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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 살 수 없다. 누군가에게 버려졌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단 한명만 있다면 생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기앞의 생> 주인공인 "모모"는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랍인 출신 아이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유태인 출신 "로자" 아줌마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그곳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열네살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나이를 먹은 만큼 "로자" 역시 나이를 먹게 되어 이젠 병든 몸이 되었고, 그녀가 돌보았던 "모모"가 이제는 그녀를 돌보게 된다.
어느 정도 큰 "모모"는 한때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했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지만, 그는 그녀를 결코 저버리지는 않는다. 자신의 부모가 그를 버렸던 것과는 반대로 말이다. 그에게는 "로자"밖에 없었고, 그녀 역시 "모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출생비밀을 모르던 "모모"앞에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십여년만에 등장하게 된다.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로자"는 항상 "모모"의 정신질환이 유전된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나타나자 그녀는 그가 "모모"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모모"에게 더이상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말라는 듯이 말이다.
["네가 내 곁을 떠날까봐 겁이 났단다. 모모야. 그래서 네 나이를 좀 줄였어. 너는 언제나 내 귀여운 아이였단다. 다른 애는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네 나이를 세어보니 겁이 났어, 네가 너무 빨리 큰 애가 되는 게 싫었던 거야. 미안하구나."] P.281
"로자"는 점점 몸이 아픔에도 결코 병원에 입원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갇혀서 생을 연명하기 보다는 다가오는 완전한 죽음을 맞길 원했다. "모모"는 그런 그녀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주위에서 권하는 입원을 거부하고, 그녀만의 안식처인 지하실에서 그녀가 마지막 생을 마칠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모모"에게 남아있었던 유일한 사랑인 그녀는 떠나고, 이제 "모모"는 사랑없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모모"는 결코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편하게 그의 옆에서 생을 끝냈고, 반면 그의 앞에는 새로운 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랑할 사람을 찾게 될 것이다, 분명히.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는 <하늘의 뿌리>라는 작품을 통해 '공쿠르 상'을 수상했지만,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이 책 <자기앞의 생>으로 또한번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되며, 이는 동일인이 최초로 '공쿠르 상'을 두번 수상한 첫 사례라고 한다.
(공쿠르상은 한 작가가 한번만 수상할수 있는 상이다.)
왜 "로맹 가리"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숨기고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책을 발표했던 걸까? 이러한 비밀은 그가 쓴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이라는 글에 쓰여 있는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항의 목적으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가명을 썼다고 한다.
"에밀 아자르"는 <자기앞의 생>에서 [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 ]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이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가명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에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계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말이다.
영화같은 그의 인생은 자신의 소설 <자기앞의 생>과 닮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책에서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 살수없다' 고 말한 것처럼 그의 아내였던 "진 세버그"가 자살하자 1년후에 그녀를 따라서 자살을 한다. <자기앞의 생>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정도 희망찬 미래를 그렸던 그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었기에 그렇게 자기앞의 생을 빨리 끝냈던 걸까?
인생의 고통은 '생' 때문이지만, 반대로 인생의 기쁨도 '생' 때문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순간에만 우리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앞에 놓여 있는 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랑'해야 한다.
<자기앞의 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남여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꼬마 "모모"와 아줌마 "로자"가 그리는 인간적인 가족 이야기 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나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사랑의 모습은 결코 어느 한가지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나의 인생책으로 간직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