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느낌의 소설이었다. 셀 수 없이 여러 번 반복해서 불러 본, 어느덧 스스로 노래가 되어 버린 명창의 소리인 듯 읽혔다. 숨 고를 틈 없이 구성진 가락처럼 연결되는 이야기는 느닷없이 시작되어 느닷없이 끝난다. 같은 리듬, 같은 음색으로 지치는 기색 하나 없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음표의 음을 노래하더니 당연한 듯 끝이 났다.



이야기의 배경인 가공의 땅 '마콘도'는 저자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태어난 콜롬비아로 해석하거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간, 삶, 역사로 읽더라도 낯설지 않았다. 무엇을 떠올리든 그렇게 읽히는 잔인하고 고독한 민담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그간 이 책을 읽었을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부러웠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마술적 이야기는 그들이 공유하는 리듬으로 읽었을 때 더욱 깊은 음색으로 들릴 테니 말이다. 어느 부분에서 해학적인 미소를 지을지, 탄식을 내뱉을지 온몸으로 반응하는 추임새를 곁들이며 말이다.



같은 이름과 비슷한 운명을 대물림하는 부엔디아 가문의 몰락은 억지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모를 때도 반복하고 알면서도 반복한다. 근친상간이라는 도덕적인 타락 역시 되풀이된다. 어쩌면 애초에 고유의 이름을 갖지 못 했다는 것 자체가 다의적인 의미로서 타락과 몰락을 예견하게 하는 것 같다. 저자인 마르케스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있는 그의 인터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제 작품에 대한 가장 큰 찬사가 상상력에 주어진다는 것이 저를 항상 기쁘게 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제 작품의 단 한 줄도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카리브해의 현실이 가장 터무니없는 상상을 닮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런 이야기도 한다.



˝실제 사실로부터 개연성을 찾아내는 것은 저널리스트이면서 소설가인 사람의 일입니다. 그리고 예언자의 일이기도 하지요. 사실 저는 매우 사실주의적 작가이며 진짜 사회주의 사실주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쓰는데, 사람들이 저를 환상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널리즘이 그의 소설에 미친 영향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



˝상호적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은 제 저널리즘을 도와주었는데, 그 이유는 소설이 저널리즘에 문학적 가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도 제 소설을 도와주었는데, 그 이유는 저를 항상 현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주의와 상상력을 결합한 《마술적 리얼리즘》기법으로 알려진 그의 글은 저널리즘과 문학의 만남으로 이룬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마침내 글에 딱 맞는 어조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어조는 제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실 때의 어조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으로 들리게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자연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케스는 예전에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쓰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그땐 그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은 채 이야기하려고 했었단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저 스스로 제가 하는 이야기를 믿고 할머니가 이야기를 해줄 때 지으셨던 것과 똑같은 표정으로 쓰는 것이었어요. 무표정한 얼굴 말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글을 믿는지, 아닌지는 금세 느껴진다. 스스로 믿지 않으면 설득하려는 어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나친 설득은 이야기의 힘을 떨어뜨린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를테면 말투가 빨라지거나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같은 속도와 톤으로 진행된다. 그렇기에 소설의 마술적 요인들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위대한 소설이 모두 그렇듯 「백 년 동안의 고독」 역시 사람과 삶에 대한 경험이 많아질수록 다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소설이었다.



몇몇 곳에 밑줄을 그으며 읽기는 했지만 그 문장만을 따로 떼어 놓고 읽어 보면 굳이 꼭 옮길 필요는 없어 보이는 신기한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위대함은 몇 개의 문장이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고유의 리듬을 잃지 않는 연속성과 반복에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책날개엔 이런 설명이 있다. ˝개가 꼬리를 무는 듯한 치밀한 구조 ˝, 이 책을 읽으면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궁금했던 이유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는 것보다는 마르케스의 어조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이 더 컸다. 그리고 다음의 내용 때문이었다.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작가는 글을 쓰는 매 순간 절대적으로 제정신이어야 하며 건강해야 합니다. 저는 글 쓰는 행위는 희생이며, 경제적 상황이나 감정적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낭만적인 개념의 글쓰기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작가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주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작품 창작은 좋은 건강 상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며, 미국의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매 순간 절대적으로 제정신이어야 한다는 것과 인생을 사랑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지극히 제정신인 상태일 때 그 반대인 상태 역시 제대로 묘사할 수 있다. 문학이란 삶의 모든 요소들을 묘사함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고,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런 노력을 하려고 한다.



