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
배윤민정 지음 / 푸른숲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어머니가 뉴스를 보시고는 크게 한숨을 쉬셨다. 결혼한 여자가 시댁 식구들을 부르는 아주버님, 형님, 서방님, 도련님 같은 호칭이 잘못된 걸 이제야 아셨다고, 그런 줄도 모르고 삼십 년 넘도록 '존경하지도 않는' 시댁 식구들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붙였던 세월이 너무나 아깝다고 하셨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 책을 쓴 배윤민정의 뉴스 인터뷰를 보셨던 것 같다. 저자 배윤민정은 2018년에 시가 구성원들에게 가족 호칭을 바꿔보자고 했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자신이 참고 입을 다물어야만 가정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사실에 좌절했다가, 여성차별적인 사회의 관습을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이후 광장에 나가 가족 호칭 개정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홍보물을 통한 캠페인을 펼쳤다. 이때의 경험을 글로 엮어서 한국여성민우회 누리집과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이 책은 저자가 2018년 한 해 동안 한국 사회의 차별적인 가족 호칭을 바꾸려고 싸워온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가 '아주버님', '도련님', '형님' 같은 호칭을 바꿔보려고 했을 때, 저자는 곧바로 '어떻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그런 제안을 하냐'는 강한 거부반응에 부딪쳤다. 사회로 나가서 가족 호칭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결혼한 여자가 시가 구성원들을 부르는 호칭을 바꾸면 가족의 '위계'가 무너질 거라고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며느리는 원래 '낮은 위치'이니 다른 식구들을 높여서 부르는 게 맞다고, '그깟 호칭' 때문에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비난받았다.


가족에 위계가 필요할까. 가족 구성원 중에 누가 윗사람이고 아랫사람이며 그건 대체 누가 정하는 걸까.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선 연장자 남성이 가족 집단에서 가장 위에 있는 존재이고, 나머지 구성원은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각각의 지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여겼다. 이 경우 '며느리'의 자리는 가장 말단이다. 며느리들 사이에도 배우자인 남자의 나이를 기준으로 위계가 만들어진다. 형의 아내가 남동생의 아내보다 나이가 어려도 무조건 호칭은 '형님'이다(반대로 언니의 남편이 여동생의 남편보다 나이가 어려도 '형님'이라고 불리는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 이는 매사를 남성 위주로 판단하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반영된 결과다.


저자는 기존의 가족 호칭을 대체할 표현을 찾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중립적인 호칭이 아예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 전 화제가 된 가수 설리의 사건에서도 보듯이, 한국 사회에선 '씨'라는 표현을 낮춤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님'이라는 표현이 남용되고(마이클 잭슨 선배님?), 공공기관 등에선 아무에게나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전 선생님이 아닌데요?). 정리되지 않은 호칭의 폐해는 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게 된다. 가족 관계 내에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고' '여성'인 며느리들이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호칭의 희생자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깟 호칭' 때문에 시끄럽게 군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깟 호칭'이라고 생각한다면 까짓것 못 바꿀 것도 없지 않나. 불편하고 부당한 일을 참지 않고 공론화한 저자가 멋지고 존경스럽다. 나도 힘을 보태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