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e Eyre (Paperback) - Penguin Classics
샬럿 브론테 지음 / Penguin U.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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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식이 건강에 좋지 않듯이, 편독이 나의 정신에 편향을 가중시킬 것을 염려하지만, 문학에 눈과 손이 가고 마음이 자석처럼 끌리는 것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다. 무모한 ‘독서 실험’으로 앞에서 리뷰를 쓴 비문학과 동시에 읽었으나, 아니 늦게 시작했으나, 더 일찍 읽기를 마쳤다. 비문학의 다소 딱딱한 내용 때문에 고전 Jane Eyer는 나의 상대적 뜨거운 애정을 받았다. 밤늦게까지 읽어도 졸음과의 사투가 필요없는 책이었다.

중학교 때, 폭풍의 언덕과 함께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 책이라 대강의 줄거리는 알고 있었으나 역시 원문으로 읽는 느낌은 달랐다. 언젠가 친구에게 추천받은 기독교 서적을 읽을 때 이 책이 인용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 만큼 어려서 읽었을 때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줄거리에 치중해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어려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들을 엿보는 계기였다.

오만과 편견이 1813년 소설이고, Jane Eyer는 1847년에 발행되었다. 둘 다 좋아하는 책이지만 느낌이 많이 다르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의해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노예제도가 있던 19세기에 여성이 아닌 남성작가의 필명으로 발행된 소설이다. 여성이 어쩌면 남성의 부속물로서 인권을 주장하지 못하던 시기에 이렇게 강렬하게 개인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Mr Rochester의 프로포즈를 받고도, ‘내가 영혼도 마음도 없는 자동인형이라 생각하는냐?(Do you think I am an automaton? Soulless and heartless)라고 당당히 주장하는 Jane Eyer. 또한 St John Rivers가 결혼하여 인도에 선교사로 같이 가자고 할 때에도, ‘내 마음과 정신은 자유롭다(my heart and mind would be free)’라고 표현한다. 그 만큼 Jane Eyer에게 정신과 영혼의 독립 및 자유의지가 중요하다.

19세기가 아닌 현대에도 누군가에게 예속되지 않고 물질적 정신적 독립을 이루며,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늘 그 무엇에서의 구속과 압박에서 자유로와지려고 날마다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아의 신분으로 친척인 Mrs Reed의 집안에서 온갖 아동학대를 받으며, 늘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돌아오는건 경멸뿐이었다고 라고 말하는 환경에서 자란 Jane Eyer는 Lowood Institution에서 학생 신분 6년, 교사 2년의 생활을 마친 후 마침내 독립을 하게 된다. 그녀가 온갖 어려움에도 개척자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친구 Helen Burns와 교사 Miss Temple의 도움이 있었다. 살아가며 누구를 만나느냐는 정말 중요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문에 가정교사 광고를 낸 Jane Eyer의 도전의식도 놀랍다고 생각한다. 결국 Thornfield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며 만난 Mr Rochester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에 전환점이 되고 이 소설의 압권이 된다. Jane Eyer의 30년 간의 이야기를 자서전적 구성으로 전개시킨 이 소설에서 Mr Rochester를 향한, 또는 Mr Rochester가 Jane Eyer를 향한 애정 표현은 고어이기에 더욱 품격있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거실에서 친구들과 흉내내기 게임(playing Charades)을 하며 파티를 즐기고 있는 Rochester를 거실 한 구석에서 몰래 지켜보며 흠모하는 그녀의 모습도 사랑스럽다(He made me love him without looking at me. He is not to them what he is to me. He is not of their kind.) 가정교사라는 신분과 20살 넘는 나이 차이를 뛰어 넘고 그녀가 사랑한 Mr Rochester가 15년 전 부모와 형의 속임수로 미친 여자와 결혼을 했고, 그의 아내 Bertha가 3층에 갖혀 살고 있다는 비밀이 밝혀지며 아무도 모르게 무일푼으로 집을 떠난다.

