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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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는 이승우 작가가 <사랑의 생애>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초반은 (이승우 작가의 소설답지 않게) 범죄 스릴러 소설 같은 분위기다. 주인공 황선호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유력 정치인의 측근이 된다. 선거를 몇 개월 앞둔 시점에 그가 모시는 정치인이 연루된 뇌물 스캔들이 터지고, 스캔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잠적하는 역할을 황선호가 맡게 된다. 


6개월 간 '보보민주공화국(보보)'으로 가게 된 황선호는 이 때만 해도 외국에서 한가롭게 지내다 연락이 오면 귀국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보보로 간 지 며칠 안 되어 보보 정부가 외부인은 모두 출국하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출국하고 싶어도 본국과 연락이 되기 전까지 출국할 수 없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황선호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자신을 보보로 보낸 사람들은 연락을 받지 않고, 외부인인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은 점점 더 매서워진다. 


이후 황선호는 과거에도 보보 정부가 이런 식으로 외부인들을 배척하고 추방하려고 했던 전적이 있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공동체를 이루어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뜻밖에도 이 공동체는 황선호의 가족 및 출생과도 관련이 있다. 타의에 의해 떠밀리듯 가게 된 낯선 나라에서 자신의 생의 비밀을 알게 된 남자.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비슷한 일이 나에게도 생긴다면, 그것은 행운일까 나락일까. 


<이국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여행이 예상하지 못한 만남과 깨우침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승우 작가의 전작인 <캉탕>과 유사하다. <캉탕>과 다른 점은 주인공이 스스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타의나 압력에 의해 떠나거나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건데, 떠나든 떠나지 않든 자신이 원해서 내린 결정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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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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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의 제목은 <나주에 대하여>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마음'이었다. 그럴 만큼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인간의 다양한 마음을 보여준다. 동경하는 마음, 걱정하는 마음, 비교하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 등등. 때로는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짠하고 때로는 징그럽고 극악하게도 느껴지는 다양한 마음들을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가 탁월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마음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 아닌 존재들과 구별하는 요소다. 인간은 A라는 변수 때문에 B라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A라는 변수 때문에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어서 B라는 선택을 하는 존재 아닌가.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실연을 하지만, 실연한 사람들 모두가 헤어진 연인의 새로운 연인을 스토킹하는 건 아니다. 실연에서 스토킹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개입된 마음. 그러한 마음에 대해 쓸 때 '이상하게 행복하다'는 작가의 다음 소설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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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탑의 살인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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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소설은 크게 본격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로 나뉜다고 알고 있다. 이 중에 나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마츠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 등), 치넨 미키토의 <유리탑의 살인>은 본격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드물게 재미있다고 느낀 작품이다. (괜히 2022년 서점대상 후보작, 15만 부 넘게 팔린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이 소설은 구성부터 특이하다. 프롤로그에 이치조 유마가 범인이라고 나와 있어서, 나는 처음에 이 소설이 범인의 시점으로 범행 과정을 설명하는 구성을 취하는 줄 알았다. 이어지는 본편에서 눈보라치는 산 속에 유리탑 모양의 고립된 저택이 있고, 이곳에 명탐정, 추리소설 작가, 잡지 편집장, 영능력자 등 개성 강한 손님들이 모이고, 이들을 모은 저택의 주인이 (프롤로그에 적힌 대로) 이치조 유마에 의해 살해되는 장면을 볼 때에도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 또 다른 인물이 살해된 채 발견되고, 또 이튿날 또 다른 인물이 살해된 채 발견되는 것을 보면서, 이치조 유마 외에 또 다른 범인을 찾는 것이 작가가 부여한 독자의 할 일임을 알았고, 문제의 또 다른 범인을 찾은 후에도 소설이 계속 이어지고 또 다른 트릭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 작가 보통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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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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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제노사이드> 등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최신작이다. 소설 배경이 1990년대 중반이라서 당시 사회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일본 버블 붕괴 이후 + 세기말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나)라면 향수를 많이 느낄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라서 등장 인물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 직접 발로 뛰거나 전화로 정보를 수집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 또한 오랫동안 이 장르를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반가움을, 새로 유입된 독자들에게는 신선함을 선사할 것 같다. 


