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ickel Boys (Paperback) - '니클의 소년들' 원서/2020 퓰리처상 수상작
콜슨 화이트헤드 / PENGUIN RANDOM HOUSE USA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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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ckel Academy는 개혁가인 Trevor Nickel의 이름을 본따서 지은 교정학교이다. 소위 말하는, 말썽 피운 학생들을 교화시켜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취지에서 세워진 플로디다 주, Tallahassee에 세워진 소년원이다. 인격형성뿐 아니라 교육까지 맡아서 책임있게 잘 한다고 명성이 나 있는 학교지만, 늘 그러하듯 겉모습이나, 소문으로만 판단한다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nickel은 5센트 동전을 가리키기도 하기에 실제 거기에 있는 학생들은 우리가 5센트 짜리의 가치도 안되는가 할 정도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Elwood Curtis 라는 흑인 소년과 소년원에서 만난 Jack Turner를 중심으로 설명하기조차 아픈 인종차별 이야기가 전반에 펼쳐진다. Jim Crow(흑인 차별 정책)가 당연시 되었던 1960년대 배경이지만, 이런 차별과 불합리의 벽을 넘으려는 운동이 태동하던 시기라서, 주인공 Elwood Curtis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상주의자로 성장한다.

Elwood는, 비록 그가 잠든 사이에 떠난 부모들과도 연락이 두절된 채 Harriet이라는 할머니 손에 길려지지만,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을 반복해서 듣고 상기하면서 삶의 양분으로 삼는다. 연설문은 책에서 3번 정도 반복이 된다.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고 이론적으로는 수긍하지만 나의 회의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과연 그럴까?

우리 각자는 모두 소중한 사람이며, 자존감과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안고 늘 당당하게 걸어야 한다는 것은 수긍하지만, ‘어둠은 어둠이 아닌 빛으로만 몰아낼 수 있고, 물리적 폭력을 만나더라도 영혼의 힘으로 대처하며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더라고 언제나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라는 부분에서 물음표가 생겼다.

소년원에서 111년 동안 자행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흑인차별이 주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백인 소년들도 함께 수감되었던 이 곳의 만행이 아주 오랜 세월 주 정부에 의해 간과되어 왔다는 부정의와 부패도 통탄할 일이다. 우리는 부정직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회의적이었던 친구 Turner와 달리 Elwood는 소년원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여 감사원들이 나왔을 때 이를 전달하려고 시도하는 용감한 행동을 한다. 그에게는 Dr. King의 연설이 언제나 삶과 행동의 지표였기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고 생각한다. 앎을 삶 속에서 실천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요즘 내가 완전히 독서삼매경에 빠지지 못하며, 이 책을 오래 끌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정치 관련 유투브 때문이다. 원래 관심이 많긴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정치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생각하기에 기사 읽을 때마다 흥분하게 된다. 여전히 자행되는 엄청난 부정부패와 부정의를 보면서, 나는 어떤 시민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Elwood 처럼, 행동하는 양심이 내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감정적 흥분만으로는 부정직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폭력이라는 어둠으로 맞설 힘은 없으나, 어떤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다른 독자들만큼 이 책에 깊이 몰입하지 못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요즘 정치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집중이 분산되기도 했고, 인종차별 문제는 내가 주로 읽는 서양 소설의 단골 소재라서 많이 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Invisible Man(by Ralph Ellison), Beloved(by Tony Morrison), To Kill a Mockingbird(by Harper Lee)는 감동 그 자체였고, 밤잠을 설치며 읽었던 책이었다.

