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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N22074
˝용기와 명예와 긍지와 연민, 그리고 정의와 자율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움직인단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가 된단다. 이제는 알겠니?˝
땅이라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이 소유하는게 맞는 걸까? 인간이 인간을 소유한다는게 맞는 걸까? 윌리엄 포크너의 <곰>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고 있다.
작품명이자 이 책의 핵심 소재는 ‘곰(Bear)‘ 이다.(정직한 제목 정직한 내용) 곰은 사냥터(자연)를 지키는 상징으로 등장하고, 이 곰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펼처진다.
1. 아이작
이 책의 주인공. 십대 소년인 그는 막대한 부를 상속받을 수 있는 백인으로, 어린 시절 부터 사냥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변 어른들과 자기 집안의 하인(노예)들과 함께 매년 사냥터를 드나들게 되고, 그들과 함께 숲의 수호신이자 가장 위협적인 올드벤(곰의 이름)을 사냥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이작에게 있어서 올드벤은 단순한 사냥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열망하지만 나서지 못하는 느낌, 의심이나 공포는 없지만, 시간을 초월한 숲을 보며 스스로 얼마나 약하고 무력한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느껴지는 비참함이었다.] P.21
오히려 아이작이 사냥터로 나서는 이유는 곰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곰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사냥하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모습, 오히려 자신을 방패로 다른 동물들을 지키려고 하는 올드벤의 모습을 보고 아이작은 오히려 올드벤에게서 신성함을 느낀다.
[그들이 매년 11월만 되면 사냥을 나가면서도 실제로 곰을 죽이겠다는 의도 따위가 전혀 없었던 것은, 그 곰이 죽지 않는 존재라서가 아니라 지금껏 곰을 정말 죽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아서였음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P.21
그는 올드벤을 먼발치에서 만났지만 감히 총을 쏘겠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총에 맞아도 안죽을 정도로 큰 곰이긴 하지만...)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채 올드벤을 만나기 위해 숲에 혼자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을때도 그를 도와준건 올드벤이었다. 아이작에게는 더이상 사냥이라는 것은 더이상의 살육이 아니었다. 아이작에게 올드벤은 지키고 싶은 자연이자 스승 그 자체였다.
[˝무서워하는 건 괜찮아. 그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두려워하면 안 돼. 숲속 동물이 너 해치는 경우는 네가 그놈을 몰아붙일 때, 그리고 그놈이 네 두려움을 냄새 맡을 때 말고는 없어. 무서워하는 건 곰도 사슴도 겁쟁이 무서워할 수 있어. 용감한 사람이 겁쟁이 무서워하는 것과 똑같아.˝] P.29
2. 샘 파더스
이런 아이작에게 사냥의 의미를, 올드벤에 대한 동경을 심어준게 샘 파더스다. 샘 파더스는 혼혈 출신으로 아이작 보다는 계급적으로 낮지만 그는 아이작의 스승과 같은 인물이었다. 세속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남자였다.
[˝길들이고 싶지 않아요.˝ 샘이 말했다. 또 한번 소년은 그의 콧구멍의 떨림과 맹렬한 눈에 감도는 희부연 빛을 보았다. ˝나는, 저 개, 나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무엇 두려워하는 것보다 길들여지는 게 차라리 낫지만, 둘 다 아닐 거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요.˝] P.45
샘파더스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올드벤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아이작은 자신의 상속 재산도 포기하고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자연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과거 자신의 조상이 착취하고 함부러 대했던 흑인 노예들에게 죄책감을 짊어지면서 말이다.
[˝그렇습니다. 제가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요. 애초에 제 것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거부합니까? 애초에 아버지의 것도, 버디 삼촌의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제게 물려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제가 거부할 수도 없지요. 게다가 이 땅은 할아버지의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아버지와 삼촌에게, 그리고 제게 상속될수 없으니 또한 거부할 수도 없지요.˝] P.102
신기한건 샘파더스의 죽음이었다. 그는 올드벤을 사냥하기 위해 라이언이라는 개를 자신이 선택해서 키웠고, 결국 라이언의 희생으로 사냥꾼 무리는 속마음은 아닐지라도 겉으로는 그토록 사냥하고 싶어했던 올드벤을 죽이게 된다. 하지만 올드벤이 죽는 순간 샘파더스도 갑자기 툭 쓰려지고 급사한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자연, 올드벤이라는 곰이 죽은 충격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샘파더스 자신이 올드벤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하고 푸르스름한 개 라이언은 가끔씩 눈을 뜨고 잠시 동안 숲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숲을 기억에 담아두기 위해, 아니면 숲이 아직도 거기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떴다가 다시 감는 것 같았다. 해가 질 무렵, 라이언은 죽었다.] P.89
그런데 그는 왜 올드벤을 잡기 위해 라이언이라는 한마리 광폭한 사냥개를 키웠던 걸까? 가장 미스테리한 부분이다. 그렇게 올드벤이 죽은 후 매년 모이던 사냥꾼 모임은 흐지부지 된다. 수호신이었던 곰 올드벤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을까? 더이상 숲을 지키는 수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샘파더스는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율과 방종이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통해서 배우는 지혜조차 뛰어넘는 다른 종류의 어떤 지혜가 필요한가보다.] P.148
3. 올드벤이 사라지고 난 후
2년의 시간이 지난 후 사냥터에는 제재회사가 들어오고 이제 과거의 사냥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작은 과거의 추억을 갖고서 그곳을 방문한다. 그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그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곳, 그의 종교와도 같은 올드벤이 살고 죽었던 그곳.
[그것은 늙은 곰의 이야기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맹렬하고 무자비했을 뿐만 아니라 자율과 자유에 대한 맹렬한 긍지로 인해 또한 무자비했던 곰이었다. 자율과 자유를 지키려는 투철한 의지와 긍지를 지닌 그 곰은 그것이 위협받는 모습을 공포나 경계심이 아니라 희열을 느끼며 지켜보았고, 그것을 더 잘 음미하기 위해 일부러 위험에 빠뜨렸으며,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늙고 단단한 제 뼈와 육신을 유연하고 날렵하게 유지했다.] P.155
아이작은 샘파더스의 무덤도, 라이언의 무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걸 알게 된다. 하지만 굳이 찾아보지는 않는다. 찾지 않더라도 그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걸, 지금도 있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작은 아직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연의 이치를 마주하게 된다.
[그 짧고 실체 없는 영광,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속이 불가능하므로 영광이라 할 수도 없는 그 순간을 누리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영광이 사라져도 기억은 남아 있을 것이니, 살과 살을 맞대고 함께할 수 없는 시간이 오더라도 그 순간의 추억만은 간직할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숲이 정부요. 아내일 것이었다.] P.200
마치 숲(올드벤)이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은 가장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고, 자연 앞에서는 단지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라고, 인간이 다른 인간의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파괴하는 거라고, 좀 더 겸손해지라고.
<곰>은 단순히 곰 사냥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많은 생각을 했다. 이래서 명작이라고 하나보다. 두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고 세번 이상 읽고 싶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