 인간 군상을 보며 서양인들이 느꼈던, 외부로서의 감정이 슬픔이라면, 비애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서 발전시킨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런 비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중 하나는 그들이 대제국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슬프게 알려주는 유적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혼란스러운 오늘날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애는 이스탄불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이 마비의 변명이 된다. ˝ (p146)

 

 

 

시인과 삶 사이에 뿌연 창과 같은, 삶에 맞서 의식적으로 물러나 움츠리고 있다는 의미의 이 감정은 마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패와 우유부단, 패배, 빈곤을 의식적으로 자랑스럽게 선택한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실과 결핍의 결과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처럼 제시되기 때문이다. 시인에겐 삶 그 자체보다 삶의 슬픈 투영이 더 매력적인 것처럼 말이다. 오르한 파묵은 자기 자신도, 이스탄불의 모든 것들도 세밀한 풍경화를 바라보듯 살피며 이 회고록을 쓰고 있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오랜 시간 관찰했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진솔하게 설명해준다. 풍경화의 진짜 주제는 풍경만큼이나 그 풍경이 불러일으킨 감정이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그에게 이스탄불은 비애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정경인 것 같았다. 우울하지만 어떤 면에선 그에겐 행운이었던 비애감이다.

 

 

 

˝몰락하여 붕괴된 제국의 잔재, 잿더미 아래서 무기력, 빈곤 그리고 우울과 함께 퇴색되며 낡아 가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때로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곤 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어떤 소리는 실은 이것이 행운이었다고 내게 말한다.) ˝ (p20)

 

 

 

˝이스탄불에서 비애는 음악의 중요한 분위기이며 시의 기본적인 단어일 뿐만 아니라, 인생관과 정신 상태 그리고 도시를 도시이게 만든 재료의 암시이다. ˝ (p131)

 

 

 

이런 이유로 부정적인 만큼이나 긍정적으로 여겨진 감정이며 파묵이 느꼈던 비애의 출발점은 어린아이가 뿌연 창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이 느끼는 멜랑콜리가 아니라 자랑스럽게 내면화하고, 한 공동체가 모두 함께 공유한 슬픈 연대와 같은 감정이라고.

 

 

 

˝이스탄불은 하나의 대도시로서 비애를 모두 함께 긍정하며 산다. ˝ (p148)

 

 

 

어린 시절 오르한 파묵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여기는 아이였다. 뽀뽀, 칭찬, 달콤한 말과 함께 이 사람 품에서 저 사람 품으로 옮겨 다니는 똑똑하고 얌전한 아이였단다. 주변을 세밀히 관찰하길 좋아하고,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호기심 많았던 어린 파묵은 기회가 될 때마다 집에서 도망치는 아버지를 대신했던 어머니의 사랑에 형과 경쟁해야 했었다. 대가족과 함께 머물던 5층짜리 가족 아파트는 마치 어두운 박물관 같았고 지루했다. 물건들로 꽉 찬 어둡고 우울한 집, 부모님의 불화, 형과의 경쟁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상상의 세계로 도망치게 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뇌리 한구석엔 자신과 똑같은 다른 오르한이 이스탄불의 어느 곳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단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는 인터뷰에서도 자신은 터키의 특성인 동양과 서양적 충동 사이에서 두 가지 영혼을 갖는 낙관주의자란 말을 한 적이 있다. 현실과의 관계를 잃을지도 모르지만 정신분열의 상태는 사람을 지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말이다. 어쩌면 작가에겐 분열되어 아픈 것보다 하나의 영혼만을 가진 것이 더 비관적일지도 모르겠다. 이스탄불과 오르한 파묵은 서로 닮은 것 같다. 폐허와 현실의 삶이 공존하고, 동양과 서양, 비애와 긍정이 공존한다. 실제로 파묵은 자신을 설명할 때 이스탄불을, 이스탄불을 설명할 땐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엔 다수의 흑백 사진과 그림들이 실려 있는데 그가 고른 사진이나 그림들을 보면서 오르한 파묵의 마음속 정경들을 느껴볼 수 있다. 나의 경우엔 색감이 없는 사진과 그림들을 볼 땐 풍경의 외형보단 이면의 정서를 먼저 느끼게 된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마침표를 쉽게 만날 수 없는 그의 문장은 때로 여섯 페이지에 걸친 쉼표 끝에 겨우 마침표를 만날 수 있었을 정도로 세밀한 기록을 하고 있다. 화려한 수사가 없는, 마치 흑백의 정경 같은 그의 글은 자신의 정서를 꾸밈없이 진솔하게 드러낸다. 책 속의 낯선 흑백 사진들은 내가 살아 본 경험이 없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행복한 외로움의 정경을 보는 듯 말이다. 그 느낌의 근원은 바로 회화적 정경의 아름다움이었던 것 같다. 영국의 예술 비평가이자 작가인 러스킨은 '우연성'에 의한 건축의 회화적 아름다움대해 이야기했었다고 한다.

