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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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미국 뉴욕 월 스트리트가 배경이라고 해서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같은 내용을 상상했고, 소설 초반은 어느 정도 그 상상을 충족했다. 하지만 2부를 읽고, 3부와 4부를 읽으면서 상상한 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래서 미국 평단과 언론이 찬사를 보내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고, HBO에서 케이트 윈슬렛 주연 드라마로 제작한다고 하는 거구나. (소설의 구성이 일종의 트릭인 작품인데, 과연 소설만큼 재미있을지...?) 


소설의 1부인 <채권>은 대대로 큰 부를 축적해온 집안의 후계자인 벤저민 래스크가 이제 막 태동한 금융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헬렌 브레보트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대공황 직후 아내가 의문의 병을 얻어 치료를 위해 유럽으로 떠나는 내용이다. 1부를 읽고 단편으로서도 꽤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2부 <나의 인생>으로 넘어갔는데, 1부와 2부의 내용이 다른 듯 닮고, 닮은 듯 달랐다. 일단 주인공 부부의 이름이 다르고, 세부사항이 다르고, 편집상 오류인가 싶은 부분이 1부에는 없지만 2부에는 있고... 


그렇게 아리송한 기분으로 3부 <회고록을 기억하며>로 넘어갔는데, 여기서 비로소 소설 전체의 윤곽과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3부의 화자인 아이다 파르텐자는 2부의 주인공인 앤드루 베벨이 비서로 고용해 자신의 자서전과 아내 밀드레드의 회고록을 쓰게 하는 여자다. 앤드루 베벨은 일 년 전에 나온 '어떤 소설'이 공공연하게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다룬 것을 불평하면서, 직접 자서전과 회고록을 펴내 대중의 오해를 바로잡겠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가난한 인쇄공의 딸인 아이다는 미국 최고 부자인 앤드루 베벨의 말과 그가 주는 돈에 현혹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자서전과 회고록을 쓴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앤드루 베벨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걸 깨닫고, 그가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급기야 아이다는 일자리를 잃거나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아마도 앤드루 베벨이 숨기고 있는 진실에 가장 가까운 기록일 밀드레드의 일기를 찾는다. 


그리하여 읽게 된 4부 <선물>의 내용은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일단 일기의 주인공인 밀드레드 베벨의 비극적인 생애가, 그러한 생애를 은폐, 날조하려고 한 앤드루 베벨의 행위가 충격적이었다. <채권>을 쓴 해럴드 배너조차 편견에 사로잡혀 베벨 부부를 오해한 것도 충격적이지만, 베벨 부부의 진실을 알고 있었던 아이다 파르텐자 역시 앤드루 베벨의 복수가 두려워 오십 년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는 걸 보면 그 또한 공범 아닐까. 


이런 식으로 남편과 아내, 의뢰인과 대필 작가 사이의 연합(trust) 또는 공모를 그린 소설이고, 그러한 연합 또는 공모의 기초는 신뢰(trust)인데, 그 신뢰의 기반 내지는 핵심이 거액의 돈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돈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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