부정직, 부정의, 부정부패는 어느 나라 막론하고 현재도 뿌리뽑기위해 고군부투하고 있으며, 인종차별 문제도 다분히 미국내에서 여전히 진행중인 흑백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백인과 흑인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지, 동남아인들과 서양인들 대하는데 있어 무의식적 차별을 범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나 자신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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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e Kitteridge (Paperback)
Strout, Elizabeth 지음 / Random House Inc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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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두 사람도 같은 책을 읽지 않는다(No two persons ever read the same book by Edmund Wilson)”는 표현이 있다. 똑같은 책을 읽어도 반응이 제각각이고 다르다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원서를 구매하기에 독자평과 수상작품을 염두에 두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책 표지(앞/뒤)는 말할 것도 없고, 줄거리 시작 전에 쓰여진 신문사/출판사 찬사도 읽고, 뒷 부분에 실린 작가의 결말까지 모두 읽는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진실을 완화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세련된 거짓말과 과장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책을 덮고 난 나의 느낌은, 대부분의 언론에서 찬사를 보낼만큼의 page-turner는 아니었다. 과장된 평과 찬사에 내가 속은 것일수도 있고, 나의 독서 역량이 작가의 혜안을 읽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적어도 내겐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의 흥미와 감동은 적고 다소 우울한 책이었다.

gaping loneliness(p.269)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읽는 내내 진한 외로움과 고독이 나를 잡아먹기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느낌이랄까? 산뜻한 내용이 아니라, 나의 미래를 먼저 생각해 보게 했고,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준비한다고 의도대로 살아지는 삶인지 걱정도 되었다. 32년간 초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은퇴한 Olive Kitteridge 를 중심으로, 미국의 Maine주의 Crosby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양한 인물의 관점에서 묘사된다.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르고, 객관화시켜 바라볼 때 더 잘 이해되듯이, Olive라는 인물도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성격묘사가 되고 그녀의 색깔이 어떤 것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처음에는 Olive의 성격이 너무 싫었다. 첫 장면에서는 자상한 남편 Henry에 대한 무관심과 짜증, 아들 Christopher에 대한 집착, 넘치는 자신감이 부른 오만함 등등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겉으로 속단할 수 없는 다양한 슬픔과 고통의 말못할 이면이 있지 않은가? 커다란 덩치와 자신만만한 목소리 뒷면에, Olive가 항상 두려워했고 노년까지 안고 가야했던 진한 외로움이 있었다. 남편인 Henry, 아들 Christopher, 기타 마을의 많은 등장인물들도 각각의 아픈 사연을 힘겹게 끌어안고 인내하며 살아간다.

이런 경이로운 인내심에 작가는 존경심을 표현한다고 했다. 각자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존중받아 마땅한 것임에도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쉽게 판단하고 섣불리 평가함으로써 돌이키기 힘든 상처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여기 보이는 Olive의 모난 성격이, 속으로 곪은 외로움이, Jim을 향했던 열망이, 그럼에도 늘 당당했던 씩씩함이 나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도 이 책 내용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치부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마지막에, 지치고 힘든 그녀의 자아를 휩쓸고 가는 2가지 감정이 있다. 즉, 감사와 후회(gratitude and regret). 전자는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고 후자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도 불가피하게 생길 수 밖에 없는 삶의 부산물이 아닐까한다. 후회를 감내하더라도 기억해야할 것이 있다.

Julie는 Olive 선생님이 강조한 다음 말을 기억하며 비이성적 엄마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낸다.
“배고픔을 두려워말라. 굶주림을 두려워한다면 세상의 누군가처럼 멍청이라 될 것이다(Don’t be scared of your hunger. If you’re scared of your hunger, you’ll just be one more ninny like everyone else.)”

