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근본적으로 이종(異種)의학이다. 이종의학은 제국이 식민지를 적이나 악마로 간주하고 절멸 전쟁을 벌이는 방식을 의학적 버전으로 번역한 이름이다. 번역에 사용된 인프라가 바로 동일률에 터 한 형식논리다. A=A.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 진리에서 주체와 맞서는 무엇이든 다 비진리 non A. 곡절을 묻지 않는다. 이치를 따지지 않는다. 그 결과, 이종의학에서는 증상 자체가 질병이다. 질병은 적이다. 적은 죽여야 한다. 통증도 염증도 열도 미생물도 모두 적이니 힘으로 때려잡아야 치료다. 절멸만이 진리다.

 

동종(同種)의학은 원리상 증상을 병이라 여기지 않는다. 생명이 스스로 병을 치료하는 감응(response)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감응은 때려잡을 대상이 아니다. 동종의학은 예컨대 열이 나면 열을 내는 천연 약물을 극소량 쓴다. 열을 내는 약물을 극소량 쓰면 어찌 될까? 이치상 처음에는 열이 조금 더 난다. 생명 감응 작용을 북돋우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스스로 알아서 열이 내려간다. 생명 자연치유력이 증강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동종약물은 힘이 아니라 정보다. 생명 자연치유력을 깨우는 죽비소리다. 이야말로 의학다운 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본령 주된 축을 이룬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감응인 증상을 보고 놀라 적대 반응(reaction)을 일으키는 방어기전이다. 인도유럽어족이 타락(스티브 테일러)’한 이후 만들어낸 거대이론 가운데 하나다. 자신과 불화하는 거대자아가 생명현상과 자연에 non A를 뒤집어씌운 결과가 제국주의 백색의학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백색의학 자체가 질병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치료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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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학 인류사적 공헌은 외과수술, 링거 둘로 집약할 수 있다. 나머지, 아니 저 두 나머지 이외 대부분은 치료를 표방하나 증상만 약하게 만드는 백색화학합성물질 요법이다. 물론 뛰어난 진단 기술이 있지만 진단 아무리 잘해도 치료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진단 기술도 공학 기술 힘이지 그 자체를 의학으로 보기는 어렵다.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인간 생명력을 궁극적으로 사막이 되게 한다. 백색의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뿌려대는 진통제, 소염제, 항생제, 해열제, 기타 백색 화학합성물질 대부분인 차단제 공통 목표는 통증, 염증, 미생물, , 그리고 부정적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증상 제거에 있다. 증상 자체를 치료해야 할 병으로 보고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그 물질들은 약이라고 불린다. 과연 증상은 병인가? 과연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병을 치료하는가?

 

증상은 전체 원리에서 보면 병이 아니다. 증상은 병을 알려주는 메시지다. 메시지를 없애는 짓이 어떻게 치료인가. 메시지를 들어야 진짜 병을 밝혀내지 않겠는가. 병은 모른 채, 증상만 없애는 짓이 치료일 수는 없다. 기계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증상과 병이 일치한다. 백색의학은 인간을 기계로 보는 일극 패러다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말하자면 기계적 환원주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기 때문에, 증상 제거를 질병 치료로 인식한다.

 

인간 생명 이치에서 기계적 축은 유기체적 축과 비대칭 대칭을 이루면서 함께 엮인다. 구태여 본지와 경중을 따진다면 후자가 본이고 중하다. 특히 전자로 치우친 폐해가 심각한 오늘날 상황에서는 이런 역사적 판단이 불가피하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도를 넘어 반생명적인 수탈을 자행한다.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전 지구적으로 과다 처방되고 있다.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시시각각 인간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통증도 염증도 미생물도 열도 생길만한 곡절을 따라 생긴다. 이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망타진하는 짓은, 생명이 지니는 불편하지만 생생한 쌍방 소통 운동을 희생하여 편리하지만 파리한 일방 통제 구조로 전락시킨다. 이렇듯 인간 생명 구한다면서 도리어 해코지하는 제국주의 백색의학 몽매를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백색 화학합성물질은 인간 신체를 거친 뒤 어떻게 될까?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가 쓴 식물은 위대한 화학자에 이런 말이 있다.

