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틈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구판절판


잠을 잘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나는 침대 밑으로 손을 뻗어 방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책 중에서 하나를 집는다. 나는 모로 누워 책을 읽기 시작한다. 베개에선 절어들은 머릿내가 나고 이불의 위쪽은 누르스름하고 끈끈하다. 이렇게 턱과 목에 닿는 면이 더 때가 타 있어서 이불의 위아래를 분간하기는 안팎을 분간하는 것만큼 쉽다. 이 모든 익숙한 느낌을 상쾌하게 받아들이면서 나는 잠자리에 든다. 몹쓸 병을 얻어 조강지처의 품에 안주하게 된 바람둥이 서방처럼 죄스러우면서도 일견 만족한 몸짓으로 나는 침대를 누비며 책을 읽는다. 그럴 때면 졸음에 겨운 또하나의 나는 몸을 가장 조그맣고 둥글게 만들어 책 읽는 내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애쓴다. 매일 밤 둥지 속에 든 두 개의 알처럼 잠자는 나와 책 읽는 나, 죄의식과 만족감이 한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른다.-12쪽

호수 위에 걸린 구름다리의 하늘빛이 참 촌스럽다 생각하며 종태를 바라본 순간 그는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내가 이후에도 두고두고 설렘 없이는 회상할 수 없었던 미숙한 남자들 특유의 말투,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런 망설임을 기어이 떨쳐버리고 마는, 어리숙한 듯하면서 다감한 말투로 그는 내게 권유했다.
"너도 같이 가자, 전에 소주 한번 마셔보고 싶댔잖아?"
종태와 내가 동급생들이 모인 잔디동산으로 올라갔을 때 명호는 다짜고짜 나를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했다.
"야, 손미옥! 내가 오라며 빨리 와야 될 거 아니야?"
"왔잖아!"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그때 이미 나는 '명호네'에게 온 게 아니라 '종태네'에게 온 것이었다. 종태가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부터 그 집단을 식별하게 해주는 표지는 차종태로 바뀌었다. 밀란 쿤데라 식으로 말해서 명호로부터 날아온 우연의 새가 내 오른쪽 어깨에 내려앉았다면 종태가 띄워보냈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우연의 새는 내 왼쪽 어깨에 날아들었다. 온통 잡새 천지인 교정에서 내 이름의 양 어깨에 내려앉아준 그리운 우연의 새들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37쪽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단발머리를 나풀대며 교정을 활보하던 신입생 시절, 대학은 연애의 궁전처럼 보였다. 성에 대한 각양각색의 입장들이 난무했다. 그때 나의 입장이란 애정에 기갈 들린 계집애의 약삭빠름이었다. 누군가 내게 어떤 마음을 건네면 나는 그것을 허겁지겁 '사랑', 아니 차라리 '오묘한 호감'의 목록표에 기입했다. (중략)
나는 모든 우연을 필연화했다. 내가 채집한 어떤 정보도 새로운 사랑이 다가오는 징조였다. 나는 이런 표시와 저런 표시의 차이를 몰랐고 이렇게든 저렇게든 호감으로 치장한 이미지, 나를 인정해준다는 것이 명백하게 조합되어 나타나는 그 이미지를 향해 질주했다.
수많은 디테일이 차곡차곡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고 종합되는 열정적 사랑이 아니라, 그것과 정반대로, 그렇게 표나는 유일무이성을 참을 수 없어하는 내 마음의 알리바바는 만나는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건네받는 족족 그 정표에 동일한 표시를 하여 사랑이란 보물을 갈구하는 내 마음의 도적떼를 혼란시켰다. 과연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아내려 애쓰는 마흔 명의 도둑들은 똑같은 표시로만 이루어진 감정의 목록표를 둘러싸고 갑론을박했다.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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