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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안하다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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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은 애니메이션을 인문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고려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저자 정지우는 <청춘 인문학>, <삶으로부터의 혁명> (서평 http://blog.naver.com/minorstars/100178948811) 등의 인문학에 관한 책을 주로 써왔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편도 아니고, 더군다나 인문학에는 조예가 깊지 않은데, 막상 읽어보니 유명한 작품과 작가들 위주라서 친숙하고, 학문적인 내용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책에는 <그렌라간>, <원피스>, <강철의 연금술사>, <충사>, <진격의 거인> 등의 작품들과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주로 소개되어 있다. 먼저 1부에서 저자는 <그렌라간>과 <원피스>를 통해 중세와 근대, 현대의 사회 구조와 인간상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한다. 크게 중세는 신을, 근대는 국가를, 현대는 개인을 중시하는 것이 차이라고 볼 때, 인류의 진보를 긍정하고 개인보다 국가와 사회를 중시하는 <그렌라간>은 근대를, 각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고 다원적인 가치를 긍정하는 <원피스>는 현대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나아가 <원피스>는 유동적이고 파편화된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제시한 '액체 시대' 개념과 일맥상통하며, 자기 자신만의 꿈, 신념, 열정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이사야 벌린이 제시한 '낭만주의적 인간' 개념과 일치한다. <원피스>가 십여 년 간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잡은 현상에는 이같은 인문학적인 배경이 있구나 싶었다.



2부에서는 <강철의 연금술사>, <충사>,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을 통해 현대의 문제와 그 대안에 대해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문제로는 소비 중독, 불안, 자존감의 상실 등을 들 수 있는데, 환상의 세계를 그린 만화 속에도 이러한 문제들이 내포된 경우는 많다. 여기에 대해 <강철의 연금술사>는 성공이나 부, 명예 등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데서 오는 만족, 그리고 타인과 나누는 우정과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대안적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진격의 거인>은 더 심오하다.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존의 작품들은 개인적인 욕망이 사회적인 가치에 의해 좌절되고 희생되는 경우를 그리는 일이 많았으나 <진격의 거인>은 다르다. 주인공 에렌이 사회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개인적인 욕망 때문이다. 개인적 만족이 사회나 타인의 이득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 개인과 집단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다는 점을 긍정한 점이 차별화된 부분이며, 인기 요인으로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유명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얼마 전 은퇴 선언을 하여 많은 팬들을 아쉽게 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사회비판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의 작품들도 더러 그렸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 같은 전원적이고 환상적인 내용의 작품들을 자주 그렸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것을 추구하는 대중의 취향을 고려할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리는 전통적이고 향토적, 환상적인 세계는 언뜻 핀트가 안맞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상상과 환상, 가능성을 답으로 제시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과 환상, 그로 인해 만들어진 세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또 우리에게 다른 꿈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 (pp.148-50) 신카이 마코토와 호소다 마모루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현대 문명이 잃어가고 있는 감수성이 역으로 현대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주고, 인문학이나 문화 비평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안한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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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교양을 읽는다 - 인문고전 읽기의 첫걸음
오가와 히토시 지음, 홍지영 옮김 / 북로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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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팟캐스트로 철학박사 강신주 선생님의 <다상담> 강연을 들었다. 상담이라고 하면 이제까지는 심리학자 또는 정신분석 전문가가 하는, 지극히 과학적인 상담만 생각했는데, 과학이 아닌 인문학을 공부한 철학자도 대중들의 일상적인 고민을 상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의심이 되기도 하여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들어보니 김수영 시인의 시라든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문학 작품에서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심리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묘하게 납득이 되고, 상담 내용도 의외로 귀에 쏙쏙 들어와서 한가할 때는 하루에 몇 편씩 내리 듣기도 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취업이나 연애, 결혼 같은 일상적인 고민도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니 다시 보였다. 그저 어렵고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철학이라는 학문이 이다지도 일상 생활에 가깝고 고민도 해결해주는 학문이었을 줄이야! 새삼 철학이 달리 보였다.

