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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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은 한강의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이지만.

권여선의 "이모"와 황정은의 "웃는 남자"를 읽기 위해 구입한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두 작품 모두 큰 울림이 있었고, 좋아하는 작가의 좋아하는 취향이어서 좋았다.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과 그 고독을 택한 사연과 그들의 단촐한 삶을 들여다보며,

인생이 늘 이렇게 남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관대한 세상이 되었으면 하며.

 

 

 

 

담배는 하루에 네 개비만 피우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 점심 먹고 둘, 저녁 먹고 셋, 잠자기 전에 마지막 담배를 피운다. 술은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밤에 소주 한 병 정도를 마신다. 그날은 다소 사치스러운 안주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고 이모는 말했다.
"예전에는 거의 요리를 안 했다. 하더라도 대충 만들어서 맛도 모르고 급하게 먹었지."
그러다 혼자 살면서부터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요리를 할 때 그녀는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함을 느낀다. 요리는 불과 물과 재료에만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요리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요리가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똑 같은 요리를 반복해도 결코 똑 같은 맛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실망시키기는커녕 더욱 매혹시킨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요리하며 일인분의 음식을 만드는 데도 정성을 다한다. 일인분이라고 아무렇게나 만들면 더 맛이 없다.
163p

그녀는 서둘러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벨소리는 멎어 있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반찬가게에서 사온 돌게장을 꺼내놓고 술을 마셨다. 조금씩 술이 오르면서 그녀는 세운 무릎 위에 손을 엊갈려 얹고 그 위에 턱을 고인 웅크린 자세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179p

한때는 수첩이나 메모지에 ‘나는’이라는 글자를 쓸 때마다 자신이 앉은뱅이가 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공포 때문에 한동안 ‘나는’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심지어 발음도 하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기억들은,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젊은 날의 일일 것이다.
180p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컴컴한 모퉁이에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나를, 나는 왜 이해할 수 없는가.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복잡한 맥락을 무시한 채 편리하고도 단순하게 그것을, 혹은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무신경한 자백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387p

암굴 같은 곳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곳은 암굴이다. 암굴이나 다름없다. 나는 여기서 매일, 단순해지자고 생각한다. 매일 조금씩 더 단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고 먹고 싸고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을 하고 있을 뿐이다. 잠이 오면 자고, 잠에서 깨면 내 자리에 앉아 생각한다. 먹는 것도 단순하게, 조리를 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을 먹는다. 불을 사용해 조리한 음식은 뜨겁고, 뜨거운 것은 맨손으로 쥘 수 없어 접시와 식기를 사용해야 하고, 다 먹고 난 뒤엔 버리거나 닦아야 할 것이 남으므로 좋지 않다. 단순하고 간단한 게 좋다. 나는 날고기를 먹지 못해 생곡을 먹는다.
392p

디디는 잘 먹고 잘 지내다가도 이따금 엉뚱한 것을 골똘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그 생각에서 한참 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다. 여름에 넓은 나뭇잎을 줍게 되면 잎맥을 절묘하게 잘라내 숲을 만든 뒤 내게 보여주었다. 작은 것 속에 큰 게 있어. 나는 그런 것이 다 좋았다. 디디가 그런 것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좋았다.
394p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4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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