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는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새로운 세대의 표상 같은 존재였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간명하면서도 텅 빈 느낌의 쿨한 소설이었고

대중적인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는 사건이었다.

나는 <댄스댄스댄스>라든가 <해변의 카프카>를 거쳐 최근작 <1Q84>까지

장편소설들을 좋아하지만, 그의 필력은 에세이에서 더 빛나기도 한다.

 

이번에 나온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하루키 자신이 소설을 쓰는 방식을

오픈 소스로 풀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의 문체가 산뜻한 무국적의 번역투의 문체가 되었는지도,

꾸준히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장편소설을 쓰는 비결은 무엇인지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결을 안다고 해도, 따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은 소설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분석에서 괜히 위안을 받았고,

소설을 쓰고 남은 잉여 콘텐츠로 에세이를 슬렁슬렁 쓴다는 내용도 흥미로웠다.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는-혹은 스토리를 풀어간다는-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었던 형태와 거기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 사이의 ‘낙차’를 통해서. 그 낙차의 다이너미즘을 사다리처럼 이용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
20p

발상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기 위해 나는 원고지와 만년필을 일단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만년필과 원고지가 눈앞에 있으면 아무래도 자세가 ‘문학적’이 되어버럽니다. 그 대신 붙박이장에 넣어두었던 올리베티 영자 타자기를 꺼냈습니다. 그걸로 소설의 첫 부분을 시험 삼아 영어로 써보기로 했습니다. (중략)
내용을 가능한 한 심플한 단어로 바꾸고, 의도를 알기 쉽게 패러프레이즈 하고, 묘사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전체를 콤팩트한 형태로 만들어 한정된 용기에 넣는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몹시 조잡한 문장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해가며 문장을 써 내려가는 동안에 점점 내 나름의 문장 리듬 같은 것이 생겨났습니다.
49p




주변 인물들이나 어떤 일에 대해 사사삭 콤팩트하게 분석해서 ‘그건 이런 거야’ ‘저건 이러저러해’ ‘걔는 이러저러한 녀석이야’라는 식으로 단시간에 명확한 결론을 내놓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내 의견으로는 그렇다는 얘기인데) 소설가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인가 하면 평론가나 저널리스트가 더 적합하겠지요
120p

소설 쓰는 시기가 일단락되면 한 번도 연 적이 없는 서랍, 쓸 곳이 없었던 소재들이 꽤 많이 나와서 그런 것(말하자면 잉여물자)을 이용해 한 번에 몰아서 에세이를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에세이란 굳이 말하자면 맥주 회사가 출시한 캔 우롱차 같은 것, 이른바 부업입니다. 정말로 좋은 소재는 다음 소설=본업을 위해 챙겨둡니다. 그런 소재가 그득하게 모이면 ‘아, 소설 쓰고 싶네’라는 기분도 저절로 솟아납니다.
12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