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이 공연을 보러 가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구경을 온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같이 들고 온 것이 있다. 카메라다. 요즘에는 조그마한 '똑딱이'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다들 주둥이가 대여섯 발은 나온 DSLR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곳곳에서 플래시가 터진다. 사람들은 카메라 구멍에 눈을 박고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공연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우리는 카메라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우리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즐길 뿐 결코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다. 내 앞에 지금 서 있는 것이 앙코르와트건 성 베드로 대성당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몰입하고 있는 것은 저 경치가 아니라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pp.107-8)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결'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이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동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다시 고백이 강요된다. 동성애자라는 특수한 정체성만을 공고화하고 자연화할 수 있는 '언제부터', '왜' 같은 질문이 이들에게 던져진다. (중략) 이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행위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오로지 '성적이기만 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한 동성애자는 자신의 일상에서 성 정체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2퍼센트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은 100퍼센트 성적이기만 한 존재로 취급받는다고 말한다. (pp.195-6)
이전까지는 가끔 등하교를 하는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버스를 탈 때 도무지 아이들의 언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은/는/이/가/을/를/다' 같은 말을 빼고 나면 남는 건 '졸라'와 '씨바'다. 가끔은 아이들 멱살을 잡고 "울부짖지 말고 말을 하란 말이야, 이것들아" 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아이들의 언어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냥 욕이라고 생각했던 '씨바'와 '졸라'가 아이들에게는 공감의 신호였다. 이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있음에도 다만 우리가 못 알아듣고 있었을 뿐이다. (pp.140-1)
길거리든 식당이든 연예인이 나타났다 하면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를 꺼내들고 일제히 사진을 찍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인을 보면 멀찍이서 보거나 겨우 용기를 내 악수를 청하거나 사인을 부탁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요즘은 사진부터 찍는다. 대체 왜 그럴까? 아무리 대단하고 유명한 연예인이 나타났다 한들 나와 똑같은 사람, 평등한 인간인데 왜 누구는 플래시를 받는 사람이고 누구는 찍는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조차 없다. 뻔뻔한 건지, 자존감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연예인 중에는 그런 시선과 관심을 불편해하는 이도 있을텐데 사람들은 그러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카메라 렌즈 앞에 놓이는 순간 연예인도 뭣도 아니고, 그저 피사체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연예인만 찍는 게 아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불꽃놀이 대회를 구경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들 역시 하나같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시커먼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광경. 맨눈으로 보기에도 아까운 그 광경을 왜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 너머로만 보려고 하는가. 왜 지금 당장 보지 않고 나중에 보려고 하는가. 여행지에서도,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도, 입학이나 졸업 같은 기념할 만한 때에도 사람들은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않고 사진부터 찍으려고 든다. 사진. 대체 사진이 뭐길래.
엄기호의 2011년 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를 보니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눈이 있어도 카메라라는 대체 감각기관 없이는 온전히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사에도 그렇게 무감각하다. 사회 지도층이 얽힌 논란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잘못된 회사 방침이나 관행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성희롱을 당해서 쫓겨나듯이 회사를 떠나는 여자 직원을 보면서 같이 싸워주기는커녕 위로도 못해줄 만큼 마음도 굳었다. '무감각증'은 오로지 저들보다 힘없고 약한 이들에 대해서만 예외다. 이제 막 들어온 인턴 사원의 오타나 지각에는 시시콜콜 지적을 하고, 커피 전문점 점원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사장 나오라며 열불을 낸다. 누구나 바쁜 출근길에 어깨를 부딪친 젊은 여자에게는 시비를 걸고 욕을 한다. 어린 아이돌 가수나 젊은 여자 연예인이 어쩌다 방송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스캔들이 나면 득달같이 달려들며 훈수를 둔다. 비주류, 소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주류, 소수자 문제를 무시하고 묵살했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과민반응의 시대가 왔다. 주로 표적이 되는 대상은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다.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을 동성애자를 오로지 동성애자로만, 소수자를 소수자로만 본다. 그들이 꼬박꼬박 세금도 내고 투표권도 행사하고 일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똑같은 시민이라는 사실은 보지 않는다(또는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에만 과민반응한다. 어디 이들뿐인가? 저자는 청소년 문제, 대학 문제, 20대 문제 역시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10대 청소년은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집에서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형, 오빠, 누나, 언니, 동생이다. 누군가에게는 친구이며, 종교집단의 일원이고, 인터넷 카페나 팬클럽의 회원이며, 블로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10대 청소년을 그저 학생으로 규정하고, 조금이라도 학생의 본분에서 벗어나면 문제아로 낙인을 찍는다. 방황하는 대학생, 취업 못하는 20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역할로만 규정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드물다. 10대든 60대든, 여자든 남자든, 주류든 비주류든, 다수자든 소수자든, 몸뚱이 하나로 수십, 수백 개의 역할을 짊어지고 사는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누구나 똑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들이 힘들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감각이 없다. 무감각하다.
대체 이 감각없음, 무감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철학의 빈곤 때문일 수도 있고, 인문학의 부재 때문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의 병폐 때문일 수도 있고, 뿌리깊은 사회 구조의 고착 때문일 수도 있고, 법과 제도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저자는 여기에 언어의 문제를 추가한다. 저자에 의하면 의사들이 어려운 의학 용어로 이야기를 하고 판검사나 변호사들이 일반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법률 용어를 섞어 이야기 하듯이 아이들은 저들의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가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는 것에 항의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은 꾸짖는다. 배운 사람, 가진 사람에게는 무감각하고, 만만한 사람, 못 배운 사람, 못 가진 사람들에게만 과민반응한다. 언제쯤 이들이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중 다수는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 사회의 문제, 구조의 문제, 제도의 문제를 아예 못 보고 못 들은 거라면 몰라도,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사는 거라면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쯤 내가 잘못 산 게 아니라 온전히 사회의 탓이라고 안도(?)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아직도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