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
읽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카프카의 「변신」이 아르헨티나의 유명 아티스트 루이스 스카파티의 삽화와 만났다. 오직 검은색으로만 표현된 <변신> 속 일러스트는 강렬하면서 고독했고 슬펐다. 사람의 말을 하고 싶지만 애처롭게 버둥거리는 다리를 가진 벌레라는 걸 온몸으로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카프카의 저작들은 비평가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릴 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고 싶은 독자로선 실존주의니 인간 존재의 무근저성이니 하는 평가가 오히려 읽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같다.
「작가란 무엇인가」의 밀란 쿤데라 인터뷰 중엔 이런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카프카를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카프카의 탁월한 상상력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알레고리를 찾으려 들기에 결국 상투적인 해답만 들고 옵니다. 예를 들어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둥(아니면 부조리하지 않다는 둥), 아니면 신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둥(아니면 우리와 닿을 수 있는 존재라는 둥) 그런 것들이지요. 상상력이 그 자체로 가치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 특히 현대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카프카의 소설은 꿈과 현실의 결합입니다. 즉 꿈도 현실도 아니지요. 카프카는 무엇보다도 미학적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미학적인 기적이지요. ˝
이언 매큐언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카프카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가장 흥미로운 소설은 역사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말한다.
˝첫 줄에 놀란 저는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습니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어요. (...) 이 이야기의 첫 줄을 읽으며 이런 것을 쓰도록 허락받은 작가가 있다는 것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걸 알았더라면 저는 이미 오래전에 글쓰기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
마르케스는 비평가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작가란 이래야 한다는 이론을 갖고 있지요. 그들은 작가를 그들의 틀에 맞추려 들고, 만일 작가가 그 틀에 맞지 않으면 그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지요. (...) 그들은 스스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중재자라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저는 항상 매우 분명하고 정밀한 작가가 되려고 노력했고, 비평가를 거치지 않고 독자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도록 애를 썼습니다. ˝
열다섯 살 때 카프가의 「성」을 읽었고, 아주 위대한 책이라고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생각은 이렇다.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활짝 열어두고 싶거든요. 저는 비평보다는 번역을 좋아한답니다. 번역할 때는 판단을 내리도록 요청받지 않으니까요. 그저 한 줄 한 줄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 제 몸과 마음을 통과해가도록 할 뿐입니다. ˝
폴 오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이야말로 두 낯선 사람이 절대적인 친밀함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독자와 작가가 소설을 함께 만드는 겁니다. 어떤 예술도 소설처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예술도 소설만큼 인간 삶의 근본적인 내면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
「변신」의 책날개에 있는 설명이나 옮긴이의 말을 꼼꼼히 읽어 보는 것도 좋겠지만 단어와 표현의 무게에 짓눌리기 전에 변신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변신」은 이런 느낌이었다. 마치 가수면 상태의 꿈처럼, 나의 몸은 꿈속에 있지만 현실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의 감정을 가진 나는 꿈속의 다른 인물들과 소통할 수 없었기에 더없이 무기력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차원으로 소외된 듯 고립감을 느꼈다. 외롭고 슬펐고 두려웠지만 소리 낼 수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기도, 아니기도 했는데 깨어나도 같은 현실일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둥대는 것을 멈추고 딱딱한 등껍질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나는 벌레로 취급되었고, 결국 벌레가 됐고, 벌레로서 소멸했다..
「변신」을 다 읽고 나니 슬픈 꿈을 꾼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속의 기억이 흩어져 버리듯 책을 읽었다는 기억도 점점 옅어졌다. 카프카의 글은 꿈의 언어로 읽히는 것 같다. 읽는 동안엔 모든 것들이 선명하지만 읽고 나면 추상적인 느낌만 남으니 말이다. 장면 장면의 인상들이 마치 꿈의 기억처럼 기시감을 남기는 것 같다.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가 언젠가 나의 경험이나 기억처럼 연상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일어난 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알고 있거나 알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재현이 아니라 창작을 통해 살아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진실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요. 당신은 그것을 살아 있게 할 수 있고, 만일 당신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면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이고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
우리는 현실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를 경험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는 지금도 누군가를 잠에서 깨우기 위해 여전히 변신 중인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