쓴다는 것은 노동이며 만족이자 고통이다. 정신과 신체의 강인함은 당연한 조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가 아닌 독자로서도 마찬가지이다. 모쪼록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 읽고, 삶의 모든 요소들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 읽고, 인생을 사랑하기에 또 읽는다. 나의 인생을 창작하는 내 삶의 작가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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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07-12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도 마술적 리얼리즘에 빠져, 읽는저와 책속 그리고 현실과 허구를 도통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니체의 영워 회귀나 카뮈의 부조리 철학도 느껴졌고, 쿤데라의 무거움과 가벼움 마저 들었습니다.
카뮈, 쿤데라, 마르케스가 거의 같은 시대이기도하네여 :)
마지막즈음엔 우리네 어머님들의 한 많은 삶도 그들에게서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 엿보이더군요 :)
정말 읽는 이의 연륜과 경험, 상황에따라 다양한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 같아요 :)

물고기자리 2015-07-12 01:06   좋아요 1 | URL
네, 슬퍼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기쁠 것도 없는 심정인데 읽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소설이었어요 ㅎ 저널리스트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르케스는 사람과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잘 읽는 것 같더라고요~

cyrus 2015-07-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백년의 고독>의 복잡한 서사 구조가 익숙하지 않아서 완독하기가 어려웠어요. 카프카의 장편소설과 더불어서 다시 읽으려면 읽고 싶지 않은 작품입니다.

물고기자리 2015-07-12 21:11   좋아요 0 | URL
그러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 ㅎ 제가 소설을 읽는 독서 방식은 밖에서 서사를 파악하려는 유형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에 대한 심리적인 동선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인물들의 개별적인 지도를 만드는 유형이거든요. 그리고 그 지도들을 연결하여 더 큰 지도를 그려보는 거지요.

장단점이 있겠지만 제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사람, 그 자체라서 인간성을 제대로 묘사할 줄 아는 작가라면 무슨 내용이든 읽는 체질이에요. 제대로 읽든, 아니든 말이죠^^ 작가의 묘사력이 부족한 경우엔 그 작가를 읽어 보려는 시도를 하는 편인데 제가 읽는 건 이야기가 우선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제 본질적인 성향 탓이겠죠 ㅎ
 

 

 

˝만약 우리를 정의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비밀이라면, 그렇다면 나를 삶의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나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비밀은 바로 그 그림이었다.˝ (2권 p470)



마음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을 채색할 수 있는 일종의 물감이라는 상상을 해본다면, 그에 새로운 색감을 더해주거나 농도의 다양함을 주는 것이 바로 소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스펙트럼을 넓혀 줌으로, 사실에 대한 학습이 아니라 어떤 것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감상'과 그 가치를 예측할 수 있는 '직관'을 키워주는 것 중의 하나가 소설이라고 말이다. 이야기란 삶이고, 제각각의 색과 농도를 지닌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지식이나 정보 분야가 아닌,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인 소설에 관해서 만큼은 오직 나의 시선으로만 경험하고 싶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엔 줄거리를 나열하는 방식의 상세한 리뷰는 보지 않는 편이다. 대신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 위주로 읽어 본다. 이야기의 구조란 단번에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진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리뷰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에 관해서다.



소설을 읽기 전까진 타인의 감상이 나에게 스며들지 않도록 읽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읽고 난 후엔 다양한 리뷰들을 읽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감상을 끄적이고 난 후에야 한다. 개개인의 서로 다른 감상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의 리뷰를 대하는 방식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소설의 연장선에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다. 투박한 단 한 줄의 글에서도 나의 스펙트럼을 넓혀줄 양식을 얻게 될 때가 있으니 말이다.