 

 

오가와 히토시 역시 철학으로 일상적인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대중 친화적인 일본의 철학자다. 그는 교토대 법학부 출신의 엘리트이면서도 종합상사 직원, 아르바이트, 시청 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 경력이 있는데, 현재는 도쿠야마 공업고등전문학교 준교수로 재직하면서 상점가에서 '철학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전작 <인생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서평 http://blog.naver.com/minorstars/100176441956)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제목 그대로 연애, 결혼, 인간관계 등 일상적이면서도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겪는 인생의 고민들에 대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데카르트 등 유명한 철학자들의 격언과 이론을 빌려 해답을 제시하는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강신주 선생님의 강연처럼 일상적인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과 철학을 연결하고, 철학으로서 인생의 고민을 해결하려는 시도만큼은 좋았다.

 

 

오가와 히토시의 신간 <철학의 교양을 읽는다>는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부터 파스칼의 <팡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등 철학사의 고전 48편을 책의 내용과 구성, 저자의 생애와 집필 동기, 배경, 당대 또는 후세에 미친 영향 등을 중심으로 요약하여 소개한 철학 개론서다. 철학 개론서라고 하면 보통 시대순이나 학파, 지역별로 구성한 것이 많은데, 이 책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철학', '나를 발견하기 위한 철학', '올바른 판단을 위한 철학',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철학', '인간 사회의 발전을 생각하기 위한 철학'으로 저자 나름의 분류 체계를 만든 점이 특징이다. 개론서이기는 하지만 (난해하기로 유명한) 철학 분야의 책이다보니 내용이 다소 어렵기는 하다. 전작 <인생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처럼 일상적인 고민을 철학적으로 해결해주는 대중 친화적인 내용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철학에 관심이 있지만 막상 배우자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려운 데다가 두껍기까지 한 철학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는 철학 초보, 초심자들에게는 유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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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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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2학년 때의 담임은 정말 돈을 밝히는 교사였다. 그는 공부는 잘하지만 단칸 셋방에 사는 통에 촌지를 바칠 여력이 되지 못하던 나를 많이 미워했다. 학생들의 선거로 반장이 되었지만 그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했다. 심지어 다른 학생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며 저런 '나쁜 어린이'가 되지 말라는 말도 했었다. 울며 집에 돌아온 나를 본 어머니는 며칠 후 화장품을 사서 담임을 찾아가셨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어머니가 돌아간 다음 그 교사는 "누가 국산 화장품을 쓴다고......" 하면서 어머니가 놓고 간 화장품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p.7)



