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은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주어진 자아로부터 탈출하여, 내 안의 신의 속성을 발견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수가 모세의 놋 뱀처럼 들려져 자비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 거룩한 여행이 바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연습이다.(233-234쪽)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거룩한 여행은 기존의 자아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분리·단절입니다. 신의 속성을 삶 속에서 드러내어 실천하는 것이 다음 단계입니다. 전이·이행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게 됩니다. 통합·일치입니다. 이 내용은 저자가 예수의 첫 질문 이야기를 쓴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39-40쪽에서 인용한 인류학자 반 즈네프의 『통과의례』순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통합의 단계에서 저자가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는지조차 몰라야 한다. 자신이·······통합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는 타락하고 만다. 자만심이 그를 처음 단계로 보내버리는 것이다.”(40쪽)


진부한 듯 보이지만 의미심장한바, 이 대목에서 불가의 돈점논쟁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돈점논쟁에서 주요 논점은 깨닫고 나서도 수행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돈오돈수 쪽은 그렇다면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게 딱 떨어지는 맛을 지닙니다. 문제는 그 온전한 깨달음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며, 누가 어떻게 그것을 확인하느냐 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해 돈오돈수는 부처 이후 아무도 도달한 적이 없는 관념적 경지일 뿐입니다. 만일 이 경지에 올랐다 스스로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라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철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부처 아닌 아라한 경지를 놓고 논쟁을 짓는 풍경은 가소롭기 그지없습니다. 아라한이나마 인정한 것도 한참 접어준 것입니다. 저자 식으로 말한다면 그는 자만심 때문에 처음 단계로 돌아간 입문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오 이후 한결같은 맑음으로 살아 자기 자신도 모르게 부처의 삶으로 배어들고 번져나간 자가 스스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은 채 무심히 살고 있을 때 오직 부처라 할 것입니다. 돈오돈수라고 훤조하는 자가 부처일 리 만무합니다. 저들이 떠드는 돈오는 단지 출발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착역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부처를 팔아 가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돈오점수가 옳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수행은 깨달음의 필수조건으로서 깨달은 뒤에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깨달은 뒤에도 필요한 수행이 있다면 앞의 깨달음은 이미 물거품이 된 상태일 것입니다. 돈오점오가 맞습니다. 돈오 이후 돈오는 부단히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의 삶입니다.


현실을 냉정히 돌아보면 이 땅에 돈오한 선객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야장천 미련한 수행만을 거듭하다가 알량한 한 소식을 접하면 견성했다 허영 떠는 땡초들이 준동할 뿐입니다. 불교에서 불성이 떠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기독교에서 영성이 오래 전에 떠난 것과 동일합니다. 절집에서 불상한테 절하며 손 비비는 사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처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한테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싯다르타처럼 집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 어찌 내 안에 있는 신성을 볼 것입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스키는 1955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에 대한 공개적이며 인간적인 다양한 해석과 고민을 담아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교를 지탱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버팀목이기 때문에, 아무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거나 그 내용에 도전해서는 안 되는 터부다.·······로마가톨릭교회는 지체 없이 이 불온한 서적을 금서로 지정했고, 카잔차스키가 소속되었던 그리스정교회는 그를 출교시켰다.

  30년 후 미국의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이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다.·······이 영화는 인간 예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들이 구축한 교리 안에서만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이라고 가르치며,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완벽한 인간의 고뇌와 완벽한 신의 모습을 둘 다 담은 ‘온전한’ 영화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에 당황한 그들은 이 영화를 신성모독으로 낙인찍었다.(195-196쪽)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났었다고 다들 생각하실 것입니다. 만일 이 영화를 한국인 감독이 한국에서 만들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도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 했을 것입니다. 물론 우스개입니다. 왜 대뜸 우스갯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도 그리스정교회도 고위 성직자들 여럿이 모여 진지하게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결정 사항을 감독을 포함한 전 세계인에게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근엄한 모자와 가운을 차려입은 고매한 성직자가 마이크 앞으로 나왔습니다. 카메라가 그 얼굴에 서서히 앵글을 맞추어갑니다. 아뿔사! 카메라에 잡힌 성직자의 얼굴, 그 얼굴이 예닐곱 살짜리 아이입니다! 바로 이 순간 과연 누가 배꼽을 잡고 웃어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분명히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이라고 가르치며,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인간의 모습에 당황한 그들은 이 영화를 신성모독으로 낙인찍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완벽한 인간의 고뇌와 완벽한 신의 모습을 둘 다 담은 ‘온전한’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바에 부합했는데 저들이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신성모독으로 낙인찍고 만 것입니다. 말인즉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이라도 완전한 신만을 드러내야 이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말을 스스로 뒤엎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그 대단한 성직자들이 어떻게 알아차리지 못 했단 말인가요?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이라고 하는 이 이율배반의 진실을 제 입으로 말해놓고도 그 실재는 아직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치명적 고해성사입니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신성모독이라 하는 것인가요? 적어도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완전한 신이기만 해도 완전한 인간이기만 해도 이단임이 확실합니다. 그야말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아닌가요?