Jane Eyer가 얼마나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인지 밝혀지는 부분이다. Whitcross에서 사촌들과의 극적인 만남을 가지기 전까지 그녀는 추위와 배고픔의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상황에서 했던 그녀의 독백도 압권이다. ‘더 고독할수록, 더 친구가 없을수록, 더 나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을수록, 나는 더욱 더 나 자신을 존중할 것이다(The more solitary, the more friendless, the more unsustainable I am, the more I will respect myself.)

자아 존중감이 상황의 궁핍에 지배받지 않으며, 오히려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열쇠임을 멋지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의지 박약인 나이기에 쉽게 좌절과 실망을 끌어 안고 포기를 내려 놓는 나로서는 한 없이 질투나는 매력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촌을 만나 마침내 물질보다 소중한 가족을 얻고, 삼촌으로 부터 유산 상속을 받으며 물질적 독립을 얻게 된다. Moor House에서 교사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해낸 Jane Eyer는 St John Rivers로 부터 인도로 가자는 권유를 받는다.

나이, 외모, 인품 등 어느 면에서 손색이 없는 St John Rivers를 포기하고, 실명을 하고 한 쪽 팔이 잘려서 불구가 된 Mr Rochester와 결혼을 결심하고 그의 손과 빛이 되려는 그녀에게 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 결말은 내가 기억을 못하고 있어서 강한 호기심으로 마지막까지 읽었는데 결국 이 책은 Jane Eyer의 순애보였다. 책을 덮고 나니 ‘영원한 사랑’이라는 진부한 주제가 다시 내 마음을 흔든다.

개인적으로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생각으로 사랑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었는데 간만에 순애보를 만나니 과연 조건, 상황,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런 사랑은 문학 속에서만 형체를 갖출 수 있기에 그렇게 강렬한 빛깔로 문학이 나를 끌어 당기는가? 문학이 주는 위험성에 대해 잘 안다. 즉, 문학은 나로 하여금 문학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린다. 알면서 문학이 주는 ‘달콤한 독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하지 못하는 나는 어리석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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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1-21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 때 폭풍처럼 고전만 읽었어요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서
그런데 그 독서가 나중엔 사람들의 의도를 좀 더 잘 볼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회사에서도요.
지금은 골고루 보려고 노력하고요.
사실은 그냥 책이면 다 좋긴해요 ㅎㅎ

serendipity 2021-01-21 23:54   좋아요 1 | URL
소중한 글 감사해요^^ 저에게도 현실 도피 기질이 있는듯 ㅜ

김승연 2021-03-1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제인에어가 갑자기 생각나서 원서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글쓴이님께서는 글을 참 재미나게 쓰시는 장점이 있으신것 같습니다. 덕분에 책을 더욱 사서 읽고 싶게 되었어요. 어느 광고 글 보다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책 편식은 책읽는 사람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병인 것같습니다.
하지만 글쓴이 님처럼 책을 통해 자신 만의 생각과 이야기를 만들어 낼수있다면 저는 그것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거고 그 장르에 대한 애정이 무수한 가지를 만들어 내는 동력이 될테니까요. 다시 한번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serendipity 2021-03-11 20:06   좋아요 0 | URL
감사요^^ 댓글이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너무 바쁘고 힘든 하루네요 ㅜ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너무 힘들어 책을 못 읽고 있는게 우울해요 ㅜ 책과 함께 행복한 시간 되세요^^
 
Thinking, Fast and Slow (Paperback) - 『생각에 관한 생각』 원서
Kahneman, Daniel / Penguin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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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철학은 삶의 기저를 이루고 있어 늘 가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나 자신을 더 잘 알아가는 수단이라 생각하고 이 두 분야가 내가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기에 (심리와 철학의) 책이라는 수단을 통해 나를 알고자 노력한다고 할까? Donald Rumsfeld가 말한 unknown unknowns(알려지지 않아서 모르는 것들)이 아니고도 알려진 것들 조차 제대로 내가 알고 있다고 (known knowns)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ㅜ. ㅜ

