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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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2018년 등단한 시인 서한영교의 책 <두 번째 페미니스트>는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페미니즘 - 정확히는 성차별 문제를 인식한 것은 열아홉 살이던 2001년의 일이다. 그때까지 저자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남성들이 대개 그렇듯이 '귀한 아들' 대접받으며 밥은 물론 빨래나 설거지 한 번 해보지 않고 남녀 간에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살고 있었다. 문학 소년이었던 저자는 '읽다가 죽어도 좋을 만큼' 시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창작과비평사 온라인 게시판에 박남철 시인의 소위 '욕시'가 올라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정란 시인을 두고 "암똥개", "벌린 x"등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시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끔찍한 시를 썼는지 궁금해 상황을 알아봤다. 상황은 이러했다. 한 술자리에서 막 등단한 여성 시인이 박남철 시인으로부터 성희롱과 구타를 당했다. 이후 박남철 시인에게 성폭행당할 뻔했다는 편집자, 학생 등의 고백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다수 문인과 문학 출판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한국 문단에 패거리 권력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은 대형 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남성 문인들을 위주로 한 권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문단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전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여성이 남성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었다. 

남성은 권력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한 여성 시인을 두고 아무렇지 않게 폭언을 일삼아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알고 난 뒤로 세계가 뒤틀렸다. (16쪽) 


그 이후로 저자는 많은 것들이 불편해졌다. 왜 집안일은 엄마가 다 하는 걸까. 왜 아내들은 바쁜 아침에 남편 아침밥을 차려야 할까. 시장에 가면 왜 온통 할머니와 아주머니들뿐일까. 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은 죄다 남자들일까. 왜 여자 선생님들은 결혼을 하거나 출산을 하면 학교에서 볼 수 없게 되는 걸까. 왜 여자들은 귀갓길 택시 안에서 불안해하는 걸까. 왜 여자들은 밤길을 조심해야 할까. 왜 여자들은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를 입거나 짧은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남자들한테 '밝히는 애'라느니 "아예 나 먹어주세요, 광고를 하는구나." 같은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그 뒤로 저자는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 <IF>라는 페미니즘 잡지를 구독하고, 대학에서는 총여학생회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어머니 성을 붙여서 서한영교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고전이라 불리는 책을 탐독하고, 여성 단체에서 진행하는 강좌를 수강했다. 위안부 문제를 위한 활동도 했다. 감동도 컸지만 괴로움도 컸다. '남녀', '부모'처럼 남성을 우선시하는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습관도 고쳐야 했고, 가끔 누가 너무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와도 외모 평가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참아야 했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남성 공동체로부터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하게 밀려드는 압박과 차별도 상당했다.


그런 저자가 더욱 적극적인 페미니스트가 된 건 지금의 아내 덕분이다. 저자의 아내는 시각장애인이다. 비장애인-페미니스트 남편으로서 가정에서 아내의 몫까지 해내고 싶었지만, 남편이 아무리 노력해도 임신과 출산, 육아는 아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더 컸다. 그럴수록 저자는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자라고 세상에 나오고 무럭무럭 자라는 전 과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아빠도 엄마도 아이도 집사람. 집에서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고, 아빠의 역할은 돈을 벌어오는 것만이 아니란 걸 실천으로 증명했다.


공동육아를 하는 저자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남자가 무능력하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저자를 가리켜 '맘충'이라고도 했다. 저자는 이런 일들을 겪으며 이 사회는 단순히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 여성적인 것, 남성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전부 불편해하고 부정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상처 입는 건 여성만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과 사회가 규정한 남성 규범이 일치하지 않는 남자들은 전부 상처 입는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를 연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아가 힘들어진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나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않으려 한다. 

"다른 세상은 없다.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자크 메스린)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두 번째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나에게 붙여본다. (291쪽)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될 수 있다 해도 여자만큼 절실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진지하게 성찰해 온 저자를 보면서 남자도 충분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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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모험 - 인간과 나무가 걸어온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정
맥스 애덤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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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그루씩은 보게 되는 나무들. 이 나무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숲 전문가 맥스 애덤스가 쓴 <나무의 모험>은 나무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다. 저자는 영국 더럼주에 위치한 약 16만 제곱미터 면적의 삼림지를 사들여, 그곳에서 3년 동안 생활하며 나무에 관해 집요하게 관찰하고 연구했다. 이 책은 역사 속에서 나무가 어떤 상징으로 쓰였는지, 인류의 문명과 진화에 나무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 나무가 어떤 화학적, 공학적 원리로 생존하는지, 숲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은 무엇인지 등을 낱낱이 밝힌다.