책 전반에 “scared(무서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그 누가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나도 나의 미래가 너무 두렵다. 의도치 않게 남과 다른 길을 걸어온 나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하고, 어떻게 평생 외로움을 베개삼아 잘 견뎌야할지 두렵다. 또한, 두려움 건너편에 허기(hunger)도 있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서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도전해 보고 싶은 것에 대한 탐심도 불쑥 튀어 나오곤 한다. 요즘엔 갑자기 감당도 못할거면서, 그림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을 덮으며,
나의 독서에 대한 굶주림은 두려워 할 대상은 아닌지, 독서에 대한 집착으로 다른 것을 놓치고 있는건 아닌지,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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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7-29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뒷일은 생각 안하고 도전했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그래도. 여전히..(아마도 죽을때까지) 삶 가운데 허기짐이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에..다행이라는 생각도 해요..리뷰 잘 읽었습니다 ^^
 
Beyond Order: 12 More Rules for Life (Paperback) - '질서 너머 -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12가지 법칙'
Penguin Books Inc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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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를 설레게 했던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만, 그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되살릴 수도 없고, 간절한 그리움도 남아 있지 않다. 힘들게 시험에 합격하고 첫 출근을 하며 들떴던 기억은 남아 있지만, 일이 내 삶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지금엔, 열정이 아닌 의무감이 나를 옥죄고 있고 일에 대한 첫사랑은 자취를 감추었다. 독서에 대한 첫사랑은 정확치 않으며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다는 것 뿐. 그러나 6년 전부터 일일 독서에 불을 붙이고, 북플을 시작하며 책에 대한 첫사랑이 회복되는 듯했다.

그런데, 2월 말부터 쏟아지는 일과 슬럼프로 책 읽기가 거의 중단되었다. 5월 즈음엔가 선물받은 이 책(Beyond Order)를 읽기 시작하며 삶의 기쁨을 찾은듯 했으나 결국 절반을 읽고 접었다가, 최근에 나머지 절반을 끝냈다. 그것도 안 읽다가 시작하니 집중이 안되어 3일씩이나 걸렸다. 결국, 독서에 대한 나의 첫사랑은 회복되어야함을 절실히 께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심리학자의 이전 작품, 12 Rules for Life를 공원에 나가 읽으며 감동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제목이 An Antidote to Chaos 였다. 역시나 후속작품인 이 책에도 chaos와 order에 관한 얘기가 빈번히 등장한다. 나의 외적, 내적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찾고, 그 질서를 넘어 참다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책을 통해서야 가능하다는걸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책이다.

12가지 중, 오래 전에 읽은 6가지 규칙은 실상 기억이 희미하나, 최근 3일간 읽은 규칙 6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양분을 얻은 느낌이다. 특별히 이 책은 저자가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던 큰 수술을 받고 난 후에 힘겹게 출판한 책이라 삶의 고뇌와 아픔까지 잘 끌어 안은 정제미가 책에서 묻어난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 그런지 힘겨운 시기를 겪게 되면 더 뾰족해지고 날카로워진다.

나의 상반기 삶을 상황은 다르지만 이 책에서 아래와 같이 너무나 잘 묘사해 주고 있다. cognitively demanding, ethically challenging and emotionally stressful(내 능력에 벅차는 업무도 힘들었고, 도덕적인 갈등도 있었고, 감정적인 소모도 많았던). 그럼에도, 마지막 12번째 규칙은 감사에 대한 강조이다(Be grateful in spite of your suffering). 이 작가가 즐겨쓰는 매력적인 표현은, ‘불구하고(despite)’가 아니라 ‘때문에(because of)’이다. 즉, 역경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역경때문에 더 사랑하고 감사하라고 한다.

이 전 책에서 이 표현을 읽을 때 한 층 업그레이드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를 결점때문에 더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번에는 고난때문에 더 감사하라고 말한다.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상반기에 그 ‘힘겨움때문에’ 더 독서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했다면 더 나은 내가 되었을지도……

이 책에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문구 중에, for this reason, for that reason, for such reason이 있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는 표현이 있듯이, 나의 힘들었던 상반기도 다 이유가 있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문구였다. 늘 그러하듯이 이번 심리학 책에서도 인간의 나약함(fragility, vulnerability, susceptibility)으로 인해 더 낮아져야 하는 겸손(humility)과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책임감(responsibility)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 말아야 할것을 알면서 잘못했거나(sins of commission), 해야하는걸 알면서 눈감고 간과한 죄(sins of ommission)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진실을 말하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며, 고난에도 용기내어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묻고 있는 책이다. 혼란을 질서로 바꾸어감이 우리의 운명(It is our destiny to transform chaos into order)이라고 했다.

