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출판사 창비에서 <공부의 시대>라는 이름의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원로 역사학자 강만길, 미학자 진중권, 작가 유시민, 전 대법관 김영란, 정신과 의사 정혜신 등이 각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까지 체득한 공부법과 독서법을 소개하여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올여름 창비에선 <정치의 시대>라는 이름의 시리즈를 출간할 예정이다. 작년 말 불거진 박근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 등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시리즈로 보인다. 미학자 진중권, 국회의원 은수미, 변호사 최강욱, 역사학자 한홍구가 필자로 참여했다. 시리즈 출간을 앞두고 <정치의 시대> 시리즈 중 한 권을 먼저 만나 보았다. 내게 주어진 책의 필자는 은수미 전 국회의원. 오랜 시간 노동 문제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의미와 현실의 노동 문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청년 실업 문제 등에 대해 심도 있게 풀어놓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술이 발전해서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이 발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산재로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의자를 없애는 극소수가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면서 노동자를 쥐어짜고 있습니다. 사회가 의자놀이의 규칙을 따르면서 벌어지는 비극입니다. (26쪽) 


저자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 현실을 의자놀이에 비유한다. 의자가 10개 있고 사람이 10명 있으면 모두가 의자에 앉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사람 수와 똑같은 수의 의자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죽어라 경쟁하고, 대학교에서 스펙을 쌓아도 사회에 나오면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을 그 때문이다. 경기가 좋아지고 국민 소득이 높아져도 의자는 늘지 않는다. 내 자리 어디 갔냐고 물으면 '저기 너보다 능력 좋은 정규직이 앉아 있다', '공기업 철밥통이 앉아 있네', '네 부모가 차지하고 있잖아',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지방대 나왔으면서 눈만 높다'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 최근에는 정리해고, 성과연봉제, 명예퇴직, 비용 절감, 민영화 등 기업 입장에서 의자 수를 보다 쉽게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늘고 있다. 


백화점은 출퇴근, 매출, 접객 태도 등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고용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물론 백화점에도 정규직이 있긴 합니다. 10퍼센트를 넘지 않지만요. 아무런 근로계약 없이도 노동자를 지배할 수 있는 사회, 이게 하청 사회입니다. (21쪽) 


사회가 의자놀이의 규칙을 따르면서 두 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첫째는 하청 사회, 둘째는 포스트 민주주의이다. 하청 사회의 특징은 '노동자는 있는데 고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배달 대행업체나 백화점에서 직원을 직접 고용하지 않고 파견 회사에 소속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하청의 형태로 고용하고 고용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그 예다. 포스트 민주주의는 '시민은 가상 정치에 끌려들어 가고, 정치인은 판촉행사를 열고, 실제 정치는 기득권 1퍼센트가 밀실에서 진행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10여 년 전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가 쓴 책에 나오는 개념인데, 한국에선 2016년에 박근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드러나면서 정치가 밀실에 숨은 비선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 바 있다.

 

삼성이 정유라에게 주려던 220억 원만 있으면 배달로 생계를 유지하는 2만 명에게 최소 21년 동안 산재보험을 지원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벌 대기업은 박근혜 정권에, 최순실에게 돈을 줘서 대대손손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할 뿐이지요. (70쪽) 


저자는 노동 전문가이자 정치가로서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헌법 조항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실생활의 규칙으로 보장하는 '국민 기본선'을 비롯해 최저임금 인상, 실업급여 마련, 비정규직 노조 조직 등이 그 예다. 또한 저자는 어떻게 하면 광장의 촛불을 어떻게 일상으로 옮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모두가 자기 몫의 의자를 지니는 사회, 헌법이 생활의 규칙으로 적용되는 사회, 국민 개개인이 일상적으로 정치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 이 밖에도 국회의원 은수미의 이름을 대중에게 깊이 각인시킨, 2016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제정을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 후일담과 현재 한국 정치에 대한 조언, 일상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 등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강연록을 엮은 책이라서 문장이 어렵지 않고, 강연 말미에 진행된 질의응답 내용이 실려 있어 내용의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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