황금 방울새도 그런 리뷰들이 기대되는 이야기를 지녔다. 그리고 나에겐 읽을거리가 많은 소설이었다. 나의 이야기들이 소설의 이야기와 만났기 때문이다. 구태여 막연한 상상을 해 볼 필요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인 '시어도어 데커'의 상실감과 고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2권의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그동안 시오가 보여준 것들은 일부였을 뿐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이야기 뒤로 더 묵직한 앙금들이 남아 있었다는 걸 말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인 파브리티우스의 그림 '황금 방울새'어떤 면에서 시오의 운명과 닮아 있다. 작가가 모티브로 삼은 그림이 왜 하필이면 '황금 방울새'였는지 그 정교한 선택에 놀랐다.



˝어떤 물건을 좋아하면 그 물건은 생명을 갖게 돼. 처음으로 마음을 활짝 열고서 평생 쫓아다니게 만드는, 혹은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되찾으려고 애쓰게 만드는 그런 이미지들 말이야.˝ (p460)


˝어떤 그림이 정말로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면 '아, 난 이 그림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좋아'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사람이 어떤 예술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아니야.

 

그걸 좋아하게 만드는 건 좁은 통로에서 들려오는 비밀스러운 속삭임이지. 쉿, 그래, 너. 얘야. 그래, 너.

 

아주 사사롭게 마음을 건드리는 거야. 네가 보는 그림은 내가 보는 그림과 달라. 정말로 위대한 그림은 아주 유동적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속으로 스며들지, 독특하고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말이야.˝ (p461~462)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는 점에서는 그림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책, 건축, 공예품 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품의 사연과 인물들은 세월에 흐려지더라도 소멸되지 않은 예술 그 자체는 남아서 어떤 개인들에게 제각각 다른 의미로서 삶의 이유나 위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것엔 논리적인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좋기 때문이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으로 인해 덜 유한하고 덜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그 증거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수단이자 전부였다. 그것은 대성당을 지탱하는 쐐기돌이었다." (p186)



그리고 그런 작품들은 유한하고 연약한 우리들이 남긴 것들이다. 인간들이 말이다. 그 사람이 살았던 시간은 스러지지만 그 정점이었던 순간이 예술로 남아 또 다른 이를 지켜준다. 누군가가 남긴 그 무엇을 예술로 만드는 것 역시 개개인의 사연이고 마음들이다. 서로에게 필요와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대가의 작품이 아닌 사소한 어떤 것에서라도 우리는 예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움은 현실의 결을 바꾼다호비 아저씨의 말을 생각했다.˝ (p465)



상실, 아픔, 슬픔들은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이 원인이겠지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 현실의 결은 변화한다.



˝이 세상의 위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위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을 처음으로 흘깃 보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꽃피우고 꽃피우는 것.˝ (p466)



충분히 괴로워하고 슬퍼하더라도 나로서 살아가는 것을 회피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아픔들조차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예술이 될 거라 생각한다. 고통 없는 아름다움은 없으니 말이다. 서로 닮았던 작고 외로운 방울새와 시어도어 데커는 서로를 구원할 운명이었던 것 같다. 운명은 승복이 아닌 발견이라 믿고 싶다.



시오가 머물던 호비 아저씨의 공간은 나에게도 위로를 주었고, 그의 친구 보리스가 문을 두드리면 어쩐지 내 마음에도 따뜻한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또 하나의 이야기가 내 마음의 색채를 밝혀 주었다. 그리고 나의 '황금 방울새'는 내가 읽었던, 앞으로 읽을 책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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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7-04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먼 옛날~~ ㅎㅎ
이 작가의 비밀의 계절를 읽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디오니소스학파라는것이 있다는 것도 첨 알고 실제 밀교처럼 행해지고 있다는 것도 첨 알고~~
이 책도 기대가 되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밀리고 쌓인 책들은 어떡하죠? ㅎㅎ

