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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작가 중 가장 귀히 여기는 권여선 작가의 장편소설 <토우의 집>이 출간되었다.
삼벌레고개 중턱 마을에 사는 금철,은철네 집. 그 집에 세들어 사는 영, 원네 집 이야기.
그 아이들과 부모들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일곱살 은철과 원이 스파이 동맹을 맺으며 동네 어른들을 관찰하고 들려주는 이야기.
누군가는 어디에 끌려가면 죽도록 맞고 고문당하고 죽임당하던, 수상한 시절 이야기다.
그동안 어른들(주로 지식인)의 세계를 밀도 있게 담았던 다른 소설들과 달리, 이번에는 분위기가 이채롭다.
소설 속 화자의 시점이 어린아이에 맞춰져 있어서 그런 것도 같고
약간은 풍자적인 어조가 스며들어서도 같다.
발칙한 여자아이를 세상에 선보였던 은희경 <새의 선물>을 떠올리게도 하고
풍자적인 화법은 성석제를, 또 70~80년대 달동네 배경이라는 점은 송시우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생각나게 만든다.
권여선 소설은 읽는 중간중간 '잘 쓴다'고 감탄하게 만들고, 실제로 문장이 착착 감긴다.
웃다가 울다가 막 그랬고, 이야기가 가슴을 울리고, 마지막 작가의 말도 마음에 남는다.
"처음, 나는 그들의 고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것을 어루만져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뭔가를 먹는 것, 이를테면 소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략)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늘 실패하고 정지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 어린 고통이 세상의 커다란 고통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의 온기를 위해 이제껏 글을 써왔다는 걸."
-333~334p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1201/pimg_7830141331110854.jpg)
이번 작품은 자음과모음에서 출간되었는데 그동안 창비,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여러 곳에서 책이 나왔었다.
자음과모음은 문학동네의 자회사 비슷한 거라고 알고 있어서 뭐 연관이 아주 없지는 않다.
인터넷서점에서 지금 보니, 작가의 2004년 단편집 <처녀치마>를 못 구해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자음과모음에서 복간되었다.
오, 좋은 소식.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1201/pimg_7830141331110855.jpg)
납작한 냄비 두 개가 그들 앞에 놓였다. 냄비에 담긴 국물 한가운데 얇은 흰자막에 싸인 익은 계란이 있었다. 오뎅과 김 가루와 파가 동동 뜬 사이로 반투명한 국수 다발이 보였다. 새댁이 고춧가루를 조금 뿌려줄까 물었지만 원은 고개를 저었다. 새댁은 자기 냄비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딸의 냄비에서 다시마와 푸른 쑥갓을 건져간 대신 자기 냄비에 들어 있던 오뎅을 건져주었다. 원은 계란 노른자가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국수를 저어 먹기 시작했다. "맛나니?" "네, 어머니." 잠시 후에 원이 물었다. "어머니는요?" "나도 맛나다." 그들 모녀는 묵묵히 먹기만 하는 걸 견딜 수 없다는 듯 한입 먹고 서로를 힐끔 보고 또 한입 먹고 힐끔 보았다. "국물이 제법 뜨겁다, 원아. 입천장 데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네, 어머니." "계란이 잘긴 해도 온거다. 안 그러니?" "네 온거! 온거예요. 흐트러지지 않은 온거예요, 어머니." -105~106p
월남 고아라 친정도 친척도 없는 새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효자 효녀 얘기를 알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은철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옛날 부모들이 무섭게 먹을 걸 밝혔다는 점이었다. 한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 하고, 가을에 앵두가 먹고 싶다 하고, 고기가 먹고 싶다, 흰쌀밥이 먹고 싶다, 식탐이 한도 끝도 없었다. -138p
순분은 두 아이를 안고 눈물을 훔치면서 원이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생각했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다고 했지. 눌은 놈 덜 된 놈 찔깃한 놈 보들한 놈. 순분은 그게 마치 사내들에 대한 형용 같다고 생각했다. -276p
먼 동네로 이사 가면 순분은 다시 계원을 모아 계 오야를 하고 집을 빈틈없이 세놓아 먹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다발을 찹찹 소리를 내며 셀 생각을 하자 기운이 번쩍 났다. (중략) 이제 먹을 사람도 없으니 장독대에 있는 새댁네 매실주도 한 주전자 퍼다가 남편도 한 잔 주고 자기도 한 잔 얻어먹어야겠다. 사형도 당하지 않고 매일 나가서 꼬박꼬박 돈을 벌어 오는 남편이란 가족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녁 내내 순분은 자꾸 새댁이 아니라 새댁 남편 생각이 났다. 부러웠나. 모르겠다. 사형을 당할 값에 아내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남편이란, 여자로 치면 영원한 새댁이 아닌가. -323~3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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