저자는 지구상에 나무만큼 대단하고 영리한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생명력과 번식력을 지닌 놀라운 생물이다.나무는 개체가 무려 6만 종에 달하고, 동물이나 그 어떤 식물보다 회복력이 좋고, 종류에 따라서는 수천 년을 살기도 한다. 나무들이 의사 소통을 통해 서로 동반자 관계 혹은 연맹을 형성한다는 것은 이미 전문가들의 연구로 밝혀진 바 있다. 과학계에서는 식물이 잎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태양광을 양자 묶음으로 조절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 


나무는 언제 심는 게 좋을까. 막연하게 식목일 즈음이 가장 좋지 않을까 했는데, 이 책에 따르면 가을이 최적기라고 한다. 나무를 심을 때는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바람이 부는 날은 뿌리가 건조해질 수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이왕이면 부슬비가 내리는 축축한 날씨가 좋다. 나무를 키울 때 주의할 점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무도 생물이기 때문에 사람과 마찬가지로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 일반적으로 숲속의 나무는 거름이 필요 없지만 과실수는 예외다.


과거와 비교하면 지구상에서 숲의 면적이 크게 줄었다. 저자는 숲의 면적을 늘리거나 보전하기 위한 제안도 한다. 그 중 하나는 숲 학교 운영이다.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숲을 산책하고 숲에 대해 공부하면 몸도 튼튼해지고 숲을 사랑하는 마음도 커진다. 저자처럼 자기 명의의 숲을 보유하는 방법도 있다. 여럿이서 공동으로 숲을 구입해 관리할 수도 있다. 트리하우스를 짓거나 오두막을 지어 임대하거나, 과실수를 심어 열매를 팔거나 제품으로 만들어 팔면 돈도 벌고 숲도 보전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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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부터 내 감정에 지지 않기로 했다
리스창 지음, 이지수 옮김 / 정민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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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는 모든 것이 멋지고 근사해 보이는 반면,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모든 것이 엉망이고 심란해 보이는 경험 말이다. 그만큼 사람의 감정과 기분은 많은 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중국의 자유기고가 리스창의 <나는 오늘부터 내 감정에 지지 않기로 했다>는 감정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어떤 사람은 시련이 닥쳤을 때 겁을 먹고 잔뜩 위축되어 앞날을 걱정하기만 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믿고 행동함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한다. 이들 중 세상을 바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정답은 물론 후자다. 노력한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시련에 맞서는 태도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앞으로 얼마나 노력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시련에 부딪히거나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담담히 맞서야 한다.


행복의 열쇠를 남에게 맡기는 사람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어떤 판매원이 이렇게 호소한다. "매번 까다로운 손님들만 있으니 일이 정말 재미없어요." 어떤 판매원은 또 이렇게 호소한다. "우리 사장님은 같이 일하기 너무 힘들어요." 이 사람들은 행복의 열쇠를 손님이나 사장의 손에 맡겼다. 행복의 열쇠가 자기 손에 있지 않으니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의 열쇠를 스스로 쥐고 있는 사람은 절대 남 탓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타인이 자신을 기쁘게 해주기만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먼저 타인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나눠줄 방법을 찾는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면 힘들어지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한 철학자는 말했다. "사랑을 품고 푸성귀를 먹는 것이 분노를 품고 산해진미를 먹는 것보다 낫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분노와 증오를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품어야 한다.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배출하면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다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 입는 일은 당연히 일어난다. 양보하고 용서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인연과 기회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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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 자존과 관종의 감정 사회학
강보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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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덕질, 먹방, 리액션 비디오, 인성짤, 탕진잼 등의 문화현상은 한국 사회의 어떤 모습과 변화를 반영하는 걸까. 한국예술종합학교, KAIST, 연세대학교에서 영상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계간지 <1/n> 에디터와 <한겨레 21> 필자를 거쳐 현재는 대학에서 미디어 관련 강의를 하고 있는 강보라의 책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에 그 답이 나온다.


이 책은 지난 몇 년 간 한국 사회 곳곳에서 회자된 다양한 미디어, 문화현상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고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1장에서는 혼밥, 개인 취향, 덕질 등 갈수록 더 강조되는 개인이라는 개념을 여러 관점에서 분석한다. 2장에서는 먹방, 리액션 비디오, 인성짤 등의 소재를 중심으로 일상 안에 내재된 타인의 시선을 풀이한다. 3장에서는 오늘날의 소비 패턴과 주거 양식, 성장에 대한 고민, 지식을 선택하는 과정 등을 다각도로 바라본다. 4장에서는 기계와의 소통, 라이브 방송, 랜선 관계, 인증 문화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옮겨간 우리의 삶이 변화하는 방식을 들여다본다.


