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3계단>, <제노사이드> 등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최신작이다. 소설 배경이 1990년대 중반이라서 당시 사회상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일본 버블 붕괴 이후 + 세기말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나)라면 향수를 많이 느낄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라서 등장 인물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 직접 발로 뛰거나 전화로 정보를 수집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 또한 오랫동안 이 장르를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반가움을, 새로 유입된 독자들에게는 신선함을 선사할 것 같다. 


잘나가는 전국 일간지 사회부 기자였던 마쓰다는 아내와 사별한 후 일을 그만두었다가 현재는 주부 대상 월간지 계약 기자로 일하는 상태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에게 어느 날 상사가 도시 괴담 취재를 제안한다. 카메라맨과 함께 다양한 괴담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던 그는, 다른 괴담들과 달리 '시모키타자와 3호 건널목 유령' 괴담만큼은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취재를 하고부터 새벽 1시 3분에 괴전화가 걸려올 리도, 수화기 너머로 듣기만 해도 괴로운 여성의 신음 소리가 들릴 리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시모키타자와 3호 건널목은 '사망사고 발생 지점'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는 만큼 '사고'가 빈번한 곳이라고, 마쓰다는 처음에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이곳에서 가장 최근에 인명사고가 일어난 건 15년 전이었고, 사고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사람이 죽은 건 1년 전이었다. 건널목 근처 건물에서 한 남성이 휘두른 칼에 찔린 것으로 보이는 여자가 건널목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사건인데, 피해자가 매춘에 종사하는 젊은 여성이라는 것 외에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피의자는 기소되고 사건은 종료 처리되었다.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과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다는 마음(유령으로라도 아내와 재회하고 싶은 마음)으로 마쓰다는 밤낮 없이 사건에 매달리는데, 매달릴수록 흔하디 흔한 도시 괴담 정도로만 여겼던 사건이 엄청난 규모의 범죄와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소설의 배경은 분명 1994년 일본인데, 연루된 범죄자들의 초상이나 범죄의 내용이 2023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인가. 악한 놈들은 여기나 저기나, 거기서 거기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