 

 

 

어떤 건축물이 창조된 지 수백 년이 지난 후 그 주위에 나타나는 담쟁이덩굴, 풀, 식물 같은 자연의 연장선과의 조화로 회화적인 아름다움이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처음 지어졌을 때 우리가 보고자 했던 형태가 아니라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나타나는 우연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변두리 마을이나 폐허, 나무 풀 같은 자연의 우연적인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먼저 그 마을에서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 한 발 떨어진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회화적 정경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거기 사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도시를 서양인의 시선으로, 때로는 동양인의 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 (p353)



˝나는 나를 이곳 사람으로도 이방인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최근 오십 년 동안 계속된 이스탄불 사람들의 도시에 관한 생각이기도 하다. ˝ (p393)



˝다른 사람에게서 이스탄불이 비애의 도시라고 듣는 것이 왜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하는 걸까? 왜 나는 나의 모든 삶을 보냈던 나의 도시가 내게 준 감정이 비애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 걸까? ˝ (p321)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던 오르한 파묵은 가족들의 바람대로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하지만 실상 건축과 관련된 행복한 기억이 없었고, 수업 중 마치 목숨을 건지고 싶은 듯 뛰어나가 이스탄불 거리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벽과 골목을 이미 샅샅이 알고 있는 이 도시를 가지고 언젠가는 무엇인가를 할 거라고 머리 한구석으로 생각했던 이 산책은 파묵에게 감동적인 흔적을 남겼다. 풍경마다 자신의 감정과 결합한 정경들이 생겨난 것이다.

 

 

 

˝어떤 도시의 일반적인 특징, 정신 혹은 정수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 우리의 정신 상태에 관해 우회적으로 말한다. 우리 자신들 이외에 도시의 다른 중심부는 없다. ˝ (p475)

 

 

 

역사와 폐허, 폐허와 삶, 삶과 역사가 맞물려 있는 상태. 그 속에서 변질되지 않은 완벽함은 오르한 파묵에게 거부감을 준다고 한다. 그가 이스탄불을 사랑하는 이유도 폐허와 비애, 그리고 한때 소유했던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되지 않겠어요. 난 작가가 되겠어요. ˝ (p501)

 

 

 

잃어야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다. 잃어버린 곳에선 점차적으로 회화적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그 정경은 우리의 마음속 풍경과 닮은 것 같다.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자신의 폐허를 바라볼 수 있어야 그 안에 갇히지 않고, 비애를 통해 긍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보스포루스를 보는 것이 좋았다고 한다. 아시아와 유럽지구의 경계를 나누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급류가 있고, 바람이 있으며, 파도가 일고, 깊고, 어둡다. 하지만 파묵에겐 무한한 긍정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스탄불의 혼과 힘은 보스포루스에서 비롯된다며 말이다.