자, 통 크게 양보합시다. 그 영화에서 인간 예수를 홀랑 다 빼고 신 예수만 남기도록 했다 칩시다. 그러면 그게 과연 예수가 완전한 신임을 보여주는 장엄한 영화입니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입니다. 그 예수는 그저 “비인간적” 예수일 따름입니다. 신성은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장엄해지고 인간성은 신성으로 말미암아 숭고해집니다. 이 만고의 이치를 모른 채 그리스도교는 이천 년을 허송했습니다. 앞으로도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에게 비대칭의 대칭, 그 오묘함은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수평선 같은 존재이니 말입니다.


아이들이 별이 된 지873일째인 어제(9월 4일) 저는 광화문 세월호광장 유가족 먼발치에서 지지단식을 했습니다. 오후에 예은 아빠 유경근 씨가 출석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교회 신도들이 왔습니다. 뭔가 아픈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끝나고 그들은 따로 모여 목회자의 인도 아래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의 수런거림이 제 관심 밖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 찰나 어둑해지는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수가 말한 진리는 내적인 결심과 그 결심을 인내로써 지키려는 삶의 태도다. 어떤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갖는 마음가짐이다. 이 마음가짐에서 출발해 자신의 삶을 서서히 바꾸고,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들어서고,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것을 지키려 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이 문장에서 비문의 요인이 된 원문 일부분을 인용자가 수정함.) 진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지켜보는 초월주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개입해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 과정으로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진리, 즉 인간 안에 씨앗으로 존재하는 신의 형상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심지어는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이 문장에서 비문의 요인이 된 원문 일부분을 인용자가 수정함.) 나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191-192쪽)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또는 그 인식 내용.’ 이 통속한 명사적 진리관은 로마인 총독 빌라도의 것입니다. 진리眞理를 글자의 본디 뜻을 헤아려 동사 문장으로 구성하면 ‘바른 삶의 길을 옥의 원석 속에 숨어 있는 고운 결을 갈아내듯 다듬어 간다.’입니다. 간단히 줄이면 ‘바르게 다듬다’ 정도의 구문이 됩니다. 이 동사적 진리관은 유대인 죄수 예수의 것입니다. 사실 여태껏 우리 대부분이 알아온 진리는 빌라도의 진리가 아니던가요? 심지어 기독교인조차도 그렇지 않은가요?


예수는 진리를 위해,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함으로doing truth, 아주 정확히 말하면 진리true(이는 바르게 수행하다는 동사)로 죽습니다. 우리 대부분, 더욱 기독교인은 돈을 위해 ‘죽기로 살’지 않습니까? 예수는 진리와 동의어입니다. 우리 대부분, 특히 기독교인은 돈과 동의어입니다. 돈이 진리를 대체한 세상에서 여전히 ‘성경책’을 끼고 교회 들락거리는 행위는 예수를 모독하는 짓입니다. ‘성경책’은 더 이상 성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증언하지 않는 껍데기 글씨의 집합일 뿐입니다. 어찌하면 여기서 벗어날까요?


‘성경책’을 버려야 합니다. 성서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를 헐어버려야 합니다. 진리로 살아야 합니다. 각자 예수가 되는 것이야말로 저 예수의 죽음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입니다. 이 진부한 진실을 2천년 동안 백안시해온 기독교는 결국 하느님의 것을 빼돌려 카이사르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자본과 신자유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성소를 침탈했습니다. 카이사르가 보낸 총독 빌라도가 오늘 다시 와서 묻습니다. “무엇이 진리인가?” 당신은 예수로서 답할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모독하는 자로서 답할 것입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8년에 발견된·······‘차코스 사본’·······중 한 문헌이 26쪽으로 이루어진 <유다복음>이다.·······<유다복음>은 지난 2,000년 동안 배신의 상징이었던 유다를 예수의 12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해한 제자로 묘사한다.(155-157쪽)·······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종교적으로 개방되어 삶에 깊은 성찰과 용기 있는 행동을 유발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다복음>은 신이 2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유다에 대한 재평가는 곧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억압해온 집단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인, 식민지인 등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159쪽)

  유다는 세상에 보여줄 ‘연민’이라는 가치를 충격적이며 감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 악마가 아니라 <유다복음>의 주장처럼 예수의 위대한 마지막 길을 밝혀준 존재는 아니었을까?(163쪽)


