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ckness Unto Death : A Christian Psychological Exposition of Edification and Awakening by Anti-Climacus (Paperback)
Anti-Climacus / Penguin Classics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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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궁극적 목표는 심리학 혹은 철학 원서 속에서 위안과 평안을 찾고 싶었다. 잠들지 않는 내적 불안감과 허무감을 철학서로 위로받으려 했다. 한글 번역서와 원서에는 큰 간극이 있고 영어가 부족하지만, 한글로 읽을 때보다는 영어로 읽는 것이 이해 체감도가 높았다. 마침내, 부족한 내가 키에르케고르의 원서를 도전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지만, 절반 정도 이해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영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력의 한계, 신학적 배경 지식, 신앙의 농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답답했던 갈증과 목마름에 시원한 해갈을 제시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일까? 질병이라 함은 신체의 질병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의학 발전에도 여전히 불치병으로 존재하는 암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책의 질병은 신체의 질병이 아니라 정신적, 실존적, 영적인 질병으로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질병인 despair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despair가 전체 책을 통해 관통하기에 읽기만 해도 내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 같다. 죽음(Death)이란 단어 앞에서 누구나 작아지고 소심해질 수밖에 없지만, 헤아릴 수 없는 신체의 고통으로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해방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육체의 죽음으로 고통이 끝나지 않는 질병이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청년의 때에는 암울한 미래를 놓고 절망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해 절망한다. 자신의 영혼을 세상에 저당 잡힌 채, 유능함, 부와 명예의 축적 등을 향해 달려가며,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만 집착하는 세상인(immediate person)으로 살아가다가 우리의 시선을 내적인 방향(inward direction)으로 돌릴 때가 있다. ‘나의 삶은 이대로 좋은가?’ 세속적인 것, 일시적인 것, 유한한 것에 절망하고, 영원한 것을 찾는 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서 또다시 절망을 한다. 이렇게 인간은 육적인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도록 지어졌다. 인간은 합성물이다(A human being is a synthesis.)라는 표현이 있다. 무한/유한, 영원한/일시적, 자유/필연이 합쳐진 존재이다. (infinite/finite, eternal/temporal, freedom/necessity)

그런데, 무한함과 영원함을 거부하며 나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인 기본값을 거부하며 혼자 힘으로 살아감은 마치 ‘나라가 없는 왕(a king without a country)’으로 살아감과 같다. 원래 왕은 따로 있는데 그를 인정하지 않으며 내가 왕이 되어 살려고 하는 것이 모순이고 반항이며 범죄가 되는 것이다. 나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절망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왕이라 스스로 생각하지만, 강함이 아닌 약함(weakness)에, 적극적인 세력을 펼치지 못하는 수동성(self-passivity)에 절망하는 인간이 바로 과거의 나였다. 정말 치열하게 게으르지 않게 살았으나, 미래가 항상 밝은 것이 아니기에 멈출 수가 없었고, 더 열심히 살면 밝은 미래를 손에 얻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에는 불행한 과거를 망각으로(forgetting) 달래며 원래의 나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절망은 늘 현재형이었고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죄(sin)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소크라테스 이론(Socratic doctrine)과 기독교적 이론(Christian doctrine)에 대한 비교가 있었다. 옳은 것을 알면서 행하지 못함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무지를 깨우치라고 주장했던 소크라테스의 이론은 정확치가 않다. 무지해서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함이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반항이 인간에게 있으며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나의 경우만 보아도 딸로서, 친한 친구로서, 지인으로서, 공직에 있으면서 어떤 일을 어떻게 행함이 좋은지 알지만, 행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으며, 양심이 시키는 데도 고집을 피우며 망설인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안의 죄성이 있어서 양심의 소리에도 모르는 척하며 눈감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죄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처럼 무지(ignoranc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이행하지 않는 의지(will)와 그 의지의 부패(corruption)에 있다.

