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방각본 살인 사건 1 ㅣ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해가 바뀌는 동안 독감을 크게 앓았다. 병을 핑계로 하루 종일 자리보전하면서 이참에 오래전에 사놓고 손대지 않았던 '백탑파 시리즈'를 읽었다. 이제까지 출간된 '백탑파 시리즈'는 <방각본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목격자들>, <대소설의 시대>까지 모두 5종 10권(1종 각 2권). 이중 <목격자들>을 제외한 4종을 약 일주일 만에 독파했다.
'백탑파 시리즈'의 서막을 여는 작품인 <방각본 살인사건>은 시리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의금부 도사 이명방과 서얼 출신의 불우한 천재 김진이 처음 만나는 기념비 같은 작품이다. 이명방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충무공 곁에서 큰 공을 세운 의민공의 오대손이자 정조의 친인척으로, 약관에 무과 별시를 갑과 삼등으로 급제한 이래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한양 도성 안팎을 시끄럽게 만든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당대 인기 최고의 방각본 소설가 청운몽을 지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방각본 살인사건>은 이어지는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대소설의 시대> 같은 작품에 비하면 소설로서는 상대적으로 덜 재미있는 편이다. 다만 <방각본 살인사건>을 읽지 않으면 이명방과 김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어려우니 반드시 읽어야 한다. 셜록 홈스 시리즈로 치면 (사건 해결에 누구보다 열심이지만 범인 찾기에는 번번이 실패하는) '왓슨'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명방과 (사건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범인만은 귀신같이 찾아내서 번번이 왓슨을 열받게 하는) '셜록 홈스'의 역할을 수행하는 김진의 케미스트리는 이 작품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편이다.
이 작품은 소설로서의 재미보다도 시리즈의 서막을 연다는 의미가 더 크다. 무예를 가르쳐준 스승 백동수를 따라 백탑파의 모임에 가게 된 이명방이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유득공, 이덕무 같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받는 대목에선 전율을 느꼈다. 낭중지추 같은 이런 인물들이 한 시대 한 장소에 모여 있었다는 게 새삼 놀랍고, 만약 이들이 서얼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고 원활하게 등용되어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마음껏 펼쳤다면 조선의 국운이 그리 빨리 쇠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나 깨나 어명을 받드는 것만 생각하던 이명방이 김진을 비롯한 백탑파 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식의 폭이 확장되고 사고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는 경험을 하는 장면들 또한 놀라웠다.
'정조가 과연 성군인가?'하는 의문도 깊어졌다. <열하광인>에서 본격적으로 서술하겠지만, 정조는 1792년 문체반정을 통해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학자들의 새로운 문체를 배격하고 전통적 고문만을 사용하게 했다. 불안한 왕권을 다잡기 위한 정책임은 이해하지만, 때는 18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하기 직전이다. 이웃한 청나라와 일본에선 시운을 감지하고 새로운 문물과 문화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나마 조선에서 가장 먼저 외국 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세계정세에 촉각을 세웠던 북학파를 지원하기는커녕 탄압한 것은 돌이키기 힘든 실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정조가 노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북학파 및 남인을 지원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해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