이 책이 내게 어려웠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위와 같은 나의 의도로, 심리 서적인줄 알고 시작했는데, 궁극적으로 이 책은 인지 심리학자가 행동경제학을 다룬 내용이고 작가는 심리학자로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기에 이 책은 4부로 넘어가며 내게 엄청난 도전을 주었다. 심리 부분을 다룰 때는 너무나 감동하며 읽었는데, 각종 행동경제, 정신물리 관련 실험을 나열한 것 같은 4부는 고역이었다.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시도한 ‘독서 실험’때문이다. 즉 2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독서의 묘미를 위해 다음에 리뷰를 쓰게 될 Jane Eyer를 동시에 읽었다. 즉, 비문학을 읽으며 문학을 읽은 것이다. 전제는 Jane Eyer를 중학교 때 한글로 읽어 대략 내용을 기억하기에 엄청난 방해가 안되리라 짐작했다. 처음에는 둘 다 다른 재미가 있어서 독서의 즐거움에 시너지 효과를 내었으나, 비문학인 Thinking, fast and slow가 어려워지면서 문학인 Jane Eyer에 더 손이 가서, 비문학 후반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나의 ‘독서 실험’은 무모했다.

Sparks of Genius(생각의 탄생 by Root-Bernstein)란 책에서는 직관(Intuition)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었다. 이 책에서도 직관(Intuition)과 사투를 벌이지만 다른 개념이다. 책 전반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intuition(직관), bias(편향), cognitive ease(인지적 편이), cognitive illusion(인지적 착각)이다. 즉, 인간은 결정과 선택시에 주로 직관을 이용하여 빠르게 생각하여 쉽게 속단을 하는 경향이 있어, 안다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궁극적으로 수 많은 편향과 착각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언어에 대해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했다. 즉, know, intuition, premonition(예감) 이런 단어들을 우리가 잘 사용하지만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하느냐 묻고 있는 것 같다. ‘알아서, 느낌이 있어서, 예감이 들어서 생각하고 선택한거야’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틀릴 수 있으며, 많은 후회를 부르는가? 그 과정에서 감정(emotion)의 꼬리가 이성(rationality)의 몸통을 흔들어 수 많은 편향을 일으키지만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책 제목과 연관시켜 보면 작가는 System 1과 System2라는 가상의 자아를 만들어서 우리 안의 System1은 직관적으로 빠르게 생각을 하고, System2는 System1을 감시하고 통제를 하는 역할을 하지만 지적인 게으름을 피워 느리게 생각하기에 우리는 System1을 이용하여 주로 결정과 선택시에 수 많은 편향이 일어남이 불가피하다고 한다. 수 많은 편향의 심리학적 용어가 등장한다.(confirmation bias, priming effect, availability bias, halo effect, anchoring effect, sunk-cost fallacy)... 심리학자들은 용어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부족한 인간에게 일침을 놓는 흥미로운 부분은 평균으로 회귀현상(regression to the mean)이었다. 19세기 Sir Francis Galton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로 그는 부모의 키가 큰 경우 자녀의 키가 작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해당된다. 골프 선수가 오늘 잘 한 경우 내일은 못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평균회귀 현상은 불가피하게 일어나는데 설명도 이해도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상관관계를 찾아 정확하게 왜 그런지를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물론 과학자나 심리학자들에게는 마주치기 불편한 이론이다. 인과관계가 없다면 무엇이 작용한 것인가? 작가는 운(luck)이라고 했다. 결국 인간이 잘 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그 상황에 운이 작용했을 뿐이라 했다.

여기에서 또 인간의 겸손을 요구한다. 나도 놀란 것이 예전에 내가 직장에서 잘 끝낸 프로젝트에 대해 동료들은 나를 향해 유능하다 했다. 물론 그걸 인정할만큼 교만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난 ‘내 노력의 결과’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 조차 교만인걸 알았다. 실제로 나의 프로젝트가 그 당시 어디 한 곳에서라도 잘못되거나 에러가 났을 경우 난 실패했을 것이다. 결국, ‘난 운이 좋았을 뿐이야’라고 말했어야 했다. 이런 행운의 작용은 지난 번 읽었던 The Tyranny of Merit에도 여러 번 언급이 있었다.

