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의 기억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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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2014년 9월 국내 출간 <등 뒤의 기억>

원제는 "ちょうちんそで, 불룩 소매"라고 한다.

 

 

히나코는 노령자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다.

그녀는 가공의 여동생과 대화를 나누고, 찾아오는 이라곤 옆집 노인 단노씨 정도가 다다.

가끔 차를 마시고, 매일 밤 와인을 마신다. 젊은 시절 즐겨 마시던 보르도가 아닌 브루고뉴 스타일 와인을.

그녀는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말하자면 기억들을 층층이 쌓아가며

히나코와 그 주변 인물들의 관점에서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 소설이다.

 

이 책에서 히나코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 도입부에 등장한 밀크티 에피소드.

비스킷의 종류부터 세심하게 골라 두 딸과 함께 밀크 티에 적셔 먹는 엄마라니, 나의 이상형일지도.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학교 인부 딸이던 조숙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 손에 끌려 집에 갔더니 인스턴트 커피를 스테인레스대접에 한가득 끓여주었다.

"어른들만 먹는 거야"라고 말해주어 뭔가 금단에 속하는 느낌이던 달달한 커피의 기억.

우리 세대는 기껏해야 커피에 에이스 크래커를 찍어 먹었다.

립톤 홍차나 블랙 커피를 접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제대로 밀크티를 끓여서 마시게 된 것도 몇 년 전 홍차에 취미를 가지면서다.

그때는 잘도 모르면서 온갖 나라의 차들을 구해 마시고 의무처럼 시음기를 썼다.

지금은 한발 떨어져서 그냥 가끔 차를 맛있게 타서 마신다. 취향에 맞게 즐긴다. 그것뿐.

밀크티는 뜨겁게 끓인 물에 잎차(아쌈이 좋음)를 우리고,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반쯤 섞는 것이 가장 맛있다.

개인적으로 비스킷은 밀크티보다는, 커피나 스트레이트 홍차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책 속의 히나코의 기억에 나오는 것처럼 사춘기 정도의 여자아이라면,

밀크티에 비스킷- 달달하고 부드러운 느낌도 나쁘지 않을 것.

홍차 입문으로는 딱이 아닌가.

 

 

 

에쿠니 가오리 책들은 소담 출판사에서 나오기 때문에 장정이나 책 디자인이 일관성 있다.

사이즈도 같아서 쭉 모아서 꽂아놓으면 흐뭇하다.

이번 책은 디자인이 깔끔, 담백한 편이다. 특히 속표지, 하얀 배경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한 제목이 박혀 있다.

마치 흐린 기억들처럼.

 

 


 

 

 

옆집 남자가 찾아왔을 때, 히나코는 가공의 여동생과 차를 마시면서 6번가의 추억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자매는 밀크 티에 비스킷을 적셔서 먹고 있었다. 그녀들의 어머니가 곧잘 그렇게 먹곤 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먹을 때는 비스킷이 `마리`가 아니라 꼭 `초이스`여야 한다고 했다.

마리처럼 딱딱한 비스킷은 그나마 괜찮지만, 초이스처럼 부드러운 것은 자칫 차를 너무 머금으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끊어지고 만다.
톡, 아니면 툭. 끊어진 그것은 찻잔 속이나 테이블 위 또는 무릎 위에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게 비참한 모습으로.
하기야 히나코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다. 톡, 아니면 툭. 찰랑, 아니면 철렁. 그렇게 떨어지는 것은 언제나 히나코의 초이스뿐이다.
오늘도 그랬다. 가공의 여동생은 웃었다. "아하하하하하. 또 떨어뜨렸어? 언니도 참"이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푹 젖을 때까지 적시는지 모르겠네. 엄마가 그랬잖아. 살짝 담그기만 하면 된다고."
히나코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비스킷을 푹 적시고 마는 것은, 밀크 티를 듬뿍 머금는 편이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욕심이 많아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히나코는 지금 밀크 티를 마시고 있지 않다. 밤에는 언제나 큰 잔으로 두세 잔씩 와인을 마신다. 오늘은 레드 와인을 마시고 있다. 히나코가 요즘 즐겨 마시는 것은 타닌 맛이 강하지 않고 색이 맑은 와인이다. 젊은 시절에는 중후한 와인을 좋아했다. 텁텁하고 달고, 흙냄새가 나는 짙은 색 와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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