책의 제목인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는 얼마 전 소셜미디어를 수놓은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꼭 나만."이라는 문구를 차용했다. 한 어린이가 새해 소망으로 적어냈다고 알려진 이 한 마디는 '우리'보다는 '나', 집단보다는 개인이 잘 되기를 소망하는 요즘 사람들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이처럼 '나'를 중시하는 문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이기주의가 판을 치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이타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과거에는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이 개인을 지원하고 보호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타성을 발휘하면 도리어 손해를 보는 문화이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기성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를 중시하는 문화가 발전하면서 개인의 취향, 이른바 '개취'를 존중해달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특이한 점은 무엇을 좋아하고 선호하는 취향을 존중해달라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무엇을 싫어하고 꺼리는 취향을 존중해달라는 목소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들 수 있다. 2017년 페이스북에 개설된 이 모임은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취향 또는 기호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원래 이 음식엔 00가 들어가야 해.", "편식하지 마.", "주는 대로 먹어." 등 강요된 사회적 규범에 시달렸던 개인의 억압된 욕망이 얼마나 강한 응집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를 중시하는 문화가 발전하는 가운데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는 문화도 발전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리액션 비디오다. 리액션 비디오는 말 그대로 누군가의 반응을 담은 영상을 뜻한다. 리액션 비디오가 인기를 끈 것은 유튜브가 등장한 이후의 일이지만, 과거 미국 방송의 '홈 비디오' 프로그램이나 일본 방송의 '그림 속 그림', 한국의 '몰래카메라' 같은 프로그램도 타인의 반응을 보면서 즐기기 위한 목적이라는 점은 같다. 이러한 리액션 비디오는, 영상을 보는 사람은 우월적인 시각에서 타인의 반응을 감상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영상에 찍히는 자신의 반응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평가받으면서 만족을 느낀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의 독특한 감성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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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
배윤민정 지음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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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머니가 뉴스를 보시고는 크게 한숨을 쉬셨다. 결혼한 여자가 시댁 식구들을 부르는 아주버님, 형님, 서방님, 도련님 같은 호칭이 잘못된 걸 이제야 아셨다고, 그런 줄도 모르고 삼십 년 넘도록 '존경하지도 않는' 시댁 식구들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붙였던 세월이 너무나 아깝다고 하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 책을 쓴 배윤민정의 뉴스 인터뷰를 보셨던 것 같다. 저자 배윤민정은 2018년에 시가 구성원들에게 가족 호칭을 바꿔보자고 했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자신이 참고 입을 다물어야만 가정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가, 여성차별적인 사회의 관습을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이후 광장에 나가 가족 호칭 개정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홍보물을 통한 캠페인을 펼쳤다. 이때의 경험을 글로 엮어서 한국여성민우회 누리집과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이 책은 저자가 2018년 한 해 동안 한국 사회의 차별적인 가족 호칭을 바꾸려고 싸워온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가 '아주버님', '도련님', '형님' 같은 호칭을 바꿔보려고 했을 때, 저자는 곧바로 '어떻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그런 제안을 하냐'는 강한 거부반응에 부딪쳤다. 사회로 나가서 가족 호칭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결혼한 여자가 시가 구성원들을 부르는 호칭을 바꾸면 가족의 '위계'가 무너질 거라고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며느리는 원래 '낮은 위치'이니 다른 식구들을 높여서 부르는 게 맞다고, '그깟 호칭' 때문에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비난받았다.


가족에 위계가 필요할까. 가족 구성원 중에 누가 윗사람이고 아랫사람이며 그건 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선 연장자 남성이 가족 집단에서 가장 위에 있는 존재이고, 나머지 구성원은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각각의 지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여겼다. 이 경우 '며느리'의 자리는 가장 말단이다. 며느리들 사이에도 배우자인 남자의 나이를 기준으로 위계가 만들어진다. 형의 아내가 남동생의 아내보다 나이가 어려도 무조건 호칭은 '형님'이다(반대로 언니의 남편이 여동생의 남편보다 나이가 어려도 '형님'이라고 불리는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 이는 매사를 남성 위주로 판단하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반영된 결과다.


저자는 기존의 가족 호칭을 대체할 표현을 찾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중립적인 호칭이 아예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 전 화제가 된 가수 설리의 사건에서도 보듯이, 한국 사회에선 '씨'라는 표현을 낮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님'이라는 표현이 남용되고(마이클 잭슨 선배님?), 공공기관 등에선 아무에게나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전 선생님이 아닌데요?). 정리되지 않은 호칭의 폐해는 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게 된다. 가족 관계 내에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고' '여성'인 며느리들이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호칭의 희생자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깟 호칭' 때문에 시끄럽게 군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깟 호칭'이라고 생각한다면 까짓것 못 바꿀 것도 없지 않나. 불편하고 부당한 일을 참지 않고 공론화한 저자가 멋지고 존경스럽다. 나도 힘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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