작년의 나의 개인적인 일을 돌아보게 하는 심리테스트가 있었다. 나는 문외한인 주식을 예로 들었다. A회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가 B사의 주식을 사서 값이 떨어진 경우와 A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가 B사의 주식으로 옮겨타지 않아서 값이 떨어진 경우, 어떤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많은 후회를 하는가였다. 물론 나도 전자였다. 즉 사람들은 기본값(처음에 가지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서 아무것도 안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괜히 했어’하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작년에 괜히 일을 벌여서 안해도 되는 일 때문에 내 발등을 찍었다고 얼마나 후회와 회한이 많았는지 모른다.

우리 안의 또 다른 자아인 경험하는 자아(experiencing self)와 기억하는 자아(remembering self)중 기억하는 자아의 폭력으로 인해, 그 당시 경험시에는 행복했음에도 과정이나 지속 기간은 무시하고(Duration neglet), 좋았던 것이나 결과 중시의 규칙(Peak-end rule)에 의해 나의 시도나 노력 과정 자체에 대해 후회하는 ‘결과 편향( hindsight bias/ outcome bias)’인거 안다.

그런 편향을 가진 나에게 작가는 다음과 같이 나를 위로한다. 후회에 취약함이 인간이 적응해 나가야 하는 삶의 사실이다(Susceptibility to regret is a fact of life to which one must adjust). 후회도 평생 내가 안고 가야하는 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COVID-19에 대한 백신을 기다리듯, 심리학적 면역 체계를 갖추고 정신 근육을 견고히 하기 위해 심리 서적에 꾸준히 매력을 느껴 왔는데 이번에는 책을 읽은게 아니라 ‘공부’를 한 느낌이다. 물론 시험을 치뤘으면 낙제했을 것이다(뒷 부분을 잘 이해 못해서). 그럼에도 불편한 나의 수 많은 편향을 재 확인하고 겸손으로의 촉구에 대한 경종을 들은 것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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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1-26 0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 재밌네요. 통계에서의 regression이 마치 인간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경험하는 자아는 결과에 편향되어있는 기어하는 자아에게 매번 굴복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긴해요. 경험하는 자아여...힘을 내거라! ㅎㅎ

serendipity 2021-01-26 09: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ㅜ 경험하는 자아가 힘이 없고, 늘 기억하는 자아에 제가 휘둘려서 감사가 줄어드네요 ㅜ 소중한 글 감사해요^^

guideme 2021-09-16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공감되기도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Auggie & Me : <원더> 두번째 이야기 (Paperback, 미국판 International) - Three Wonder Stories: The Julian Chapter / Pluto / Shingaling
Random House, Inc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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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2012)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독자들로부터 후속편(sequel)에 대한 요구가 쇄도했던 것 같다. 난 사실 개인적으로 후속편이 나오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아쉬운 대로 여백을 남기는 것이 후작에 대한 실망을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Wonder는 영화로도 광장히 유명하고 원서 내용은 어른이 읽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수작이었다. 이 책은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쓴 책이나 후속편은 아니고 입장과 시각을 달리한 것이다.

Wonder라는 책이 좋았던 것은 챕터마다 주인공을 달리하여 이야기를 끌어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공 August도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가족의 중심이 August로 바뀌면서 역시나 어린 누나 Via가 늘 양보해야하고 동생의 그늘로 살아가며 부모님의 관심을 덜 받게 자랄 수 밖에 없는 아픔이 지금도 생생하다. 누구나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하면 그를 이해할 수 없다. 20번도 넘게 얼굴 수술을 한 동생을 둔 누나가 그 어떤 응석을 부모에게 부릴 수 있었겠는가? 사실 Via의 어린 시절은 동생으로 인해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책은 Auggi(August)의Welcome buddy(환영 맞이 친구) 중 하나로서 Wonder의 악역이었던 Julian, Auggie의 오랜 기간 죽마고우였으나 연락이 뜸해졌던 Christopher, 그리고 역시 Welcome buddy이며 모범생으로 소문났으나 Auggi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적극적 지원 사격은 못하고 중립적 입장을 취했던 Charlotte의 이야기이다.