혼란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는 나는, 혼란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혼란때문에 더 삶을 열심히 살아가며 내적 외적 질서를 찾아갈 용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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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3주간 깨알같은 817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니 덜컥 겁이 난다. 읽기만 해서는 책이 내 속으로 들어 오는 것은 아니기에, 누군가의 강압이 아닌데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꼭 리뷰를 써야 한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 있다. 오랜 숙제 같은 책이었고 언젠가 읽어야지 수백번씩 다짐했던 대략의 스토리와 결말을 알고 있던 유명한 책이라 내게 더 부담감이 크다.

엄청난 분량이고 오랜 기간 읽어서, 전반부가 아닌 후반부가 주로 내 기억에 남아서 그런지, 이 책은 통속적으로 알려진 Anna의 연애소설이라기 보다는 Levin의 유의미한 삶에 대한 탐구처럼 느껴진다. Anna가 철도역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한 후, 마지막 뒷 장은 주로 Levin의 삶에 대한 사색이 대부분이다. 그는 겉으로는 매우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으나, 죽음이라는 단어에 붙들려 있었고,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다. 결국,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선(the goo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유의미한 삶에 대한 추구는 세 가지 다른 사랑의 옷을 입고 실험대에 올려져 있다. Stiva와 Dolly의 사랑은 러시아 귀족들의 사랑 없는 가정 생활과 허영의 단면이다. Stiva의 불륜을 알고 있으며 그를 존중하지 않으나 필요하기에 Dolly는 이혼을 못하고 겉으로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다. 책 전반에 펼쳐지는 러시아 귀족들의 사교계는 매우 교양있고 세련된 모습이지만 위선과 가식의 포장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 진실이 숨을 못쉬고 있다. 영어 번역이지만 이 책에 mockingly(조롱하듯이)라는 단어가 매우 빈번이 사용됨이 우연이 아니리라.

뜨거운 불같은 사랑을 한 Anna와 Vronsky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둘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리라. 작가 톨스토이는 실제로 이웃에 사는 여성이 철도에 몸을 던진 사례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사랑도 모른 채 20살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와 결혼한 Anna는 고아로 자랐고 오로지 일밖에 모르는 기계같은 남편과 달리 기차역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적극적인 구애를 해 오는 Vronsky와 열정적인 사랑을 이어가고, 딸을 나은 후, 아들과 남편을 버리고 유럽으로 떠난다. 이혼도 못하고 사랑하는 아들도 만나지 못한 채 사교계에 발도 못 넣고 오로지 Vronsky의 사랑만을 갈구하고 그를 구속하려다가 질투의 화신이 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Anna와 Vronsky는 모두 사랑을 위해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른 경우이다. 반대로 그들이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고 감정을 속인 채 일상을 지속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은 비극적 결말로 처참했으나,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 도덕과 논리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기에 나의 어설픈 가정은 이 즈음에서 멈춘다. 보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미모를 갖춘 Anna도 질투의 마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저마다에게 다른 색깔로 찾아가는 사랑이 과연 무엇이길래?

작가 톨스톨이의 분신으로 생각되는 Levin은 올곧은 청년이다. Kitty에게 청혼 거절을 당하고도 삶의 순수(purity of life)를 추구하며, 고독한 시골 생활임에도, 그 고독때문에 더 충만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귀족의 신분이나 농민들과 소통하며 직접 농사일을 같이 하고 땀흘리는 육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정신이 쇠퇴할거라 믿으며 잔디깍기를 하루종일 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Kitty는 Levin을 ‘다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Everything for others, nothing for himself)’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Levin에게 두 가지 화두는 죽음과 종교였다. 사랑했던 형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언제나 죽음이란 단어가 그를 괴롭혔다. 수 많은 철학 서적을 읽어도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복형인 Sergei과 늘 공공선(common good)에 기여하는 삶에 대해 토론을 하며 죄책감을 느끼지만, 확신과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았다. 결국 농민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필요에 의한 삶이 아니라, 신과 진리를 쫓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선의 법칙(law of the good)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공공선을 달성할 수 있다는걸 알게 된다.