저자가 증언하다시피 기독교는 이미 그 태동기부터 장구한 세월 동안 가룟 유다와 유대인을 동일시함으로써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해왔습니다. 그 정점에서 히틀러와 공범 관계를 이루며 저 잔혹한 아우슈비츠 굴뚝 연기를 피워 올린 것입니다. 기독교 강대국들이 그 뒤 유대의 고토에 이스라엘을 세워준 협잡은 대칭적 제노사이드를 위한 영구적 음모의 일환이었습니다. 구교든 신교든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 성찰 없이 그들의 신 앞에 온전히 서지 못 할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 말했듯 역사란 승자가 패자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구 역사가 차별·전쟁·착취를 통해 지구 전체를 죽임의 시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성·어린이·이민족·자연의 의롭고 선하고 아름다운 면모를 지웠듯 말입니다. 기독교의 가룟 유다 지우기와 반유대주의는 바로 이런 서구 역사에 합류하기 위한 야합이었습니다. 구교든 신교든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 성찰 없이 그들의 신 앞에 온전히 서지 못 할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유다는 모든 지워진 이름의 상징입니다. 신의 “지상 임무를 완벽하게 이해한 유일한”(155쪽) 존재면서도 그가 버림받은 까닭은 서구적 사유 속에서는 모순을 역설로 달여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예수를 팔았다면 악할 수밖에 없고 그 악은 지워야 할 무엇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극진히 바라도 기독교는 유다를 복권시키지 못 할 것입니다. 이율배반 대문에 모순율 빗장이 걸린 기독교 프레임을 깨뜨리기 전까지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버림받은 자로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완벽하게 실천한 유일한 존재, 그 이름 바리데기. 우리 무조신화 <바리공주>는 버림받았으면서도 버린 자까지 구원하는 바리데기의 장엄한 삶을 그려놓았습니다. 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아비를 살리기 위해 지옥행을 마다하지 않은 딸 바리데기가 있습니다. 바리데기는 결국 세계 유일의 여성 구세주가 됩니다. 이율배반 대문에 모순율 빗장을 걸지 않는 사유와 삶, 이것이 한[아래 아 한]의 사람들입니다. 한[아래 아 한]의 품으로 복귀하면, 아니 스스로 개벽하면 이 땅의 기독교는 변화의 틈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기독교 이야기가 아닙니다. 광화문 세월호 광장을 무심코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고통당한 어르신들에게 권력이 저지른 짓에 대하여 아무 생각 없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구럼비 잃고 미군기지 들어서는 꼴을 지켜봐야 하는 강정마을이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모으고 묵상에 잠깁니다. 이 말 할 때 예수의 마음 진경은 무엇이었을까?


“너는 입맞춤으로 나를 넘겨주려고 하느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서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심오한 책이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왜곡되어 전달되기도 한다. 경전은 한 번도 자신이 인간 삶의 기준이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131쪽)·······

  예수는 당시 랍비 전통 안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그는 그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내재적인 힘을 키우고 그 힘을 믿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것, 이것이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을 정죄한 유일한 인간은 당신뿐입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삶을 찾아 사십시오. 그 길에서 떠나지 마십시오.”(141쪽)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저는 알라딘 서재 <벽효서실>에 『중용416』이라는 이름으로 44편의 『중용』 해석 글을 실었습니다. 그 들머리에 썼던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오늘 여기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권위 있는 어떤 시공간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텍스트가 있을지라도 고전은 신성불가침의 경전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전으로 떠받들리는 찰나 그것은 이미 고전이 아닙니다. 경전이 만들어내는 믿음에는 거짓의 독버섯이 무성합니다. 거짓을 걷어내고 살아 있는 진실을 마주하려면 경전을 가차 없이 베어버려야 합니다. 경전을 베는 마음 고갱이에는 의문이라는 용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문은 내 앞에 놓인 삶의 고통이 빚어낸 눈물입니다. 그 눈물 없이는 당최 고전의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전은 한 번도 자신이 인간 삶의 기준이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경전이 살아 있는 ‘인간 삶의 기준’이 되려면 의문을 품는 인간의 주체적 말 걸기가 필수적입니다. 주체적 말 걸기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내재적인 힘을 키우고 그 힘을 믿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것”에 힘입습니다.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는, 그러면 어디서 발원하는 걸까요? 전통에 매몰된 노예적 부품으로서 인간은 결코 자신을 깊이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립된 개인적 명상이나 수행에서 자기 신뢰를 찾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자기 신뢰는 일종의 환각이며 결국은 중독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기 신뢰는 삶의 한가운데서 흘리는 눈물에서 나옵니다. 눈물은 관계가 빚어내는 통렬한 감각이자 각성입니다. 관계는 고통당하는 이웃, 수탈당하는 자연과 마주하는 경계 사건입니다. 이 경계 사건에서 찰나마다 내재화되는 힘이 생겨납니다. 내재화된 그 힘이 자기 신뢰의 바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권력이 정치와 법의 이름으로 시민의 자기 신뢰를 거세하고 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 논리에 사로잡힌 맹목 집단은 거기 부화뇌동해 의롭고 약한 이웃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여 돌팔매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도 일본군 성노예 피해 어르신들도 밀양 할머니들도 강정마을 주민도 저들의 정죄놀이에 끝없이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숭고하게도 이 선한 이웃들은 스스로 정죄하지 않으니 감사하고도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예수의 이 마지막 말은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그 길에서 떠나지 마십시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