물고기자리 2015-07-04 02:05   좋아요 0 | URL
전작을 읽으셨군요~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절판됐더라고요ㅜㅜ 저도 밀리고 쌓인 책들이 ㅋ
 

 

 

어떤 소설을 읽다가 중반부쯤이 지나면 불현듯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의 낯섦이 사라지고 어느덧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처음의 낯섦을 익숙해진 시선으로 다시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도 같다. 이 소설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남은 책장이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고, 내가 주인공 '시어도어 데커'가 되어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어린 시절 책을 읽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낯섦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세계, 경험했던 적 없는 이야기가 좋았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관찰하길 좋아했고, 누군가의 애정으로 낡아진 물건들이나 익숙지 않은 사물들을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낯선 나라의 이름을 하나하나 발음해 보는 걸 좋아했고, 동그란 지구본을 돌려가며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게 재밌었다.



누구든 자신의 이야길 하면 관심 있게 귀 기울였고, 순하고 얌전한 나를 귀여워해 주시는 어른들의 눈빛 속에서도 나는 그분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예민한 아이였다. 타고나길 그랬고, 타인의 감정에 무신경해질 수 없는 나의 번잡한 마음이 때때로 나를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보단 누군가의 바람에 익숙해진 아이였고, 나의 유일한 도피처는 책이었다.



책 속에서는 나를 위해 쉴 수 있었다. 낯선 이야기일수록 나는 더 대범하게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장소와 인물, 그 안의 내용만 다를 뿐 생각과 감정의 경로가 나와 유사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시어도어 데커'도 그렇다. 시오는 내가 사람들을 봤던 시선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 자신인 듯 안타깝고 아팠다.



황금 방울새의 저자인 도나 타트자신의 소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다.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인 장인의 세공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글에서 그런 정성이 느껴지면 나 역시 어떤 단어 하나도 허투루 읽게 되질 않는다. 완독률 98.5%의 책답게 술술 읽히지만 술렁술렁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 자신은 어떤 색깔도 없는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며, 오직 읽는 것을 위해서만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자의 뛰어난 스토리텔링은 모든 것들이 선명하면서도 아득한 느낌으로,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이 나를 이끌어 가게 만든다.



주인공과 똑같은 사랑과 상실, 아픔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렇게 견뎌온, 견뎌야만 하는 슬픔들이 있다. 대상은 달라도 느끼는 방식들은 비슷하다. 낯선 이야기 속에서 그런 익숙함을 발견하고 공감했다. 하지만 추락하는 슬픔은 아니다. 아픔을 같이 공유했지만 그것을 요모조모 살펴보고, 닦아주고,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음으로 나는 좀 더 단단해질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아직 1권만을 읽었으니 앞으로의 이야기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결말이라도 나는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븐 이런 추천사를 남겼다.



˝읽는 내내 투수가 한 점도 내주지 않고 끝까지 이끌어가는 경기를 보는 것처럼 놀라고 흥분했다. 실수가 나길 기대하고 있다면, 이 책에선 헛수고다. 도나 타트는 '중독적이며 삶의 버거운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예술'이라는 주제를 과감히 돌파하면서 문학작품으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나는 이렇게 멋있는 찬사는 못 하지만 읽는 동안 어떤 잡념도 느끼질 못 했다. 몇 페이지를 지난 다음부턴 단 한 줄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없었다. 라고 1권의 리뷰를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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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01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직 읽는 것을 위해서만 호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최고의 찬사를 하신 것 같아요. 저도 읽어볼게요.

물고기자리 2015-07-01 09:2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저는 정말 푹 빠져서 읽었어요. 책이 짧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로요 ㅎ 에이바님께도 좋았으면 좋겠어요~

레삭매냐 2015-07-01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서로만 고이 모셔 두었는데, 번역 판이 나왔다니 번역판으로 읽어야겠습니다.