제목(Anna Karenina)과 달리 이 책은 Levin이 주인공이다. 사랑이 없는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할지 짐작이 된다. 순수한 Levin도 Kitty를 향한 심장이 멎을듯한 사랑고백의 과정이 있었기에 삶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색이 인간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랑의 색깔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불같은 사랑이라 불리었던 그 황홀감이, 미세한 현실의 무게 앞에서는 흉물이 되다 못해 수치와 오명이 되는걸 보면서 허무감이 찾아든다.

예전에 내가 가졌던 설레임과 들뜬 감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내가 진정한 사랑이란 감정을 한 번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사랑과 함께 종교 또한 내가 이 책에서 건진 보물이다. Levin의 종교에 대한 고민거리를 읽으며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책은 종교에 발을 담그며, 내 지식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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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2-1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원서!!! 로 안나를. 대단하세요!
레빈이 Levin 으로 보이니 더 근사하네요 ㅎㅎ

초딩 2021-02-1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역시 펭귄!

serendipity 2021-02-14 23: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ㅋ 펭귄 문고가 좋아요^^ 그리고, 전 국어 실력이 부족하고 전공이 영어라서 원서로 천천히 읽는게 이해에 도움이 되긴해요 ㅜ 전 문과라서 이과계열 도서 읽는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또한, 북플에서 책 열심히 읽으시는 분들 보면서 너무 많이 배워서 아주 좋아요^^ Thanks a million!

초딩 2021-02-15 00:04   좋아요 0 | URL
호기롭게 산 펭귄 원서들을 serendipity 님 보고 다시 슬쩍 봐야겠습니다.
괄호 말도 무척 감사합니다. Common good, law of the good
한글로도 설명하기 힘든데 도대체 영어로는 뭐라고 할까 궁금한 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때 그 목적으로 원서를 사기도하는데 찾다가 포기해요 ㅎㅎㅎㅎㅎ
 

화가 Paul Gauguin을 모티브로 하여 쓴 소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작가가 ‘인간의 굴레’를 출간 후, 익명의 비평가가 ‘주인공은, 많은 젊은이들 처럼 달을 바쁘게 쫒느라, 그의 발 아래 6펜스는 보지도 못하고 있다’라고 쓴 글에서 작가가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이 책은 모두가 6펜스를 쫒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갈 때 달을 찾아 과감히 현실을 등진 화가가 주인공인 예술가 소설이다.

나에게 부러운 직업 3가지를 꼽아보라하면, 나는 서슴없이 작가, 화가, 음악가라 할것이다. 말로 모두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 슬픔, 뜨거운 열정, 고통, 영적인 신비 등을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을 부여받음은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표현하는 순간 감정 정화가 이루어지고 그걸 읽거나, 보거나, 듣는 사람들도 대리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기에 세상에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한다.

예술가와 ‘자유’라는 단어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사회의 인습과 구속을 충실히 지키며 창의성을 발휘한 예술가가 한 명이라도 있던가? 우리 주위에 수 많은 외적 내적 구속이 있다. 신체적, 감정적, 지적, 사회적, 재정적 구속을 과감히 벗고, 사랑까지도 예술과 양립할 수 없으며 오직 ‘그람을 그려야 한다’는 내적 소리를 따라, 마치 악마에 사로잡힌듯 프랑스 파리로 떠난 남자가 있다.