 

조제 양약 대부분이 일상적 식품도 아니고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먹어본 적이 있는 음식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 몸은 낮 동안에 대소변을 통해 이 물질들을 배설해버린다. 복용한 약물 50~95%는 화학적인 변화나 물질대사를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배설된다.···

 

인체에서 배출된 조제 양약과 그 대사물질은 대부분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 화학적 결과를 일으킨다. 그리고 환자들이 지속해서 복용하거나 새로운 환자가 생길 때마다 새로 처방을 내리므로, 분해가 가능한 것도 정기적으로 재공급되고 있다.

 

순수한 형태로든 물질대사를 거친 형태로든, 인체에서 배설된 조제 양약은 폐수와 뒤섞여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환경 속에 흘러들어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양산해낸다. 연구에 따르면, 조제 양약과 인체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부산물로 만들어진 화학물질은 본래 조제 양약보다 더 오래 환경 속에서 잔류하며, 그 작용도 훨씬 강력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122~124)

 

제국주의 백색의학과 초국적 제약회사가 야합해 만들어낸 조제 양약, 그러니까 화학합성물질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계 전반을 교란하고 마침내 살해한다.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지구에게 독극물을 먹이고 있다. 인간도 지구 생태계 일부일진대 어떻게 이런 진실 앞에서마저 인간중심주의로 주저앉겠는가. 지구 위기는 기후 재앙 문제만이 아니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일으킨 약물 재앙이야말로 자비롭게 녹색 행성 목을 죄고 있다. 들어야 할 깃발이 우리보다 먼저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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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서구 지식인과 학자 담론은 자본주의, 그러니까 경제 환원주의 일색일까?

 

자본주의는 왜 그토록 지정학적 맥락이라는 현실에서 분리, 추상화됐을까? 자본주의를 한 시스템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서구 근본주의 편향은 사악한 진면모를 감추려는 방편이다(세드릭 로빈슨). 이를 통해 우리는 서구 지식인과 학자 담론이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세계 권력 위계를 지탱하는 조직적 폭력구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보다 추상적 경제 체제에 대해 논의하는 데에 더 편리하도록 기획돼 있음을 알 수 있다.”(166~171)

 

모든 문제를 돈 문제로 만들면 평평하고 납작한, 그러니까 매끄러운 추상 서사로 거짓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 특수한 사실을 이야기할 때 일거에 무너뜨릴 한마디는 다 그렇지 뭐.”. 본디 보편은 없다. 보편을 말하는 자가 사기꾼이다. 제국주의 사기꾼이 휘두르는 전가 보도가 자본주의다.

 

사기술로서 자본주의는 사회 모든 분야를 산업화로 낚는다. 산업화는 근대라는 신이 창조한 이적과 기사다. 의학이 예외일 리 없다. 산업의학은 평범한 사람 상상을 뛰어넘는다. 산업의학은 사회 전체를 의료화했다.

 

오늘날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병원 관리를 받는다. 산업 출산은 기본이다. 이후 생애 모든 과정에서 의료 시스템 지휘 감독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죽음과 그 의식까지 병원에서 치른다. 마치 인간 생사 전체가 질병이기나 한 듯 온갖 일에 의료는 촉수를 뻗치고 돈을 빨아들인다. 생사를 볼모로 수탈하는 짓은 얼마나 반의학적인가. 산업의학은 돈에 미친 지배 권력과 엘리트 집단이 벌이는 협잡 수단이다.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는 말은 구차하다. 이미 일극 집중구조가 굳어진 마당에 조선일보 문화면같은 부분이 있다고 한들 무슨 정당성을 확보하겠나.

 

날로 비대해지는 암 병원을 볼라치면 바로 그 암 병원이 암 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죽여가면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향락적 삶을 구가하는 자들에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테지만, 내게는 분노와 슬픔을 자아내는 어두운 동굴일 따름이다.

 

목하 암암리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국가 주도 정신건강 사업도 마찬가지다. 토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구, 특히 미국이 짜놓은 정신의학 체계는 그야말로 장사판이다. 돈이 되면 넣고 안 되면 빼는 식으로 진열한 병명만도 370개가 넘는다. 370여 개의 돈줄 던져놓고 마음 아픈 사람 낚아 올리는 블루오션에 자본이 문어발 뻗는 일은 당연하다.