왕과 일일 노동자의 비유가 있었다. 어느 날 왕이 일일 노동자에게 찾아와 사위가 되는 특권을 주었다고 하자. 그러나 일일 노동자는 자신이 왕의 딸과 결혼할 능력이나 위치가 안 되는 걸 알기에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믿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조롱하며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또한 죄(sin)이다.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어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특권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는데, 이것을 믿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조롱하며 온몸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것이 죄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은 강제로 일일 노동자에게 왕임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로(totally incognito) 일일 노동자에게조차 공평한 사랑을 베푸시고 자유 의지를 주시며 인간의 의지(will)를 테스트 하심과 같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큰지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와 비유한다. 심리학적 교묘한 수단(psychological master-stroke)은 죄의 계속성과 강화를 의미한다. 맥베스가 왕을 살해하고 죄책감과 공포에 시달리지만, 이미 악을 행했으므로 폭군이 되는 더 악한 일을 함으로써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죄를 유지하려고 한다. 결국 그는 절망을 덮으려고 죄를 강화시킴으로써 절망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이 인간의 목표이자 기준이 되어야 하거늘 인간 스스로 절망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절망을 키우는 일이 된다.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이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기다린다. 개인 각자가 잠시 다니러 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밝혀지는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죄성 이전 단계에 3가지의 offense 단계가 있다. 첫째, 가장 낮은 단계의 거부감/죄(offense)는 중립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결정하지 않고 유보하는 단계이다.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인간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을 인정도 거부도 안 하는 것이다. 둘째,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형태로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은 긍정적인 거부로 기독교적 관점을 모두 비진리 및 거짓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 내 주변에도 위 3가지 단계의 지인들과 가족이 있다. 나 역시 오랜 기간, 두 번째 단계로 살아왔기에 지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지만, 다시 이 책을 읽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신을 떠난 인간은 모두 절망이라는 질병을 만날 수밖에 없고 회개하지 않은 모든 죄는 새로운 죄를 낳을 수밖에 없다. 나를 아는 모든 지인들이 나라가 없는 왕으로 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모시며 왕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한다. 헤아릴 수 없는 높고, 깊고, 넓은 사랑으로 날마다 죄를 범하는 죄인인 인간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푸시며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참아주시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온몸으로 깨닫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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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Experiencing Awe and Intimacy with God (Paperback) - 『팀 켈러의 기도』원서
Timothy Keller / Penguin Group USA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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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으로 책을 다 읽었어도 리뷰를 쓰기 전까지는 항상 마음이 무겁다. Flyleaf에 빼곡히 적어 두었던 키워드 및 감동 문구를 읽고, 다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리뷰가 내 마음에 들게 작성이 되어야 비로소 큰 쾌감을 느낀다. 그때야 비로소 책의 내용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고, 잘 내면화된 자족감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단기간에 잘 읽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1개월에 걸쳐 읽다가 2개월을 쉬고 다시 읽어서 리뷰를 쓰기가 부끄럽다. 그럼에도 나의 오랜 습관으로 인해 끊어졌던 기억을 되살리며 부족한 리뷰를 쓰려고 고집을 피우니 많은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누구나 기도를 하지만, 기도 자체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어서 이 책을 골랐다. 신학적, 경험적, 방법론적인 면에서 신학자들의 예시와 함께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안내하고 있다. Augustine, Martin Luther, John Calvin 등 많은 분의 기도 방법과 사례가 있다. 결론적으로 내가 얻은 답은 기도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을 넘어 축제가 되길 희망한다. 처음에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 및 만남이며 이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설레기 시작했고, 정말 기쁨의 시간이길 기도했다. (through duty to delight)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는 George Herbert, Dwight Moody의 언급을 통해 연회 및 축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연회장에서 와인을 마실 수 있는데 왜 물로만 만족하려는가?’로 끝이 났다.

기도가 나의 간구와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마치 자판기에서 원하는 것을 얻듯이 하나님께 나의 간구만 마구마구 쏟아내는 시간이 되지 않아야 한다. 내가 과거에 나의 조건이 아니라 나 자신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my better-half를 얼마나 고대하고 기대했었는가? 지금은 더 이상 그런 환상을 꿈꾸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도로 나아가는 자리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더 알려고 (know) 노력하는 자리가 아니라 필요만을 채우는 자리였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무게의 경중에 상관없이 삶의 어려운 순간은 항상 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가 아니라, 어려움 때문에(because of) 더욱더 기도에 힘쓰며 성장하라고 촉구한다.

