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적 힘의 비밀 - 여성 운동 초월
앨리슨 벡델 지음, 안서진 옮김 / 움직씨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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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벡델의 책을 읽을 때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무슨 용기? 나의 과거, 나의 상처, 나의 단점, 나의 불안, 나의 우울, 나의 실패, 나의 오만, 나의 모든 것과 대면할 용기. 


<펀 홈>, <당신 엄마 맞아?>의 뒤를 잇는 이 책은 저자가 60여 년 동안 해왔던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려서부터 '여자애' 답지 않게 활달했던 저자는 십 대 시절 혼자서도 달리기, 스키, 등산 등을 즐겨 했고, 성인이 된 후에는 무술, 요가, 사이클링 등에 빠져 살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운동에 빠져 살게 했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보기 좋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지만, 근원적인 이유는 살아있다고 느끼고 싶어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서였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육체적 단련뿐만 아니라 정신적 수련도 병행했다.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를 읽고, 초월주의자 마거릿 풀러와 랄프 왈도 에머슨, 소로우를 공부했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다르마 행려>를 탐독하고, 케루악이 심취했던 동양 철학과 불교의 세계에도 발을 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우울이 떠나지 않고, 불면과 일 중독이 심해져서 술에 의존하거나 관계를 망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육십을 넘긴 지금, 저자는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초인적 힘의 비밀'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고 고백한다. 초월할 것은 '초월할 것이 있다'는 생각뿐이다. 인간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음이 야기하는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과정이 죽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삶이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진다. 이걸 깨닫기까지의 과정을 끈질기게 회상하고 멋진 만화로 표현해 준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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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3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당연한 결론으로 나아가는데 그 결론을 내는 과정이 특별할것 같다는 느낌이네요. 저도 보고싶은 책입니다. ^^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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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즐겨 듣는 팟캐스트 진행자가 "영혼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영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또한 영혼의 존재를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영혼이 없다면 우리가 부모로부터 유전되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이성으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나 육감 등의 정신작용을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고 덧붙였다. 과연 어떨까. 


마침 지난 밤에 읽은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에 비슷한 내용의 소설이 있었다. <캐빈 방정식>이라는 제목의 단편인데, 화자인 '현지'는 전도유망한 물리학자인 언니 '현화'로부터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과학적,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그랬던 언니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살게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니 현지에게 대뜸 '울산 관람차 귀신'에 대해 조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귀신 이야기는 전부 가짜라며 듣는 것도 싫어했던 언니가 귀신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하다니. 현지는 의아해 하면서도 하나뿐인 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열심히 조사한다. 과연 관람차 귀신은 진짜일까 아닐까... 자매가 힘을 합쳐 괴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라서 좋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었던 언니와 그런 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동생이 귀신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를 통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기묘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결국 영혼이나 귀신 같은 건, (이해하기 힘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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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플레이 트리플 6
조우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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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북클럽을 서핑하다가 얼마 전에 읽은 소설집 <이어달리기>를 쓴 조우리 작가님의 단편집 <팀플레이>를 발견하고 반가움에 내적 환호성을 지르며 바로 다운로드해서 읽었다. 조우리 작가님은 '퀴여, 노동, 여성'에 관한 소설을 주로 쓰시는데, 이 책에는 주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책에는 단편 <언니의 일>, <팀플레이>, <우산의 내력>이 실려 있고, 에세이 <쓰지 않는 일에 대해 쓰는 일>이 실려 있다.


<언니의 일>과 <우산의 내력>은 한 직장에서 일하며 상하관계에 놓인(놓였던) 여성들 사이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그린 소설이고, <팀플레이>는 시나리오 작가인 주인공이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의 교수로부터 불편한 제안을 받으면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각자가 가진 다양한 욕망과 감정을 드러내거나 숨기면서 빚어지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길이는 짧지만 한 편 한 편 깊은 인상을 받았고, 각각의 뒷이야기(또는 앞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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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녀 힙합 - 집밖의 세계를 일구는 둘째의 탄생
이진송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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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엄마가 나와 (여)동생에게 "엄마가 둘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 것 같아?"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나"라고 대답했고 동생도 자기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가 나를 더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다. 다만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나 자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내가 '첫째'라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첫째가 아니었어도 나를 이만큼 사랑해줬을지, 엄마한테 아들이 있었어도 딸인 나를 사랑해줬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엄마도 딸만 둘이라서 "너희한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말로 자신의 성차별 가능성을 인정한 바 있다). 