이 이야기는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의 저자 엄기호가 서문에서 밝힌 경험담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학창시절의 안좋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평소에도 시도때도 없이 떠올라 날 괴롭히는 기억들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었건만, 내가 다니던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책의 1장 <교실이라는 정글>을 보면 수업을 듣지 않고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 입시에 도움이 되는 수업만 골라 듣는 아이들의 이야기부터 학교 폭력, 교사와 학부모 간의 갈등 문제가 나오는데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는 다행히도 목격한 일이 없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장 <교무실, 침묵의 공간>과 3장 <성장 대신 무기력만 남은 학교>의 내용들은 처음 보는 것이 많았다. 내가 지금 교사도 아니고, 교대나 사범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교사의 교, 선생의 선 자만 들어도 치를 떨 만큼 관심도 없다보니 권위적인 교직 내 분위기, 선후배, 동료 교사 간의 갈등 같은 일은 알 길이 없었던 탓이다. 구세대 교사들과 신세대 교사들의 갈등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최근 임용되는 교사들은 수능 성적 상위권이고 (수능 성적이 좋게끔 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만큼) 가정 형편도 좋다. 내 친구들 중에도 교대, 사범대를 나왔거나 하다못해 교직이수를 한 친구들은 대개가 그렇다. 게다가 이런 친구들은 대학 시절에도 임용 준비를 하느라 색다른 경험을 하거나 교대, 사범대 출신 외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 아이들이 소위 말하는 문제아, 꼴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 선생들이 있는 학교에 나는 내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다. 내가 겪어본 구세대 교사들은 더더욱 싫다. 아직 아이는커녕 결혼도 안 했지만, 가능하다면 대안학교에 보내거나 홈스쿨링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이게 비단 교사들만의 문제일까?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가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지적했듯이 사법부에서도 그럴 것이고, 행정부, 의학계, 학계 등 점점 엘리트화, 세습화, 경직화, 폐쇄화되는, 소위 말하는 '순혈집단'에서는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사법부와 의학계가 폐쇄적, 경직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직업 또는 직위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아버지에서 아들로 세습되고, 다른 분야, 다른 계층의 인간들과 전혀 소통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이후에는 그런 현상을 행정부, 학계가 겪었고, 이제는 철밥통으로 불리는 교사, 공무원 또는 대기업이 겪고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 다양성이 없는 집단은 환경의 변화에 쉽게 망한다. 사법부, 의학계의 병폐, 행정부, 학계의 폐단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교사, 공무원, 대기업 임원 집단이 어떤 문제를 낳을지는 뻔하다. 그들은 각종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들을 욕하면서도 자기 자식들은 거기에 집어넣으려고 갖은 애를 쓸 것이다. 사법부, 의학계를 욕하면서 제 자식은 판검사, 의사가 되기 바라고, 정부와 교수 사회를 욕하면서 제 자식은 고시에 패스하고 교수가 되기 바라며, 이제는 학교라면 치를 떨었던 사람들이 제 자식을 교대에 보내 선생 만들려고 하고, 공무원, 대기업 직원이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는 곳이었어야 할 학교는 악순환을 만드는 곳이 되었고, 이제는 그 자체가 악순환에 편입되었다. 그동안의 악순환이 점점 더 확대되고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학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을 벗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사회다. 학교에 대한 기억이 대부분 좋지 않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비극이고 사회적으로는 큰 손해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두렵다면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내 아이를 아무 걱정없이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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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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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을 보러 가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구경을 온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같이 들고 온 것이 있다. 카메라다. 요즘에는 조그마한 '똑딱이'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다들 주둥이가 대여섯 발은 나온 DSLR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곳곳에서 플래시가 터진다. 사람들은 카메라 구멍에 눈을 박고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공연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우리는 카메라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우리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즐길 뿐 결코 작품을 감상하지 않는다. 내 앞에 지금 서 있는 것이 앙코르와트건 성 베드로 대성당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몰입하고 있는 것은 저 경치가 아니라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pp.107-8)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결'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이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동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다시 고백이 강요된다. 동성애자라는 특수한 정체성만을 공고화하고 자연화할 수 있는 '언제부터', '왜' 같은 질문이 이들에게 던져진다. (중략) 이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행위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오로지 '성적이기만 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한 동성애자는 자신의 일상에서 성 정체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2퍼센트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은 100퍼센트 성적이기만 한 존재로 취급받는다고 말한다. (pp.195-6)

 

이전까지는 가끔 등하교를 하는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버스를 탈 때 도무지 아이들의 언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은/는/이/가/을/를/다' 같은 말을 빼고 나면 남는 건 '졸라'와 '씨바'다. 가끔은 아이들 멱살을 잡고 "울부짖지 말고 말을 하란 말이야, 이것들아" 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아이들의 언어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냥 욕이라고 생각했던 '씨바'와 '졸라'가 아이들에게는 공감의 신호였다. 이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있음에도 다만 우리가 못 알아듣고 있었을 뿐이다. (pp.140-1)

  

 