물고기자리 2015-07-01 11:01   좋아요 0 | URL
원서를 가지고 계시군요, 이 책은 번역도 꽤 공을 들인 것 같아요. 워낙 표현이 촘촘해서 번역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ㅎ 저자의 전작도 궁금한데 우리나라에선 절판된 것 같아 아쉬워요~
 

 

 

미국의 대표적 추리작가이자 하드보일드 문체의 대 레이먼드 챈들러. 그가 만든 사립 탐정 캐릭터인 '필립 말로'는 후대 하드보일드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54년 출간된 기나긴 이별은 '필립 말로'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장르 소설에 속하지만 문학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영향을 받았던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 책을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을 만큼 챈들러를 좋아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루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1960년대 내 영웅이었습니다. ˝라고 했고, 그의 장편 소설 「댄스 댄스 댄스」의 일부는 「기나긴 이별」의 완벽한 오마주라고 한다. 이 책을 읽어 보니 두 작가의 문체는 표현의 밀도에 있어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실려 있는 하루키의 인터뷰 시점은 2004년인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제 글쓰기의 이상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 한 권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제 목표랍니다. ˝



사실은 이 문장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뿐만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도 관심이 생겼더랬다. 그래서 조만간 읽어야 할 작가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의 인터뷰어는 하루키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꼽았고, 하루키 역시 그 소설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꽤 읽었고, 그의 글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나의 성향상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우선 그 책을 읽었다. 그런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주요 장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언제고 읽어야겠다 생각했던 이 소설을 미루지 않고 읽었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각각의 책으로도 의미가 있었지만 카라마조프를 인용한 하루키를 통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독서의 연결성을 느끼는 계기도 되었다.



하루키가 글쓰기의 이상이라고 언급한 그 반쪽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는 것 역시 나에겐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독서에 있어서는 상당히 집요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관심 가는 분야가 생기면 한동안 그것과 연계된 것들을 두루 탐색하는 성향 덕분에 어떤 해엔 오로지 역사에만 몰두하거나 사회과학만을 탐독하기도 한다. 지금의 추세론 한동안 소설을 읽게 될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그 출발점은 대가들의 인터뷰집인 「작가란 무엇인가」에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몇 년 만에 다시 정독했고,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책장에서 읽히길 기다리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이 장바구니에서 대기 중이고, 필립 로스의 책들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책들을 읽다 보면 연계된 새로운 관심분야가 또 생길 테니 이 독서의 방향이 어떻게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다시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로 돌아오면, 챈들러의 문장에 대한 이야길 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탐낼만한 문장들이 많았고, 줄거리에 크게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은 내용마저도 소음이나 잡담처럼 느껴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정묘한 스케치를 하는 듯한 서술들은 작은 사슬들이 서로 연결돼 듯 촘촘히 이어지며 장소나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구체화시켜준다. 레이먼드 챈들러에게만 이런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세밀한 표현에도 강약과 밀도를 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조절이 미흡한 글을 읽을 때면 음악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볼륨을 줄이거나 키우고 싶다는 충동이 들곤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균형 있는 문장력을 지녔더라도 메마른 느낌이 드는 글은 문학이 아니라 정보로서의 역할만을 한다. 감정적 유형임에도 감정으로 흘러넘치는 문장을 싫어하지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푸석한 느낌을 주는, 인간에 대한 습기가 없는 글엔 마음이 움직이질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온기도 좋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형식적인 따뜻한 글에는 쉽게 진력을 내는 편이다. 따뜻함이 흘러넘쳐 과하게 친절한 글도 식상하다. 그보단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담담한 문체의 글에서 인간의 슬픔에 공감하는 한 방울의 눈물에 더 마음이 간다. 펑펑 울어버리는 눈물은 자기 설움이 원인일 때가 많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퍼 올리는 마른 습기 한 조각은 사람에 대한 연민 때문이니 말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그 마지막 편인 「기나긴 이별」이 처음이라 전작의 느낌은 알지 못하지만 챈들러의 글에선 냉소적인 관찰에서 비롯된 통찰력과 약자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즈음의 장르 소설과 비교하자면 사건에 대한 서술의 비중보단 사색적인 문장들이 많아서 스토리를 통해 지적인 쾌감을 얻고자 하는 성향의 독자들에겐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반대로 결말을 빨리 알고 싶은 조급증이 없고, 사람의 심리나 행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아름다운 문장들과 더불어 시대나 장소에 대한 통찰력을 덤으로 얻지 않을까 싶다.



