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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숭이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2월
평점 :
에쿠니 가오리의 최근 소설들은 여러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도돌이표처럼, 돌아가며 들려준다.
마치 이 세상의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라-는 것처럼.
이번 신작 <벌거숭이들>도 그러하다. 주인공 모모와 히비키를 둘러싼 주변인물들을 촘촘히, 언뜻 보기에 공평하게 그려나간다.
모모의 연하 남자친구 사바사키, 전형적으로 좋은 가정주부인 엄마 유키, 자유롭게 살아가는 언니 요우, 절친 히비키의 네 아이들. 좋아하는 감정의 불규칙한 교차-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사람이란 게 참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그 가운데 작가가 애정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도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리라.
오랜만에 흠뻑 빠져서 문장들을 음미했다. 일본 작가 작품들을 스토리 따라가기에 바쁜데, 에쿠니 가오리만은 음미하며 읽는 편.
그녀의 문장 호흡은 참 매력적이다. 소설을 덮고 빠져나오기 싫은 세계다, 더 보고 싶다 생각했다.
에쿠니 가오리 책은 소담에서 계속 나오는데 이번 건 특히 판형이 작다 할까, 인색하게 책을 만든 것 같아 아쉬웠다.
그리고 일본어 표지를 그대로 살린, 까만 장정의 다이어리가 부록으로 따라왔다.
1여년 전, 그야말로 맨몸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무렵, 이 집의 분위기 - 카즈에 자신과도 비슷해서 꾸밈없고 소통이 잘되는 분위기-에 야마구치는 살 것 같았다. (중략) ‘ 내 인생에 이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니‘라는 신선한 놀라움은 ‘이런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주었다니‘라는 신선한 기쁨과 동의어이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127p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히비키가 그리워졌다. 기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다. 남편도 자식도 있는 여자, 헤어지기에 앞서 전병을 주는 여자-, 그리고 깨닫는다. 이 건물의 그 집에서, 마치 그곳밖에 있을 곳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그녀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바사키는 화가 났던 거다. 발길을 돌려 끌고나와 바깥을 보여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뭐가 괜찮은지는 둘째 치고,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230p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과거형으로 말했다. 부탁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보고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면서. 232p
남편이 없는 집 안은 조용하다. 그 조용함을 유키는 음미한다. 남편의 존재를 음미할 수 없다면 남편의 부재를 음미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유키에게는 뭘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항상 무언가에 쫓겨 사느라 시간뿐만 아니라 공기까지 모자란다고 느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어가는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지금 유키는 간신히 자기 자신을 되찾았다고 느낀다. 2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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