길거리든 식당이든 연예인이 나타났다 하면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를 꺼내들고 일제히 사진을 찍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인을 보면 멀찍이서 보거나 겨우 용기를 내 악수를 청하거나 사인을 부탁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요즘은 사진부터 찍는다. 대체 왜 그럴까? 아무리 대단하고 유명한 연예인이 나타났다 한들 나와 똑같은 사람, 평등한 인간인데 왜 누구는 플래시를 받는 사람이고 누구는 찍는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조차 없다. 뻔뻔한 건지, 자존감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연예인 중에는 그런 시선과 관심을 불편해하는 이도 있을텐데 사람들은 그러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카메라 렌즈 앞에 놓이는 순간 연예인도 뭣도 아니고, 그저 피사체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연예인만 찍는 게 아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불꽃놀이 대회를 구경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들 역시 하나같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시커먼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광경. 맨눈으로 보기에도 아까운 그 광경을 왜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 너머로만 보려고 하는가. 왜 지금 당장 보지 않고 나중에 보려고 하는가. 여행지에서도,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도, 입학이나 졸업 같은 기념할 만한 때에도 사람들은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않고 사진부터 찍으려고 든다. 사진. 대체 사진이 뭐길래.

  


엄기호의 2011년 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를 보니 저자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눈이 있어도 카메라라는 대체 감각기관 없이는 온전히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사에도 그렇게 무감각하다. 사회 지도층이 얽힌 논란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잘못된 회사 방침이나 관행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성희롱을 당해서 쫓겨나듯이 회사를 떠나는 여자 직원을 보면서 같이 싸워주기는커녕 위로도 못해줄 만큼 마음도 굳었다. '무감각증'은 오로지 저들보다 힘없고 약한 이들에 대해서만 예외다. 이제 막 들어온 인턴 사원의 오타나 지각에는 시시콜콜 지적을 하고, 커피 전문점 점원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사장 나오라며 열불을 낸다. 누구나 바쁜 출근길에 어깨를 부딪친 젊은 여자에게는 시비를 걸고 욕을 한다. 어린 아이돌 가수나 젊은 여자 연예인이 어쩌다 방송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스캔들이 나면 득달같이 달려들며 훈수를 둔다. 비주류, 소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주류, 소수자 문제를 무시하고 묵살했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과민반응의 시대가 왔다. 주로 표적이 되는 대상은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다.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을 동성애자를 오로지 동성애자로만, 소수자를 소수자로만 본다. 그들이 꼬박꼬박 세금도 내고 투표권도 행사하고 일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똑같은 시민이라는 사실은 보지 않는다(또는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에만 과민반응한다. 어디 이들뿐인가? 저자는 청소년 문제, 대학 문제, 20대 문제 역시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10대 청소년은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집에서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형, 오빠, 누나, 언니, 동생이다. 누군가에게는 친구이며, 종교집단의 일원이고, 인터넷 카페나 팬클럽의 회원이며, 블로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10대 청소년을 그저 학생으로 규정하고, 조금이라도 학생의 본분에서 벗어나면 문제아로 낙인을 찍는다. 방황하는 대학생, 취업 못하는 20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역할로만 규정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드물다. 10대든 60대든, 여자든 남자든, 주류든 비주류든, 다수자든 소수자든, 몸뚱이 하나로 수십, 수백 개의 역할을 짊어지고 사는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누구나 똑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들이 힘들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감각이 없다. 무감각하다. 

 

 

대체 이 감각없음, 무감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철학의 빈곤 때문일 수도 있고, 인문학의 부재 때문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의 병폐 때문일 수도 있고, 뿌리깊은 사회 구조의 고착 때문일 수도 있고, 법과 제도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저자는 여기에 언어의 문제를 추가한다. 저자에 의하면 의사들이 어려운 의학 용어로 이야기를 하고 판검사나 변호사들이 일반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법률 용어를 섞어 이야기 하듯이 아이들은 저들의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가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는 것에 항의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은 꾸짖는다. 배운 사람, 가진 사람에게는 무감각하고, 만만한 사람, 못 배운 사람, 못 가진 사람들에게만 과민반응한다. 언제쯤 이들이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중 다수는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 사회의 문제, 구조의 문제, 제도의 문제를 아예 못 보고 못 들은 거라면 몰라도,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사는 거라면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쯤 내가 잘못 산 게 아니라 온전히 사회의 탓이라고 안도(?)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아직도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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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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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에는 진짜 자아를 찾고 표현하는 것이 별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자아가 어떤 존재인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자기소개는 믿을 만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반면에 새로운 심리학의 구상 속에서 진짜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 불투명한 존재가 되었고, 이로써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기했다." (p.63) 