아직 전부를 알진 못 하지만 필립 말로 시리즈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필립 말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모든 것들이 반짝거리는, 아직 손님이 들지 않은 막 문을 연 바에서 필립 말로와 함께 '김릿' 한 잔을 마셔보고 싶어진다. 진 반, 로즈 사의 라임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은 진짜 김릿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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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6-27 2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제 추세론 뇌과학, 진화생물학의 개미지옥에 빠진 듯 하여요;ㅋ;)...소설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우흑.

물고기자리 2015-06-27 21:53   좋아요 2 | URL
저도 뇌과학 분야를 좋아하니 리뷰 기다리고 있을게요 ㅎ 행복한 개미지옥에서 건투하세요~

고양이라디오 2017-07-2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너무 좋아요!!! 상당히 공감갑니다^^ 저도 하루키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와 챈들러를 접해서 그런지 더 반가운 글입니다^^ <기나긴 이별> 훌륭했어요.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립탐정의 하루가 지나갔다. 정확히 전형적인 날은 아니었지만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한 남자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다. 부자가 될 수도 없고, 대부분 재미도 별로 없다. 때로는 얻어터지거나 총을 맞거나 감옥에 던져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죽을 수도 있다. 두 달마다 한 번씩, 이 일을 그만두고 아직 머리가 흔들리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을 때 번듯한 다른 직업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문에서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안쪽 문을 열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여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슬픔, 약간의 돈을 안고 들어온다.˝

 

 

 

레이먼드 챈들러기나긴 이별 시작 부분이다.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대부분 첫 소절에서 마음을 뺐긴다. 음악에 관한한 처음이 마음에 들면 마지막까지 좋아하게 된다. 그만큼 취향이 분명한 편이다. 여러 번 들어봐야 겨우 좋아지는 경우는 없었으니 말이다. 노래를 들을 때도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수의 음색이나 가사에도 예민해서 가창력이나 기교가 지나치게 뛰어난 노래보단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한 인물이 되어 잔잔한 감상을 남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첫 문장을 읽으면 대부분 느낌이 온다. 경험을 넓혀주는 소설이 될지, 좋아하는 소설이 될지 말이다.



서정적이며 섬세하지만, 아무런 꾸밈이 없어 다소 건조하고 무심한 문장들이 나의 취향이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는 글이나 지나친 생략, 은유를 위한 은유, 문장을 가지고 놀려는 기교적인 오만함은 사양하고 싶어진다. 「기나긴 이별」을 읽기로 마음먹은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취향 덕분이다. 이 책은 하루키가 무려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궁금해졌고, 너무 좋아하게 될까 봐 나름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방법으로 근 한 달간을 묵히다가 드디어 펼쳤다.



그리곤 처음 읽은 저 문장이 뭐라고 몇 번이나 읽었다. 소설 속 캐릭터와 내용을 전혀 모르면서도 감상을 쓰고 싶은 건 아마도 취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상한 건지는 몰라도 글을 읽다 보면 어떤 목소리를 통해 글이 들리는 느낌이 든다. 단지 시각적인 정보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목소리로도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첫 문장을 읽으면 문체의 특성에 맞는 나름의 톤이나 리듬이 생긴다. 챈들러의 문장에서는 조용히 휘감기는 서정적인 내밀함과 단단한 근성이 느껴졌다. 하루키가 왜 챈들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루키에게 영향을 준 것이겠지만 두 사람의 음색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하루키가 좀 더 소년 같은 음색이라면 챈들러는 그보단 저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빅 슬립」, 「하이 윈도」, 「안녕 내 사랑」, 「호수의 연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로 기나긴 이별이 마지막 작품인데 어쩐지 읽기 전부터 조금 섭섭하고 아쉬워진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자신만의 취향이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게 뭐라고 싶다가도 그것 덕분에 마음이 즐거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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