기도의 모범이 되신 예수님의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고 했다. 과거에 내가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지인으로부터 주기도문을 계속 암송해 보라고 들은 것이 비로소 생각이 났다. 예수님의 주기도문보다 아름답고 향기 나는 기도가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우리의 기도가 당장 응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응답 없는 기도는 없다고 단언한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unanswered prayer). 돌아보면 내가 잘못 간구한 것뿐이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이 아니며, 나의 타이밍과 하나님의 타이밍이 다를 뿐이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끈질기게, 단호하게, 지속적으로 해야 하지만, 순종과 끈질김 사이에서 극단을 피하라고 조언하신다.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기도하되, 응답이 지연되더라도 내가 원했던 것의 방향과 다르더라도 순종하라는 뜻이리라.

기도의 순서로 찬양과 감사-고백과 회개-간구와 중보를 추천한다. (adoration and thanksgiving-confession and repentance-petition and intercession) 새벽 예배에서도 출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나의 필요와 간구를 쏟아내던 나의 기도 습관을 고치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신실하심, 정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숭배함으로 기도를 시작해 보자. 사랑하는 사람과 물건이 있다면 마구마구 자랑하고 싶을 것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로 시작해 보자. 내가 사랑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나의 정체성을 말해 준다는 표현을 암기해 보자. (What we love is basically what we are.)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곧 나라는 사람을 말해 주는 것이다. (I am what I love) 만약 내가 하나님이 아닌 부, 명예, 권력을 쫓는 사람이라면 나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우리는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거나, 사랑해야 하는 것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덜 사랑해야 하는 것을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을 덜 사랑하기 쉽다. 사랑해야 할 것을 제대로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감사가 넘칠 수 있고, 나의 부족함도 깨닫고 비로소 필요와 간구를 전적으로 맡김으로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기도 시간을 일정하게 정해 놓고 하기를 추천하고 시편 인용이 너무 많았다. 시편 자체가 하나의 시이고 노래이며 기도이다. 시편의 내용을 살짝 바꾸어 시작해도 되고 개인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인용하는 것도 추천한다.

우리의 영혼이 배(boat)라면 누군가는 항해 중(sailing), 노를 젓는 중(rowing), 표류하는 중(drifting), 가라앉는 중(sinking)일 수 있다. 어떤 상태라 하더라도 쉼 없이 기도하라고 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기도를 쓰면서 향기로운 기도를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에 했는데 아직도 실천을 못 하고 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함으로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소심함이 찾아든다. 파스칼은 영적 체험을 한 후 기록한 메모를 코트 안감에 꿰매어 지니고 다녔다고 했다. 기록은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희미하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되었다.

의무를 넘어 기쁨이 되고 축제가 되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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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ale of Two Cities (Paperback) A Tale of Two Cities 11
찰스 디킨스 지음, Maxwell, Richard 엮음 / Penguin Classics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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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학수고대했던 이유는 2권의 책을 끝내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휴 시작 직전에 책의 Introduction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위대한 Charles Dickens가 아닌가? 그간 읽었던 그의 모든 책은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page turner였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게 하는 그의 작품은, 밤을 지새며 읽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명불허전이었다. 사실 약간 걱정이 되었던 것은, 누군가의 리뷰에서 A Tale of Two Cities를 읽으면 실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 지금까지 미뤄두었다는 점이다. 눈물 범벅으로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글 독자들의 리뷰를 다시 보니 그 우려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영어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1859년도에 출판된 고전으로, 수사학적 기교가 넘쳐나는 만연체 문장이 많았다. 대화체를 제외하면, 배경과 상황 묘사는 탁월한 은유와 직유를 사용해 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Mr Cruncher의 비문법적 문장은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 은유와 비교가 넘치는 함축적 긴 문장을 제대로 번역하는 일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한글 독자 리뷰가 번역의 한계를 지적했다. 작가 본연의 의도를 살리면서 문학적으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부분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위대한 작가의 탁월한 문체에 감탄하고, 부족한 나의 지식의 한계를 느끼며, 연애 소설에 포장된 역사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으며 읽었다. 처음 진입 장벽은 높았지만, 중간에 포기했더라면 장엄하고 숭고한 뒷부분의 감동을 놓치는 큰 실수를 했을 것이다.