 

인간 몸도 맘도 제국주의 백색의학 돈벌이 수단이 된 오늘을 나 역시 살아야 한다. 불평등한 경제구조에 편승하고 다시 그 불평등을 촉진하는 제국주의 백색의학 거대한 힘 앞에서 변방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인욕하고 진욕(進辱)하는 길에서부터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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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회룡 계곡 사건은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몸은 아직 여러 군데 상처를 끌어안고 있다. 길 없는 숲으로 들어가는 찰나에는 어떻게 그리 서슴없어지는지, 바위벽에서 굴러떨어지는 순간 , 이렇게 죽는구나!’ 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그런 행로를 밟아가는지, 직진 불가 절벽 끝에 섰을 때 들이닥치는 아뜩한 순간을 어떻게 가로지르는지, 지금도 내가 죽으려고 용을 썼지하며 살 떨곤 한다.

 

2023820일 일요일 아침, 나는 가장 익숙하고 안온한 경로를 생각하며 지난주 사건을 짊어진 채인 심신과 포옹한다. 아내와 딸이 나간 뒤 적당히 휴식을 취한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광화문 교보를 향한다. 광화문 교보는 읽는 인간으로서 내가 마음 모신 지성소다. 책만 보지는 않는다. 버드나무 책과 의자 조각, 그리고 5만 살 나무 책상과 인사하는 일을 빼먹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를 사 들고 도심 나무 순례를 거친 다음 북촌으로 향한다. 그럴 생각 없었는데 정독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몇 차례 대강 둘러본 기억 위에 샅샅이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얹어져서다.

 

느닷없는 생각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내가 본 측백나무 중 가장 큰 측백이 입구 비탈길에 서 있었다. 수백 살 회화나무도 거기 있었다. 80살 등나무도 있었다. 안쪽에 보호수로 지정된 4백 살 이상 된 회화나무가 또 있었는데 커다란 벌집을 거느렸다. 서쪽 끄트머리쯤에는 처음 본 수양벚나무도 가지를 늘어뜨린 채 무성히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뒤로 더 깊이 들어가니 우물 돌이 있는데 그 옆 안내판은 이 땅이 김옥균, 서재필 소유였다가 나중에는 매국노 박제순 손에 넘어갔다는 내력을 담아 놓았다. 읽는 이마다 느낌이 다를 테지만 제국주의 공부와 부역 사사 쓰기를 하는 내게는 아리고 쓰렸다.

 


대체 어느 이름 없는 장소를 찾아가야 제국주의와 부역 역사에서 자유로운 내력을 볼 수 있단 말인가관립 한성중학교가 화동 이 자리에 세워진 1900년 박제순이 우물 돌에 제 글을 새겨 넣었는데 전후 관계소유권 이전 과정도 알 수 없다그저 그런 내력이 뒤엉키며 흘러온 역사를 생각할 때 식민지 오욕은 결결이 겹겹이 육중해진다는 진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여기에 개인사가 포개지면 잔혹으로 번진다.


나는 박정희가 제 아들을 위해 입시제도를 바꾸는 바람에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힌 장본인 중 하나다. 여기 경기중학교가 1971년에 폐교된 원인은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전격 실시된 데 있다. 경기중학교 들어가 가난과 소외를 극복할 꿈에 부풀어 있던 최상위우등생은 이렇게 독재자 한 사람 사욕에 희생돼 험하디험한 인생 경사로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망연히 서서 만일 그때 경기중학교에 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가정은 부질없다. 다만 특권층 부역 집단이 어떻게 내 인생에 직접 개입했는지 확인함으로써 진실에 더욱 통렬히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북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정릉으로 향했다. 정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곳이다.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총애해 본디 사대문 안 정동에 있었으나, 신덕왕후와 심하게 척을 졌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곳으로 쫓아냈다. 능을 묘로 낮추고 석물을 가져다 청계천 다리 공사에 씀으로써 사실상 주인 없는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광통교나 인근 벽돌에 그 석물들이 지금도 증거로 남아 있다. 현종 때 송시열의 주청으로 복권·봉안했다. 이런 우여곡절에 아랑곳없이 능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이방원 아닌 토건 부역 후손들이 야비하게 밀고 들어와 지금 능 숲은 눌려서 숨이 막힌다.