Wonder의 주인공은 선천적 질병으로 얼굴 수술을 20번도 넘게 하면서 홈스쿨을 하다가 학교에 가면서 뜨거운 시선과 어려운 교우관계의 장애를 딛고 극복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책의 주인공 3명은 가려진 인물들이다. 비록 악역일지라도 내면에서 ‘옳은 일에 대한 열망(a yearning to do right)’ 때문에 그들도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박수갈채를 받은 Auggie에 비하면 부적응자이고 사회적 약자로 전락한 그들에게 더 넓은 아량과 수용력을 보여주며 공감력을 형성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이 쓰여졌는지도 모른다.

Elizabeth Gilbert의 “The Signature of All Things”에서 모든 사물은 서로 자기를 보아달라고 아우성친다 라는 문구를 읽었던 적이 있다. 그 책은 아주 특이하게 이끼(moss)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인데, 식물이나 동물도 서로 관심을 받으려 할진데 사람은 얼마나 더 할것인가?

Wonder의 악역이었던 Julian은 프랑스에 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며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Auggie에게 사과 편지를 쓰게 된다. 유태인 신분으로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같은 반 소아마비 불구의 상태였던 친구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이야기였다. Christopher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Auggie와 자주 못 만나게 되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심리적 불안 상태가 되어 Auggie와는 친한 관계를 자주 맺지 못하게 된 나름의 변명이 나온다.

Charlotte 편을 읽으며 특히나 여학생들은 교우관계가 얼마나 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교우관계가 전부일 수도 있을 만큼 누구와 친해지고 누구랑 점심을 같이 먹느냐가 그들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다. 어른이 읽으면 유치할지 모르나 현재도 이런 교우관계 문제로 왕따 및 학교 폭력이 심해진 것과 어른들조차도 대인관계 문제로 힘들어하는걸 볼 때 관계맺음이 단순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Wonder를 읽을 때 만큼의 신선함은 아니었으나 입장을 달리하여 그들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줌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자기 말만 하고 상대방 이야기는 듣지 않는 시대 아닌가? 주인공만 박수를 받고 약자의 이야기는 묻히는 시대가 아닌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들어 줄 시간이 없다고 우리는 이야기한다. 과연 듣지 못하고 들어줄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 무엇에 시간을 쏟고 있는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 아우성치는 이들이 많은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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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monade War (Paperback) The Lemonade War Series (Paperback) 1
Davies, Jacqueline 지음 / Sandpiper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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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람답게 최소한의 품격을 지니며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존감(self-respect)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쉽고 단순하게 돈(money)이라는 대답이 나올 가능성도 높으나, 돈이 있어도 자존감이 손상될 수 있고, 돈이 없어도 자존감이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그 누구로부터도 자존감을 다치지 않게 보호하며 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것이 무너졌을 때 전부를 잃은 것처럼 의욕 상실을 겪기도 한다.

3학년 Evan은 흔히 people-smart라 불릴만큼 대인관계 넓고 감성지수가 높은데 인지적 지능이 아직 덜 발달해 수학 및 철자 시험에 미숙하다. 그의 동생 Jessie는 math-smart여서 수학을 잘하고 작문실력도 뛰어나 주대회에서 입상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인지적 지능에 비해 공감능력이 부족하여 상대방 기분이나 분위기 파악에 늦어서 그런지 친구들이 별로 없다. 그런 그녀가 월반을 하여 4학년 교실에서 오빠와 수업을 같이 듣게 된다는 소식에 Evan은 부족한 자신의 모습이 동생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동생보다 못하는 loser소리를 듣게 될 생각을 하니 자존심에 엄청난 금이 가게 된다.

