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최윤아 지음 / 마음의숲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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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지금처럼 환대를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는 기자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저자의 에세이다. 돈을 벌 때와 다르게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 살면서 은근히 시댁의 눈치를 더 보게 되고 가사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 그러면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글쓰기라는 제 2의 잡을 만들어나가는 82년생 세대의 이야기다. 제목을 보고 끌렸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책의 완성도는 오락가락 하는 느낌이다. 발랄한 일상 에세이로 읽기는 재미가 부족하고, 철학서로 읽기에는 깊이가 부족하다. 저자만의 특수한 일상을 늘어놓는 느낌도 들고, 아이를 키우지 않는 전업주부로서의 외침에는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다. 제목을 잘 지었다. 요즘 단행본 시장은 제목 전쟁인 듯.  

 

가사 노동의 흔적은 시간과 함께 증발한다. 기껏 낑낑대며 온 집안에 청소기를 돌려도 창문 몇 시간 열어두면 다시 원점이다. 가사 노동의 흔적은 예외 없이 가족의 흔적에 덮인다. 가사 노동의 꽃, 요리도 예외는 아니다.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인터넷 상 수만 가지 레시피 중 가장 믿음직스런 하나를 고르고, 재료를 손질하고, 볶고 찌고 데우고... 이 복잡다단한 단계를 거친 결과물은 가족의 젓가락질 몇 번이면 사라진다. 더 지독한 건 끼니때가 오면 이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메뉴를 정하는 건 생각보다 난이도 있는 작업이다. 어릴 때 저녁마다 뭐 먹고 싶냐고 묻던 엄마에게 ‘또 그 질문이냐‘며 핀잔을 주곤 했었는데, 주부가 되고서야 엄마의 고충이 이해가 갔다.
76p

그래서 나는 가사 노동을 대충한다. 그게 가사 노동의 휘발 속도를 늦춰주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은 안 해야 그 존재가 드러난다. 단 며칠만 하지 않아도 집안은 불결하고, 불편해진다. 당연하게만 여기던 집안 상태가 주부의 가사 노동으로 유지된 거였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그제야 증명된다. 그렇기에 가사 노동을 대하는 가장 적절한 태도는 완벽주의가 아니라 ‘적당주의‘다. 적당히 설렁설렁해야 내 노동이 귀한 줄 안다. 조직에서나 가정에서나 ‘일한 티‘를 내야 대접받는다는 게 조금 서글프지만 말이다.
79p

경제활동을 중단한 내가 가계에 보탬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아끼는 것‘ 뿐이다. 돈을 아끼려면 시간을 써야 하고, 시간을 아끼려면 돈을 써야 한다. 직장에 메어 있지 않은 나의 경우 시간은 풍족했지만 돈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돈 대신 시간을 썼다. 시간은 내게 허락된 유일한 자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전업주부는 시간 부족에 허덕인다. 돈 대신 시간 자본을 쓰려 하기 때문이다.
1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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