Charles Strickland가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두 아이를 버리고 떠난 나이는 40세였다. 이 책이 발간된 연도는 1919년이고 책 속에서도 보통 그림은 18세에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 나이에 시작한다고 비꼬는 표현이 나온다. Strickland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세 번이나 반복을 하며 ‘물에 빠진 사람은 수영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치 않고, 일단 헤엄쳐 나가지 않으면 익사하게 된다’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그림이라는 바다에 빠져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훌쩍 떠난다.

파리에서 겪는 물질적 가난과 빈곤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막지 못한다. 고열로 아파 누워 있을 때 그의 천부적 재능을 알아 본 화가 Dirk Stroeve의 도움으로 몇개월 만에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뜻밖에 Dirk의 아내 Blanche가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사랑은 질병이며, 여자들은 그저 쾌락의 수단일뿐이라며 과감히 그녀를 떠난다. 즉 그는 그림과 미의 창조에 대한 열정만 있는 영원한 순례자였기에 그를 묶어 두고 소유하려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결별을 선언하는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Charlie Strickland가 마침내 안식처를 찾은 곳은 남태평양의 섬인 Tahiti에서였다. 내려가 목욕할 수 있는 시냇물이 흐르고, 야자나무에 둘러 쌓인 외딴 마을에 17세 소녀인 Ata와 살면서 정적만이 흐르는 고요한 순간을 ‘밤이 너무 아름다워서 영혼마저 몸의 구속을 견디지 못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속과 속박이 없어서 영혼도 자유롭게 날개를 펼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 섬이 바로 Charlie가 평생을 찾아 다니던 곳이었다. 그가 찾던 것은 진리와 자유였고 그 섬에서 자신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상업적 목적으로 그림 팔기를 거부한 채, 나병에 걸리고 일 년간 실명이 된 상태로도 오로지 그림만을 그린다. 외딴 오두막 천장과 벽을 온통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걸작을 그리고 죽지만 아내에게 이 집을 불태우라고 부탁한다. 그림에 대한 이런 광적 열정을 가진 그가 평범한 가장으로서 남들처럼 살았다면 행복했을까? 물론 그는 가장으로서 자신의 꿈만을 찾아 떠난 이기적이고 냉정한 인간이라는 사회적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나, 본인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극적이고 감동적인 소설은 아니며, 자아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에 이 책이 던져주는 시사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미술이나 예술가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스토리 전개가 독자들에게는 공감과 반감의 양극단을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장면이나 심리 묘사는 매우 탁월하다. 현학적이라 느낄만큼 은유나 비유가 범상치 않고 깊이가 있어서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게 된다.

개인적으로 Charlie Strickland의 행동은 매우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어느날 그렇게 훌쩍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자신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양심, 도덕, 안락함을 두 번 세 번 생각하며 고민했더라면 평생 주저앉아 평범하게 자신을 잃고 살았을 것이다. He found himself. 라는 문장을 읽으며 떠나지 못하는 내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Charlie만큼 마음 속에서 뜨겁게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년에 현재 직장에 너무 큰 실망과 혐오를 느껴 과감히 버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했으나, 여전히 마음 속에서 내가 가야할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많다. 나의 길이고 소명이라 믿어왔던 현재 길이 아닌, 정말 유의미하고 행복하게 시간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나의 길이 따로 있으면 어쩌나 지금도 생각하면 두렵다. 과감히 버리지 못함은 나 또한 오랜 시간 현재 나의 ‘구속’을 당연하게 여기며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여 왔기때문이다. 물론 나는 Charlie만큼 책임져야 할 가정은 없으나 그럼에도 일탈은 두렵다.

소인배라서 일탈의 용기가 없기에, 수많은 여성들로부터 도적적 비난을 받아 마땅한 Charlie의 결단이, 6펜스가 아닌 달을 찾아서 뒤 늦게라도 결단을 했고, 결국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 행복한 삶을 살아낸 Charlie가 이리 부러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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