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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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한국작가 발굴 시리즈,

김사과는 블로그 지인이 좋아한다고 했다. 몇년 전 <미나>를 넘겨보다가 안 맞네 생각했는데.

<천국에서>라는 제목과 파격적인 표지에 끌려 읽어보았다.

좋으네. 연애하는 대상이 좋으면 '그냥 좋다'라는 게 정답인데 책도 그렇다.

주파수 같은 게 맞으냐-가 모든 걸 결정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추천해도 잘 안 읽어지는 작가가 있으니까.

 

케이라는 한국의 대학생 여자애가 뉴욕에서 지내다

한국에 돌아와 겪는 일상인데, 구성이 평범하지 않다.

전통적 서사 플롯을 벗어나, 주요 인물들의 부모 인생사를 요약적으로 들려준다든가. 작가의 관념적인 주장들이 끼어들기도 하고.

하지만 케이라는 인물의 문제의식-주로 한국과 그 윗세대에 대한-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머리를 꽝 치는, 강한 작품이었다.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처럼 청년 세대의 글로벌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그것보다 더 무거웠던 건

기존 세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적나라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구에 사는 통닭집 운영하는 지식인 꼰대라든가,

돈 많은 40대 그림 작가가 바에서 양주를 사며 케이에게 들이대는 모습이라든가.


그런데 한국 사회(뿐 아니라 현대의 세계)가 그렇게 닫혀 있고

과거의 좋았던 것들을 모방할 뿐이라면, 출구는, 천국은 정말 없는 것일까. 

 

극소수만이 중산층적 삶의 양식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가 없는 전략, 다시 말해 아무런 전략도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더 이상 미래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은 이미 완벽하게 일회용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파산한 삶을 외면한 채 값싼 즐거움으로 도피했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항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다시 나오는 순간까지, 여행의 모든 과정은 쇼핑과 동일하다. 여행자들은 한편으로 트렌드를 쫓으며, 한편으로 가장 독특한 것을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탐험할 것이, 어떤 새로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이미 발견되었고, 재발견되었다.
95p

왜 서울의 베이글은 이렇게 맛이 없어? 왜 서울의 커피는 이렇게 싱거워? 왜 우디 앨런의 새 영화가 개봉을 안하는 거야? 왜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웃는 대신 노려보지? 왜 서울에는 쎈트럴 파크 같은 게 없어? 왜 동네 공원에서는 재즈 공연 같은 걸 안 해? 왜 서울에는 스트랜드 같은 헌책방이 없어? 왜? 왜 서울은 이렇게 후진 거야? 그야 한국인들은 아무도 그런 데 관심이 없으니까. 뉴욕에선 말이야.
119p

물론 케이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이었다. 물론 평범한 인간에게도 미덕은 있다. 그를 통해 그가 속한 시대의 리얼리티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대 케이를 통해 이해 가능한 리얼리티는 몰락이라는 단어로 요약 가능했다. 이제 막 시작된 몰락기가 시대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아직 개인들의 정신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는 만성적 특성이 되었고, 그것이 케이와 같은 평범한 부류가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오인하게 된 진짜 원인이었다.
159p

"그게 벌이야."
"네?"
"그게 벌이라고, 순탄하게 사는 거. 가끔씩 엄청 지겨워하면서 바깥 쳐다보면서 아, 나가고 싶다. 근데 나갈 방법은 없고. 아니, 나가기는 무섭고. 그래서 평생 그……."
3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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