   

응답자 : 음- 나는 질투심이 있습니다. 질투심이 아주 강합니다. 질투심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때문에 어머니 곁을 떠났고, 나는 어머니와 살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어머니는 계속 나한테 남자를 믿으면 안 된다고 했었어요. 내 질투심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요. (중략) 래리와 나는 둘 다 자의식이 아주 강한 부류예요. 우리 둘 다 정신분석학과 치료학에 관심이 아주 많고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일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하고 분석도 했어요. 그러니까 조치라고 하면, 그때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 그때 일을 이해한 것, 래리한테 나를 사랑한다는 말과 다른 여자 때문에 나를 버리는 일은 없다는 말을 계속 들은 것 정도예요.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가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감정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덕분에 그때 일을 이겨낸 것 같아요. (pp.135-6)

 

 

프랑스 출신의 커뮤니케이션학자 에바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를 읽었다. 제목만 보아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이 어떻게 자본화되는지를 다룬, 경제학 또는 심리학, 사회학 계열의 책일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철학, 커뮤니케이션학, 언어학적인 내용이 많았다. 먼저 저자는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심리학이 어떻게 자본주의와 연결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원래 인간의 감정은 학문의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인간의 불투명하고 복잡한 감정을 연구하는 심리학은 미국의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호손 실험'을 비롯해 직장내 문화와 인간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에도 기여했고, 데일 카네기의 저서를 비롯한 자기계발서, 실용서 열풍에도 한몫했다. 오프라 윈프리쇼를 비롯한 TV 토크쇼의 높은 인기, 유명인의 자서전 출간 열풍에도 영향을 끼쳤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심리학은 '생산성 언어 및 자아 상품화와 결탁함으로써' 크게 기여했으며(p.203), 여기에는 긍정적인 영향만큼이나 부정적인 영향도 컸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어떨까? 저자는 교육 수준이 다른 두 사람의 인터뷰를 예로 들며 개인의 삶에 심리학이 어떻게 유익하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한다. 박사 출신의 이 여성은 남편 역시 철학 교수로 부부 모두 교육 수준이 높고 심리학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정신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심리학이라는 툴(tool)을 이용해 자기의 감정을 이해하고 심리학적 언어로 표현하며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는 일을 반복해왔다. 저자는 이 부부에게 치료언어와 감정지능은 실질적인 문화자원이며, 감정능력 역시 사회자본, 또는 신분상승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본의 한 형태이자 평범한 중간계급 성원들이 사적 영역에서 평범한 행복을 얻도록 해주는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반대로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계급의 남성은 얼마전 아내가 집을 나간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며, 아내가 떠나간 이유를 기억하지도, 제대로된 언어로 설명하지도 못한다. (pp.135-8) 

 

 

이 분석은 교육 수준의 차이, 그 중에서도 심리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차이가 개인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심리학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삶의 질을 꾸준히 높여갈 수 있는 것과 달리,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심리학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그런 발상조차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미 경영과 문화 등 대부분의 산업 분야에서는 개인의 심리를 조종하고 조작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마련해두었으며,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일수록 여기에 포섭되고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에서의 인간관계와 온라인 데이트 문화 등에 대한 분석도 담겨 있다. 얇은 책이지만 생각해 볼만한 문제들이 다수 제기되어 있고, 학문적으로도 하나의 학문에만 구애받지 않고 여러 학문의 내용을 통합적으로 제시한 점이 색달랐다.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관심 있는 주제라면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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