하기야 어딘들 다른 풍경이랴.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자랑하지만, 막상 그 숲은 국적 없는 토건 바다에 떠 있는 섬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 과거는 현재와 연속을 이루면서 자부심에 찬 풍경을 과시하지만, 중첩 식민지 허울 대한민국 과거는 현재 삶과 유리된 예능 역사 담론에 불과하다. 무슨 출입 금지 푯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내 역사와 더불어 호흡하지 못하게 한다. 박제 고가품 취급한다.

 

나는 1965년 서울 와 돈암동 산동네에서 10대를 보냈다. 집에서 작은 능선 하나를 넘으면 정릉 원찰인 흥천사, 다시 하나를 넘으면 정릉이다. 강원도 월정사 입구 마을에서 태어나 시생대를 살아온 내게 두 장소는 더할 나위 없이 정겨웠고, 그 풍경은 안온했다. 도시 빈민으로서 겪는 가난과 소외를 견디게 해주는 너른 품이었다. 요즘처럼 무슨 놀이기구나 먹을거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냥 재잘거리며 오가고, 숲속을 쏘다니고, 먼 듯 가까운 옛 향기를 맡는 일만으로 유소년의 시간은 탱탱해졌다. 정릉 품은 백악산 자락은 그렇게 60년 가까이 내 생애 내력과 곡절에 엮이며 함께 서사를 구성해왔다.

 

나는 오늘 가장 익숙하고 안온한 경로를 따라 걸었다. 부작위 휴식이 아니라 작정하고 길 잃지 않는정도에서 길 잃어도 되는 저난도 일상을 살아 낸 셈이다. 사실 회룡 계곡 사건도 나를 피곤으로 몰아넣지는 않는다. 피곤하지 않으면 주파수를 낮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 이런 흐름에 나를 놓아둘 뿐이다. 어찌 살든 걷고 머문 장소, 그 내력에 주의하며, 내가 걷고 머문 풍경, 그 곡절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인간이며 남성이며 이성애자며 비장애인이라는 사실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껏 실컷 생을 맡길 따름이다. 나는 완전하게 불완전하며, 불확실하게 확실한 도상에 있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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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전통은 법학, 신학, 의학을 3대 신성 학문이라 일컫는다. 법관·사제·의사는 공식 업무를 행할 때, 가운을 입는다. 가운을 걸친 채 보수적이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3대 신성 학문은 자연스럽게 보수가 된다. 아니다. 태생 자체가 보수 본성을 지닌다.

 

통속한 인식에서 보면 의학을 놓고 보수 운운하는 일은 낯설다. 정치와 무관한 학문처럼 보이니까. 제대로 알고 보면 의학처럼 정치적인 학문도 없다. 정치적 승자, 그러니까 지배 권력 시선으로 질병을 규정·진단·치료하는 서사가 의학이다. 현대 주류의학은 제국주의 주체 세력인 백인(특히 앵글로아메리칸남성·성인 의학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류 최초로 금융제국을 이룩한 미국 지배 엘리트 집단이 초국적 제약회사와 보건성을 장악하여, 각종 질병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의학적 방식이다: 백색 가운 입은 자들이 제국에 부역하는 의료적 방식이다.

 

의학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 운동이 다름 아닌 녹색의학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불의한 권력과 그 지배에 반대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인종주의를 거부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성 불평등을 용인하지 않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아이들 학대에 맞선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정치적 평등·자유를 근본 기치로 삼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정치적 기치 문제에서, 정치적 관점이나 성향 문제와 의학 내용 문제는 분리 불가능하다. 불의한 제국 권력이 토건으로 병을 일으킬 때는 의학 이론을 조작하기 마련이다. 진단과 치료에 동원되는 조건 구축 과정 또한 기획한다. 미국을 위시해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제국은 이렇게 병과 진단 기술, 그리고 (약이라 주장하는) 화학합성물질을 만들어 식민지에 하달한다. 각기 다른 여러 인종·남녀·나이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폭력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의학 토건 볼모로 징발되어수탈당하고 있다. 반제국주의 백색의학은 학문을 조금 섞어 넣어 만든 신흥종교 체계다. 이 악성 이데올로기 쌍끌이기선저인망이 암과 DSM표 정신장애다. 우리는 제국주의 백색의학 정치적 정신장애, 정치적 암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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