의외였던 건 동생이 나보다 엄마한테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점이었다. <차녀힙합>에 나오는 것처럼, 내 동생도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또 딸이다", "꽝이다" 소리를 들었고, 오랫동안 내 옷을 물려받아 입었다. 학창 시절 내내 엄마는 내 학부모 모임에만 참석하고 동생의 학부모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지금도 모두가 엄마 아빠를 내 이름으로만 부르고 어떤 친척은 동생을 '(내 이름) 동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 대해 언니인 내가 분노 혹은 미안함,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과 달리 동생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걸 보면, 성격이 낙천적인 건지 무던한 건지. 혹은 애초에 타인에 대한 기대가 낮은 걸까. (이것도 혹시 차녀라서?) 


<차녀힙합>을 읽는 동안 책에 나오는 내용에 관해 동생과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나눴다. 우리는 저자의 자매처럼 치고박고 몸싸움을 한 적도 없고,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경쟁을 한 적도 없다(전술했듯이 우리는 서로 자기가 부모한테 더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ㅋㅋ). 하지만 이건 동생과 나의 성격이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라, 동생과 내가 공유하는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네에 아들 잘 낳는 여자가 있다며 엄마한테 씨받이를 권유했던 할머니(아들은 어려워서 아빠한테는 말도 못함), 셋째도 딸이면 안 된다고 낙태를 권유했던 외할머니(결국 낙태했다), 손주들 중에 우리 자매가 가장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손자들에게만 등록금을 줬던 할아버지. 


그들 또한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주의의 피해자인 걸 지금은 알지만, 책에 나온 대로 "열 살도 되기 전에 나의 출생이 실망을 동반했다는 것"과 "열심히 해서 뭔가를 성취해낼 때마다 고추 이나 들어야 했"던 것은 여전히 괴롭고 슬프다. 맏이라서 그나마 대접받은 나도 이런데, 차녀이거나 중녀인 사람들은 오죽할까. 차녀와 (나처럼) 차녀인 동생을 둔 장녀는 물론이고, 장녀인데 남동생이 있거나, 외동인데 딸인 사람도 이 책의 여러 대목에 공감할 것이다. 책의 문장을 빌리면, "현실 세계가 여성을 2등 시민 취급하기에, 세상 모든 여성은 가정 내 출생 순서와 무관하게 ‘차녀성’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실컷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던 감정들이 정리되어 개운하고 후련하다. 딸로 태어난 게 내 잘못인가. 딸이라고 차별하는 사람들 잘못이지. 이진송 작가님, 곽민지(비혼세) 작가님, 신예희 작가님 등등 내가 좋아하는 분들 대다수가 차녀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도 수확이다(물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차녀는 내 동생♥). 주변 사람들의 형제 관계와 (원)가족 내에서의 경험도 궁금하다. 이 책만큼 스웩 넘치게 고백 해볼테면 해보라지(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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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2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차녀는 내 동생‘에 적극적 공감을 마구 눌러드리고 갑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녀는 이 지구상에서 제 동생입니다. 으하하하.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김민철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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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기 전에 책을 읽으면서 잠을 청하는 스타일이다. 평소에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끌리는 책을 골라서 읽는 편인데, 유난히 힘들었던 날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밤에는 여행 에세이를 찾는다. 여행 에세이에는 모험이 있고 낭만이 있으며, 고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묘약 같은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여행 에세이를 읽다 잠든 날에는 반드시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난다.) 


그래서 평소에 읽고 싶은 여행 에세이를 발견하면 미래를 위해 쟁여두는데, 이 책도 그중 한 권이었다. 김민철 작가님의 에세이니까 재밌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유사시에 읽으려고 아끼다, 며칠 전 기분이 너무 안 좋았던 밤에 비상약처럼 꺼내 읽었다. 효과는 당연히 직방(!)이었다. 저자를 따라 샌프란시스코, 가마쿠라, 베네치아, 아를, 리옹, 더블린, 포틀랜드, 밀라노, 우붓, 제주, 교토 등을 거니는 기분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편지 형식이라 추억 여행을 하는 기분도 들었다. 


편지 형식이라는 점이 특히 좋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건 내 애인이 좋아하는데', '저건 내 동생이 좋아하는데' 이런 식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자주 떠오르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고, 그렇다면 선물이라도 사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선물을 준다는 핑계로 여행을 마치면 만나자는 약속을 하게 되고... 그렇게 여행을 통해 사람을, 관계를, 내 일상을, 내 인생을 다시 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참 소중하고 유익한 것 같다. (아 여행 가고 싶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이 좋았지만, 저자가 마이산에 다녀와서 쓴 <하얀 눈길 위를 뚜벅뚜벅 가 볼게>라는 제목의 글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함께 보낸 친구가 있고 그 친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어서, 글을 읽는 동안 울적했고 다 읽은 후에도 한참 쓸쓸했다. "가장 밝게 웃었던 그 순간의 너만을 기억하며 힘을 내볼게.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중간에 그만 가는 일은 없을 거야." 이 문장은 나를 위한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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