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여사는 킬러
강지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잘 쓴 소설을 읽을 때는 흥이 절로 난다. 이 책이 그러했다. <단편집 굿바이 파라다이스>에서 한국적 스릴러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신문물 검역소>에서는 새로운 소재와 스릴러를 엮는 능력을 보여준 작가 강지영, 이번에는  더 발전된 장편 스릴러로 돌아왔다. 

이 책은 심은옥이라는 평범한 아줌마가 칼을 잡게 된 사연, 그 칼을 들고 킬러가 된 사연에서 시작한다. 웃기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전부 정상이 아니라는 점. 심여사가 취직한 스마일흥신소의 사장 박태상, 직원 최준기, 경쟁업체 해피기획의 나한철, 그녀의 와이프 홍미숙, 박태상이 주워다 키웠지만 자살한 여자애, 박태상의 옛 연인... 하나같이 정말 골-때-리-는 인생들이다. 책의 목차가 이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 각자의 인생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읽으면서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연에 공감하며,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참 파란만장할 거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엄마들이 딸들에게 그런 말 하곤 한다. 약간 욕심낸 듯한, 작위적인 듯한 이야기도 섞여 있었지만 쓰다보면 그럴 법도 하다 싶다. 정말 처절한 아줌마 킬러 이야기,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의 코믹 버전 쯤으로도 읽혀진다.

작가는 젊은 나이에 궁상맞은 인생사를 어쩜 노인네처럼 빠삭하게 꿰고 있는 것인지? 게다가 그걸 담는 그릇인 문장력이나 스토리 구성력도 나무랄 데 없다. 현실적인 인생 이야기를 스릴러로 풀어내되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중심 잡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심은옥] 예봉중학교 졸업. 학력난에 쓸 것이 바닥났다. 1999~2003년 정육점 운영. 경력난에 쓸 것도 바닥났다. (중략) 이력서는 끝내 두 둘로 끝이 났다. 학창시절 붓펜으로 장난삼아 그리던 난초나 대나무로 빈자리를 메울까 하다가 조기치매 소리라도 들을까 겁이 나 그만두었다. 나는 슈퍼에서 카스텔라 한 덩이와 흰 우유를 사먹고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쇼핑백 안에 든 칼들이 서로의 몸에 부대끼며 찰캉찰캉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나를 수상한 아줌마로 바라보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사람들은 얼결에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은 표정으로 제 갈 길을 걷고 있었다. 인생의 끄트머리에 내몰린,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아줌마에게 누가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12p

 
   
   
  [박태상] 나는 사장이 되고 싶었다. (중략) 요컨대 배가 부르다는 건 사람을 선하게 하는 기본 요건 중 으뜸이다. 범좌자의 상당수는 배가 고픈 자들이고, 그들의 열패감이 악의 씨를 싹 틔웠다. 악의 씨가 간혹 부자들의 주머니에 흘러들어갈 때도 있지만 뿌리를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부자들은 보통 여러 벌의 외투를 가지고 있고 한 번 입은 옷은 반드시 드라이클리닝을 했으므로 악의 씨앗은 자연히 더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의 꿉꿉한 주머니를 찾아가 움틀 수밖에 없었다.  -31p  
   
   
  [박현석] 교사에게 학생이란 대단한 노력 없이도 성난 이빨과 풀 몇 포기만 있으면 다루기 쉬운 한 무리의 양떼 같은 존재였다. 품과 길이가 어이 없이 큰 교복을 걸쳐 입고 새카만 조약돌처럼 반들거리는 까까머리로 온종일 무언가를 읽고 외우고 풀어내거나, 틈만 나면 식어빠진 튀김 따위를 입에 우겨넣는 군청색 양들에게는 저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하지만 교사들이 제아무리 잘나봐야 그들 역시 양떼를 지키는 멍청한 목양견에 불과했다. 종이 울리면 벤치에 모여 앉아 인스턴트커피를 홀짝이며 담배나 뻐끔거리다 다시 종이 울리면 자신들의 양떼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빈자리가 있는지, 졸거나 시건방지거나 되바라진 녀석이 숨어 있는 건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2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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