이런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Jessie는 평소 자상했던 오빠가 왜 갑자기 돌변하여 불친철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타인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또 얼마나 도전적인 일인가? 이해는 예술이라고 했던 표현이 떠오른다. (Understanding is an art.) 이해받고 싶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은 금방 포기하기 싶고, 다가서기 보다 충돌을 피하려는 관조적 입장를 취하다가 오해의 골이 깊어져서 해결의 수위를 넘을 때가 있다. 예술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범인에겐 어려운 과업인가?

남매간의 깊어진 골은 레모네이드 전쟁으로 이어졌다. 5일간에 100달러를 먼저 버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다. Winner takes all(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을 바탕으로, 가격인하, 경품 넣어 팔기, 상권 길목 좋은 곳 찾기, 프렌차이즈 등 어른들의 상법을 잘 배워 마침내 짧은 기간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된다. 물론 상거래법에 위배되는 몰상식한 위법행위/부정행위도 각자 남매의 모습에 한개씩 나타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표현처럼 승부욕에 눈이 멀게 되자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서로를 속이는 슬픈 현상이 나타난다.

청소년 문학의 기본값은 권선징악이고 항상 해피엔딩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다. 누구나 선이 이기기를 응원하며 책을 읽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한다. 한개씩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Evan과 Jessie은 서로의 잘못을 털어놓고, Evan이 Jessie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은 같은 반이 되면 자존감이 다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고백하며 화해 모드로 끝이 난다.

십대를 통해 보이는 donation to the charity( 자선단체에 기부) 문화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동생 Jessie는 동물보호센터에 100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오랫동안 용돈을 모아왔다. Megan도 서슴없이 그녀의 몫인 100달러를 같이 기부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부 문화가 자연스레 자리잡은 서양문화는 우리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한다. 어린 학생들이 방학을 통해 집 앞에서 무더운 날씨에 레모네이들 팔며 돈과 노동의 소중한 가치를 배우는 모습도 평소 서양 문화의 일상이 아니라면 소설에 담기기 어려우리라 짐작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고 축소판이며, 어른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스승이다. 나도 분명 작은 일이 내 삶의 전부였고, 그로 인해 잠못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왔다. 그런데 이제 내 마음은 순수한 흰색이 남아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다채색으로 물들어져 있다. 가끔은 그냥 검은색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동심으로 돌아가지 못함을 알기에, 순수함을 멀리서라도 동경하는 마음으로 읽으며, 어른인 나의 모습 이대로 좋은가를 숙고하기 위하여 청소년 문학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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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cond Mountain : The Quest for a Moral Life (Paperback) - 『두 번째 산』 원서
데이비드 브룩스 / Penguin Books Ltd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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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이맘 때에 이 작가의 The Social Animal을 읽고 크게 감동받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책에서 뽑은 인용구가 책꽂이에 붙여있다. 어떤 삶을 살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큰 울림을 주었다. 온라인 서점을 둘러보다 높은 평점으로 이 책을 만났는데 같은 작가인지 모르고 샀다. 언어의 연금술사란 말을 이 작가를 두고 하는가? 세련되고 정제된 영어가 백미이고, 그 안에 담긴 큰 메세지가 찬란한 보석이 아닐 수 없다.

앞 부분 읽을 때에는 이 책 안에 있는 표현’ I was in the book, not in myself. ‘처럼 내가 책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작년 어디선가 COVID-19으로 인해 미국과 유럽이 무조건 옳다는 사대주의 사상이 깨졌다고 읽은 적이 있다. 영어 공부의 과열현상이 불었던 적이 있고 지금도 영어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 나도 한국의 보수적 문화 및 공동체 문화로 인해 나의 사적인 부분이 침해받음에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와 개인의 자유가 존중됨이 무척 부러웠던 적이 있다.

