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에쿠니 가오리는 안심하고 고르는 작가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는 안도감.

이번에 읽으면서는 특히 슬픔의 정조를 많이 느꼈다.

유쾌한 대화가 오가는데도 뭔가 아련하고 슬픔이 감돈다.

그 이유는 그 세계 안의 인물들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상실감을 가지고 살기 때문인 듯하다.

다들 어딘가 다른 점을 갖고 있다. 어떤 종류의 예민함이라든가, 남다른 가정사라든가,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든가.

 

 

9월에 출간된 장편소설,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은 600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이다.

몇 세대에 걸친 대가족 구성원들의 면면을, 연도를 오가며 묘사하고 있다. 1963년부터 2006년 사이를.

게다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바뀌는 장의 첫 부분에서 주인공이 누구지 갸우뚱거리게 된다.

 

러시아 출신의 할머니 기누, 그녀는 런던에서 만난 다케지로씨와 결혼해 일본에 산다.

그녀가 낳은 자녀들과 그 자녀들이 낳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 이야기다.

오래된 서양식 저택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자라나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제각각 타고난 것들대로 살아가는. 말하자면 사회규범 일반에 길들여지지 않은 인물이 잔뜩 등장한다.

이게 진짜 인생이지,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소설 속 여러 인물들 중에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을 더할 것인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어떤 장은 더 흥미롭고 어떤 장은 덜 흥미로운 이유.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답게 다양한 음식과 홍차가 등장하고, 러시아 음식들도 소개된다.

'라이스에는 소금을'이라니 무슨 말이지? 했는데 읽다보면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소담출판사에서 계속 책이 나오다보니, 책의 분위기가 한결같다.

그것 역시 좋은 점.

 

연휴 동안 아이들보다 먼저 일어난 새벽 같은 시간에 읽기에 적절했던 책.

잘 읽었습니다. 

내게 초등학교라는 곳은 요컨대 지독하게 비위생적이고, 소란스럽고, 유치하고, 난폭한 데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장소였다. 36p

"마침 그때 네덜란드의 어느 마을에서는 한 남자가 교수형을 앞두고 있었어."라고 한다. 일은 여기저기에서 한번에 일어난다. 점과 점을 세로로 연결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인 듯하다. 그리고 세로로 이어진 점과 점은 물론 가로로 흘러간다. 엄청난 기세로, 절대적으로 어느 누구도 멈추지 못한다. 54p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간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예쁜 포트에 담긴 홍차와 커피, 생크림을 올린 프루트펀치 같은 것이 사람 수만큼, 커다란 접시에 빼곡히 놓인 작은 팬케이크 비슷한 것, 작은 그릇에 담긴 캐비아, 그 밖에 페이스트 상태의 먹거리가 세 종류. "맛있겠다." 약혼자가 말한다. 순식간에 각자 원하는 취향대로 커피 또는 홍차를 고르고-혹은 의견을 묻고-, 찻잔마다 김과 향기가 피어오르는 액체로 채워졌다. 76p

학교 생활이 내 안의 중요한 요소-잘됐든 못됐든 형성돼버린 나라는 인간-를 하루하루 닳아 없앴다. 그 또렷한 감각에 나는 초조했다. 곧바로 나는 고립됐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일인 동시에 그들이 선택한 일이기도 했다. 106p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 놀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이 집 식구들에게는 도통 책 읽는 습관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건 아, 지금 생각해도 몸이 다 떨린다. 나는 그런 집에 시집와버린 것이다. 195p

이 집에서는 아무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와인도 맥주도 일본주도 보드카도 없는 식탁! 대화가 없는 식탁! 나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211p


책을 읽는 동안 리쿠코 누나는 그곳에 있으면서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책이 싫다. 264p


공기에 든 흰쌀밥은 그대로도 맛있어 보이는데 접시에 담긴 밥에는 왜 그런지 소금을 치고 싶어진다. 우리 셋 다 그렇다. 하지만 예의없어 보이고 소금을 과잉 섭취하게 된다는 이유로 어릴 적에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 다행이다, 자유 만세`라는 의미다. 291p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몇 가지를 배웠다. 세상은 책 속과 비슷하다는 것이 그중 하나인데 이 발견은 그야말로 내 인생이 뒤집힐 만한 대사건이었다. 일찍이 나는 책 속이라면 안심이지만 책 바깥은 불안하다고 여겼다. 책 속의 일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책 바깥의 일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책 바깥도 책 속과 똑같다. 여러 다양한 사람이 있고 다양한 사정이 있다. 5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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