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식사 - 국경 없는 식욕의 향연!
나카무라 가즈에 지음, 홍성민 옮김 / 작은씨앗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식과 요리에 대한 에세이라도, 저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책이 좋다.

그냥 음식에 대한 지식을 떠드는 것이라면 깊이가 있어야겠고

그보다는 인문학적, 문화점 담론들이 얽혀 있고 툭툭 튀어나오는 책이 좋다.

 

나카무라 가즈에의 <지상의 식사>는 그런 점에서 합격.

 

 

저자 소개를 보면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2014년 현재 메이지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정통 문학가이자

일본의 도쿄와 삿포로와 오사카, 러시아의 모스크바, 호주의 멜버른, 영국의 런던 등 여러 특색 있는 도시들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경험들이 잘 녹아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대구부터 빵나무, 통조림의 유래까지 역사와 국경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재료들이 가득하고

재기발랄한 문체도 마음에 든다. 일본인이지만, 세계를 떠도는 무국적자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비슷한 계열의, 일본 저자 책으로 <맛없어?>와 <차별받은 식탁>이 있는데

전자의 장난스러움과 후자의 진지함 사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다.

 

 

김은 우선 뜨거운 열이고, 실제로는 물이다. 아지랑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희미한 증발물로, 무서운 독일 때도 있지만 내 눈에는 한가롭고 행복하게만 보인다. 갑자기 종적을 감춘 사람이 돌아올 기미가 없을 때 ‘누구누구가 증발했다’고 말한다. 실종이나 행방불명과 달리 증발은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고 여긴다. 행방은 모르지만 분명 어딘가에 있다. 본인의 의사로 종적을 감췄을 뿐 마법처럼 사라진 것은 아니다. 휘리릭.
어릴 적부터 증발은 꿈꿨던 나는 세계 각지의 여행기와 탐험기, 조난과 표류, 부랑자나 망명자, 슈바이처 박사와 로빈슨 크루소 등의 이야기를 ‘증발 입문서’로서 즐겨 읽고 들었다. 7p

카리브 해에 떠 있는 섬 출신 작가들 가운데 섬에 계속 남아있는 사람은 얼(Earl Lovelace) 정도다. 나머지는 모두 이 고요한 바다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반세기 동안 이 섬에 살며 글을 쓰고 있다.
"당신 말은 알겠어요. 그래서 나는 포트오브스페인에서는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하죠. 가령 나는 오늘은 생선을 사요. 그 외의 일은 생각하지 않아요. 생선을 사러 그 가게에 간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죠."
오늘은 대학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복사하고, 국립고문서관에서 신문을 확인하고, 우체국에 가서, 하는 식이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 안달하고,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 하나하나에 시간이 걸리는 것에 질려 하는 내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44p

당신이 선보인 요리는 역시 고민한 흔적이 있는, 지역의 식재료를 이용해 정중히 조리된 것들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박력이 부족하다. 열대의 밤에 땀범벅이 되어 모기에 물려가면서도 한 그릇 더 먹고 싶어지는 그런 자극성이 부족하다. 프랑스 요리법과 보르도 와인이 어디서든 늘 보편적으로 맛있을 거라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 위장은 생생한 현재의 상태에 반응해 순간순간 변화하는 현상, 유전(流轉)하는 불이며 김이다. 즉, 더운 곳에서는 더운 곳에 맞는 밥상이 있지 않느냐는 얘기다. 그게 전부다. 69p

흥미로운 것은 학술계에서 이런 논쟁의 중심은 여전히 서양인 학자라는 점이다. 세계는 아직 백인이 물주 역할을 하는 게임이다. 아마 학문의 세계는 그 ‘전통’을 가장 고집하는 영역일지 모른다. 그래도 예전 같지는 않다. 50년이 지나면 더욱 달라진 경관이 나타날 것이다. 105p

동생은 나를 보며 언니는 차를 끓인다면서 주전자를 올려놓은 난로 앞에서 책 읽는 것 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동물도감 속의 나무늘보 같은데, 음식 앞에서는 민첩하게 움직이니 놀랍다고 감탄했다. 게으름벵이에다 슈바이처 포지티브인 나는 하루 종일 난로 앞에서 몸을 움츠린 채 세상을 비관하며 어디론가 탈출을 꿈꿨다. 최소한의 짐 가방을 들고 어느 날 혼자 어딘가로 떠난다. 무얼 갖고 갈까. 늘 그 가방을 생각했다. 지금도 짐 꾸리기, 특히 짐 목록 쓰기를 좋아한다. 짐만 꾸릴 수 있으면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만족이다. 16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