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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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구암이라는 조그만 항구 마을이 있었다.

모자원에서 자란 희수라는 사내가 있었다.

구암의 실질적 주인 손영감의 관광호텔 지배인이자 행동대장 건달로 먹고 산다.

596쪽에 달하는 장편소설 <뜨거운 피>는 부산 촌동네 건달들에 대한 이야기다.

느와르 장르인데, 촌발 날린다. '뜨거움' 따위는 옛날의 코드지만 그래도 건달은 뜨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작가의 말에서 '희수의 삶에 관심이 가느냐'는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

희수라는 인물이 자기 욕심도 없고 주변이나 챙기고, 나쁜 건달이고 폭력적이지만 진짜로 사람이 나쁘지는 않아서일까.

그의 인생 한 단면을 들여다본 것 같은 몇 시간이었다.

이야기의 재미는 덤이다.

 

김언수 작가는 이 소설을 위해 건달을 따로 취재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구암이라는 동네는 없다고 한다.

영화 '신세계'나 '차이나타운'이 떠오르는데, 바로 영화화돼도 될 것 같은 이야기다.

 

 

인터넷서점에서 일찍 주문했더니 사인본이 왔다.

그에 비하면 구암은 토박이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게 왜 자랑거리가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암의 건달들에겐 자신이 부산 토박이라는 게 굉장한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 바다에서 태어나서 빈둥거렸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 이 바다에서 태어나서 빈둥거렸다는 것 말이다. 온천장, 동래, 해운대 같은 곳의 토박이 건달들이 뜨내기들에게 자기 구역을 다 빼앗겼지만 구암만큼은 여전히 뿌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그네들의 자랑이었다. 사실 구암 바다가 지금까지 토박이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온천장이나 해운대처럼 화려한 동네와는 달리 너무나 초라해서 애써 먹어봐야 먹잘 것도 없는 동네라는 이유 단 하나뿐이었다.
68p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달자의 머리카락이 허옜다. 그래도 믿을 만한 놈은 달자밖에 없다고 손영감은 말했다. 슬프게도 구암 바다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늙었다. 쓸 만한 칼잡이도, 쓸 만한 건달도, 쓸 만한 밀수업자나 중개업자도 모두가 늙었다.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같이 일했고 경찰의 협박이나 다른 지역 건달들의 유혹 때문에 배신을 한 적도 없었다. 정작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늙었다는 것 그 자체였다.
늙은 창녀처럼 늙은 건달도 갈 곳이 없다. 건달이 늙으면 겁이 많아지고 겁이 많아지면 일을 가리기 시작한다. 건달이 일을 가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똥파리들이 달라붙는다. 똥파리들이 소똥 위에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난 파리들이 소똥을 먹다가 급기야 소를 잡아먹는다, 우스갯소리 같겠지만 정말 그렇다. 이 바닥은 수고롭고 더러운 일을 하는 놈들이 주인이다. 그리고 수고롭고 더러운 일을 하는 놈들은 대체로 잃을 게 없는 놈들이다. 그놈들은 한 걸음 물러서면 두 걸음씩 치고 들어온다. 그런 놈들이 늙은 건달 따위를 겁내겠는가.
223p

희수가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고 탁자 위에 있는 소주잔을 비웠다. 이 구암 바다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바다가 뭣이 좋습니까. 소매치기에, 사기꾼에, 포주에, 창녀에, 양아치들하며,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기껏 화해시키려고 자리 마련하면 이야기 쪼매 하다가 결국 욕하고, 술판 뒤집고, 소주병 날아다니고, 대가리 깨지고, 울고, 그래놓고도 또 술 처마시면 서로 껴안으면서 사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지랄이나 하고 자빠지고. 영감님, 저는 마 요즘엔 신파가 딱 싫습니다." 희수가 농담처럼 말했다.
"나는 만난 싸우고 지지고 볶아서 이 바다가 좋다."
"취향 참 특이합니다."
"나는 이 구암 바다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계속 이런 촌스러운 모양새면 좋겠다."
414p

"영감님이야 돈 많으니까 이 바다가 좋지예. 다른 사람들은 빨아묵을 것도 없는 이 바다, 다들 미워합니다. 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붙어 있는 거라니까요."
희수 말에 손영감이 빙긋 웃었다.
"그건 니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이가 들어봐라. 만날 지지고 볶아도 미운 마누라가 황금보다 낫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바다를 못 떠나는 기라."
"에이, 설마. 미운 마누라 마누라보단 황금이 낫지예."
"미운 마누라가 낫다."
"확실합니까?"
"확실하다."
4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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