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도 애착을 끊은 표정은 저렇구나, 싶은 작고 깡마른 얼굴의 청년이 들어섰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쩐지 그 자체로 변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공황장애 병력이 있고 우울증도 심했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불면증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난 몇 년 동안 2-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비염 치료를 받은 뒤부터 불면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아뿔싸! 이것은 일종의 의료사고입니다. 제가 진단한바, 그가 앓는 비염은 전형적인 알레르기비염이 아니었습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이라는 긴 이름의 특별한 비염이었습니다. 서구의학 임상에서 이 둘을 실제로 구분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대부분 알레르기비염으로 진단하고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할 것입니다. 이 방법이 증상을 억제할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아닙니다. 이 방법을 쓰면 나타나는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불면증입니다. 면역학의 이치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서구 임상의들은 알지 못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그에게 상세히 해주었습니다. 제대로 된 지식 전달 자체가 치유의 한 축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항히스타민제의 원리와 다른 한약을 지어주었습니다.


제가 지어 보낸 한약의 치료원리는 우울장애 치료와 같은 기반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무얼 의미할까요? 혈관운동신경성비염과 우울증이 본질상 서로 맞닿아 있는 병이란 얘기 아닐까요? 이 통찰은 저 자신의 병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우울증 때문에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앓은 경험이 있습니다. 15년 이상 치료가 안 되어 고생하다가 40대 후반, 어떤 양방병리학 책에 첨부된 소논문을 읽다가 벼락같은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대개 슬픔· 원망 등의 감정 요인이 작동하므로, 심리치료 말고는 현재 의학의 수준에서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그제야 저는 여태까지 했던 노력이 왜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즉시 저는 실천에 옮겼습니다. 애써 다른 전문가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심리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칠흑 같은 밤의 어두움 속에서 침묵과 절규를 가로지르며 극진히 자기 대화 나누기를 서너 시간, 이윽고 희붐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순간 문득, 연거푸 나오는 재채기·엄청난 양의 맑은 콧물·코 막힘·가려움·미열·두통 등의 증상들이 아침 해 뜨면 물안개 사라지듯 없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내 소름 돋는 느낌이 와락 달려들었습니다. ‘아, 병은 이제 없구나!’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의 긴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임상 현실에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에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의료인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 경험을 토대로, 진단 과정에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인가, 아닌가를 면밀하게 살핍니다.


거꾸로 접근하는 진료도 필요합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진단할 때 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특히 우울장애일 경우는 이 진단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문진과 경추압진頸椎壓診-목뼈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진단 방식-을 하면 거의 완벽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은 ‘혈통’이 같은 병입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아픈 감정을 되살려내어 마음의 장애를 유발·지속·증폭시키는 것이 후각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우울장애와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따로 생각하면서 시달려 온 전형적인 예가 바로 제 자신입니다. 제가 자기 상담으로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치료한 것은 결국 우울장애의 치료를 겸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이치를 저는 그에게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어머니가 주입한 근거 없는 기준으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부터 자기혐오를 격렬히 겪었습니다. 외모·학교·전공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속 깊이 나누며, 그는 점차 불면과 비염과 우울의 동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나와서 돌아보니 하나의 동굴이었다는 진실을 간직한다면, 언제 어느 때 또 그런 동굴을 만나도 그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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