 

 

 

˝삶이 그렇게 최악일 수는 없어. 여전히 보스포루스로 산책 나갈 수는 있으니까. ˝ (p91)

 

 

 

사람과 장소에 관한 자전적 이야기로서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은 훌륭했다. 한때 세계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과, 역사의 현장이었던 보스포루스에 대한 뜻 모를 향수를 느꼈고 읽는 내내 이스탄불의 골목들을 누비며 그들의 비애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보스포루스를 찾아 삶을 무한히 긍정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사람에게 장소가 주는 의미로서 훌륭했다. 한 사람의 정체성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생각과 정서의 바탕이 되는 '장소'를 가진 사람들이 나는 부럽다.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구석구석 탐색한, 모든 풍경마다 추억이 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회화적 아름다움을 지닌 장소라면 더욱 그렇다.



개인적으로 사람이나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을 무척 좋아해서 관련 다큐멘터리들을 꼭 챙겨보는 편이다. 특히 자연경관 위주보단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보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싶다. 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실망할 것조차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던 경우를 제외하곤 어느 저자의 저작들 중 단 한 권만 읽는 경우는 드물다.



절대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것을 찾기보단 한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는 모든 경험적 요소들을 얻음으로 나 스스로에게 좀 더 다양한 시선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글에선 나름의 성향이 드러난다. 옳고 그름의 문제에 앞서 자신의 기질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 다양함을 읽어가는 와중에 자신의 기질적인 단점을 더 부각시키거나 또는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한 사람의 '태도'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나는 지식에 앞서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찾은 마음의 장소에서 잠시 머물며 사색하다가 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일상을, 나는 그래서 좋아한다. 파묵에게 보스포루스가 있듯 내 마음속 보스포루스를 찾는 여정이 있는 한 삶이 최악일 리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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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05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이 좋았어요. 파묵이 도시 전체를 생생하게 묘사했고, 주인공이 물건에 집착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파묵이 쓴소설 중에 <순수 박물관>이 유일하게 읽은 작품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8-05 22:33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 보고 싶어요 ㅎ 오르한 파묵이 물건이나 책, 지식 수집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이스탄불을 산책하고 돌아올 때마다 특이한 물건들을 하나씩 챙겨왔다고 하더라고요. 하다못해 벽돌 조각 같은 것도요 ^^ 파묵의 글이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계속 읽게 될 것 같아요 ㅎ

AgalmA 2015-08-06 0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풍경이 불러일으킨 감정˝은 풍경이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죠. 이스탄불의 정서와 풍경은 그곳에서만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창조적으로 바꾸는 건 바라보는 자에 따라 또 달라지겠지요....오르한 파묵 같은 작가?

물고기자리 2015-08-06 01:12   좋아요 1 | URL
오랜 역사가 있는 장소에선 대개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걸 보면 장소에 시간이 남긴 감정이란 게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좀 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그 풍경과 융화되는 구체적인 어떤 요소들이 있지 않나 싶고요 ^^ 도시가 파묵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파묵이 도시에서 글을 이끌어내는 환상적인 조합이 저는 참 부러웠어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장소가 주는 선물이겠죠?ㅎ

AgalmA 2015-08-06 01:28   좋아요 1 | URL
본다는 것의 의미라 존 버거 생각나는데요. 그도 시간, 순간의 의미를 참 잘 알고 있었던 듯...
꼬리의 꼬리를 무는 작가 퍼레이드ㅎ?

물고기자리 2015-08-06 01:33   좋아요 1 | URL
존 버거, 처음 듣는 분인데 찾아 보니 그런 제목의 책이 있네요 ㅎ 아무래도 이건 운명 같은데 읽어 봐야겠어요~

AgalmA 2015-08-06 01:44   좋아요 1 | URL
번역은 그닥 좋지 않아요...[동문선]이 좀 그렇잖아요(날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진 않겠지;;;) 감안하세요~
존 버거 신간 <사진의 이해>는 좀 나을라나 싶군요^^; 처음 만나는 저자라면 좀 예쁘게 만났으면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