잘나가는 전국 일간지 사회부 기자였던 마쓰다는 아내와 사별한 후 일을 그만두었다가 현재는 주부 대상 월간지 계약 기자로 일하는 상태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에게 어느 날 상사가 도시 괴담 취재를 제안한다. 카메라맨과 함께 다양한 괴담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던 그는, 다른 괴담들과 달리 '시모키타자와 3호 건널목 유령' 괴담만큼은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취재를 하고부터 새벽 1시 3분에 괴전화가 걸려올 리도, 수화기 너머로 듣기만 해도 괴로운 여성의 신음 소리가 들릴 리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시모키타자와 3호 건널목은 '사망사고 발생 지점'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는 만큼 '사고'가 빈번한 곳이라고, 마쓰다는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이곳에서 가장 최근에 인명사고가 일어난 건 15년 전이었고, 사고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사람이 죽은 건 1년 전이었다. 건널목 근처 건물에서 한 남성이 휘두른 칼에 찔린 것으로 보이는 여자가 건널목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사건인데, 피해자가 매춘에 종사하는 젊은 여성이라는 것 외에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피의자는 기소되고 사건은 종료 처리되었다.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과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다는 마음(유령으로라도 아내와 재회하고 싶은 마음)으로 마쓰다는 밤낮 없이 사건에 매달리는데, 매달릴수록 흔하디 흔한 도시 괴담 정도로만 여겼던 사건이 엄청난 규모의 범죄와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소설의 배경은 분명 1994년 일본인데, 연루된 범죄자들의 초상이나 범죄의 내용이 2023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인가. 악한 놈들은 여기나 저기나, 거기서 거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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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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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출간되었는데 올해 김태희, 임지연 주연 드라마로 제작, 방영 되면서 뒤늦게 화제가 된 소설이다. 나는 드라마 방영 직전에 이 소설을 읽었는데 아직 드라마를 못 봐서 소설과의 비교는 못 하겠다. 


이야기는 경기도 판교에 새로 지은 저택에서 시작된다. 저택의 안주인 주란은 의사 남편에 똑똑하고 잘생긴 아들을 둔 전업주부다. 어느 날 집들이 겸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친구들이 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한다. 사실 주란도 냄새가 난다고 전부터 남편에게 말했는데, 남편은 이웃집 거름 냄새가 넘어오는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주란은 매사에 완벽한 남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하지만, 낚시 약속이 취소되어 집에 있겠다고 했던 남편이 새벽에 갑자기 사라지고, 남편과 함께 낚시를 하기로 했던 남자가 시체로 발견되며 의심은 점점 더 커진다. 


한편 상은은 제약 회사에 다니는 남편을 두었고 자신은 가구 회사 쇼룸에서 일한다. 결혼 4년 만에 임신을 했지만 임신 사실을 알리면 퇴사하라고 할 것 같아서 회사에는 알리지 않은 상태다. 상은과 남편 윤범은 결혼 전 사이가 무척 좋았지만 결혼 후 돈 때문에 다투는 일이 크게 늘었다. 심지어 윤범은 상은에게 폭언과 폭행을 퍼붓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어느 날 상은은 윤범이 자신과 상의도 없이 한 달 전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따지자 손찌검까지 당한다. 몸도 마음도 상처 입은 상은에게 이튿날 들려온 남편의 사망 소식.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이 소설의 백미는 따로 진행되던 주란과 상은의 서사가 조금씩 겹치다 마침내 교차해 주란과 상은이 일종의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대목이다. 사는 지역으로 보나 경제, 사회적 계급으로 보나 서로 만날 일이 없었을 두 여자가 각자의 이유로 한 자리에서 만나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 각자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남자가 부유하든 아니든, 여자에게 경제력이 있든 없든, 아내에게 남편은 함께 의지하며 살아갈 동반자인 동시에 영원히 알지 못할 타인이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남성임을 보여준다. 


주란과 상은이 남편의 부정을 파헤치고 남편과 단절할 마음을 먹게 되는 계기가 둘 다 '자식'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만약 주란에게 지켜야 할 아들이 없었다면, 상은이 결혼 4년 만에 임신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이른바 '모성'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결말을 보면 오히려 모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선 '나쁜' 엄마가 되는 것도 불사해야 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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