그런데, 서양의 지식인에 의하여 초개인주의(hyper-individualism)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읽으며 다시 세상의 중심이 동양으로 움직이는가하는 착각을 했다. 이성(reason), 사생활 존중, 자아실현, 자아, 자기애 등을 부르짖으며 세상의 중심에 ‘나’가 있었다. 지난 번 읽었던 The tyranny of Meritocracy(업적주의의 횡포)도 왜 현재 미국사회에서 업적주의가 비난받는지를 설명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를 사랑해야 한다, 자아실현이 중요하고,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우며 첫번째 높은 산(The First Mountain)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실패와 좌절이 불가피한 인생길에서 한번씩은 계곡(valley)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런 실패를 failing upward, bright sadness, fortunate fall 등의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한다. 즉, 더 높이 오르기 위한 실패이자 밝은 슬픔이며, 행운의 실패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계곡에서 일어나 우리는 두 번째 산(The Second Mountain)에 올라 유의미한 목적있는 삶을 살 수 있기때문이다.

자기애와 개인주의만을 위해 달려온 우리는 단절된 삶이 부른 외로움, 우울증, 높은 자살률, 공허감 등의 셀 수 없는 병폐와 폐단을 부산물로 얻었다. 도덕적 생태학을 추구하는 삶을 위한 4가지 헌신(commitment)을 하며, 서로 공생하는 관계주의의 삶을 살라고 촉구한다. 매력적 다양성과 활력이 존재하는 서로가 연결되고 얽혀있는 정글같은 도덕적 생태계!!

두 번째 산에서 헌신해야 하는 4가지는 vocation/calling(소명의식/소명으로 받은 분야), family(가족), philosophy/faith(철학이나 종교), community(지역사회)이다. 나도 작년에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현재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나의 길이 맞는지 고민했기에 첫번째 소명의식에 빠져 읽었고, 결국 실천이 없는 독서는 무의미할 수 있다는 생각과 어깨 위의 짐같은 오랜 숙원 사업으로 지역사회 NGO단체에 후원도 시작했다. 봉사 참여는 COVID-19로 인해 얼마큼 실천으로 옮길지 모르나 작년 상황에서도 지역 봉사를 한 사진을 둘러 보며 반성을 했다.

자아(self)를 위한 산에서 봉사/나눔(service)을 위한 두 번째 산으로 옮겨가며, 내가 아닌 타인을 전인격적 시선, 관심, 사랑으로 바라보며, 융합(fusion), 두려움을 넘어선 친밀감(intimacy beyond fear), 상호의존(interdependence), 관계주의(relationalism)의 삶을 살기를 권고한다. 유의미한 목적있는 삶을 얼마나 갈구했는가? 나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 살아왔는데도 공백과 허무감은 불가피하다. 결국 나를 찾기위해 나를 잃고(I lose myself to find myself), 나 자신(ego)의 기본값을 벗고 나아가는, 우리(we)라는 공생의 삶 속에 정서적으로 풍요하고 영적으로 깊은 삶이 있다고 했다.

돌봄(Care)마저 아웃소싱을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말이 허를 찌른다. 가족과 지역사회의 유대와 연대가 무너져서 이제는 정신건강은 치료사가, 육체건강은 병원이, 교육은 학교가 책임지고 있다. 일상의 사소한 결정에는 오랜 시간 고민을 하면서도 정작 유의미하고 목적있는 삶을 위한 숙고를 게을리했다는데 삶의 역설이 있다.

이 책에서 4가지 답을 제시하며 실제로 두 번째 산에서 나누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예시를 제시한다. 물론 작가도 WEAVE라는 단체를 만들어 봉사하고 있다. 15명의 소외된 아이들을 데려다 저녁을 제공하는 한 여성에게 어떻게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느냐 묻자 ‘How is it you don’t?(어떻게 안 할 수 있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아프리카 관련 소설 읽을 때에도 이런 답변이 있었다.

어떻게 안 할 수 있는가?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삶만을 위해 달려와서 이리 큰 외로움과 공허감에 시달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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