거의 마지막 직전까지 Charles Darnay와 Lucie Manette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18년 동안 억울하게 바스티유 감옥에 있었던 아버지(내과 의사)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Lucie는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여성이다. 프랑스 귀족이었던 신분을 스스로 버리고 영국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는 Charles는 도덕과 양심의 대명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다. 평온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던 중, 부하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듣고 목숨을 걸고 프랑스에 들어가 1년 이상 갇혀 있었던 정의의 사도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고, 다른 누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대미를 장식한 인물은 Sydney Carton이었다. 자기 파괴적 삶을 살며 자존감도 낮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그가 Lucie Manette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Lucie는 Carton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를 건네며,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고, 평생 이 고백을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녀의 선량함과 따뜻함이 만들어낸, 엄청난 영향력의 순간이다. 이로 인해 Sydney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자신을 희생하리라고 다짐한다. 이 부분이 Chapter 13이다. 그리고 한동안 잊혀진 Sydney는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나, 감옥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던 Charles 대신 옷을 바꿔 입고, Charles를 내보낸 뒤 자신이 대신 죽음을 맞이한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생소하지 않지만, 막상 책으로 읽으니 엄청난 감동이 밀려왔다. 마지막 장은 그 어떤 책보다 감동적이었다. Sydney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뿐 아니라, 옆에서 같이 죽어야 했던 소녀의 손을 잡아 위안이 되어 주었다. 죽는 순간까지 편안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Sydney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을 발산했다. 그의 마지막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It is a far, far better thing that I do, than I have ever done. 그가 죽음으로 누군가를 살린 행위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온 모든 행위보다 의미 있고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가? 현실에서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Lucie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그는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 평온하게 삶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남편, 아이, 아버지 모두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사랑이 이렇게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을까? 나 역시 어디서든 주인공으로 살고, 센터에서 조명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러나 Sydney는 처음에는 비중이 적고,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조연 정도라 생각했지만, 결국 내 눈물을 쏟게 하고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인공의 목숨을 살린 조연이 아니라, 혁명의 의미, 사랑의 가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Sydney가 암기했던 성경 구절은 마지막 부분에 세 번 정도 반복된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John 11:25) 결국 진정한 부활은 혁명을 통해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작가가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와 복수를 부르는 프랑스 대혁명의 민낯이 연애 소설의 포장 속에 담겨 있었다. 평민 여자들이 차라리 불임이 되어 비참한 평민들이 죽기를 기도한다는 평민 청년의 말은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귀족들의 고귀한 잠을 위해 평민은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밤을 지새워야 했다. 배고픔, 헐벗음, 가난, 고통, 목마름 외에 가진 것이 없었던 그림자 같은 삶을 살던 평민들에게 혁명만이 살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프랑스 대혁명(1789)의 실체는 The Reign of Terror(공포 정치: 1792~1793)로 이어져, 많은 사람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52명이 처형되기로 예정된 단두대가 놓인 장소는 마치 대중의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공원(a garden of public diversion)처럼 묘사되었고, 여성들은 바쁘게 뜨개질하며 현재 몇 명이 죽었는지 숫자를 세고 있다. Sydney의 손을 잡고 억울하게 죽었던 소녀는, 공화국이 정말로 평민에게 선한 행위를 한다면 배고픔과 고통이 줄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혁명이 아니고서는 바꿀 수 없는 뿌리 깊은 체제와 관습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야 하는가? 악을 악으로 이길 수 없음을 프랑스 대혁명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악을 선으로 이길 능력조차 없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귀족들의 횡포, 평민들의 불행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대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을 표방한 공포 정치 또한 무섭고 섬뜩하다. 이어지는 우울함 이면에는 Sydney의 희생이 주는 감동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사람의 따뜻함과 진정성으로 변모된 삶, 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삶, 사랑받지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삶. 그는 이런 행위가 평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다고 고백했다. 숭고함을 넘어 장엄하다. 다시 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만난다.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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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ering Your Private World (Paperback)
고든 맥도날드 / Thomas Nelson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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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everything you do flows from it. (Proverbs 4:23)

사적 세계, 내적 정원, 영적인 세계의 질서를 잘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려주는 책이다. 제목이 주는 일시적 통찰력을 넘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현대인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와 평안일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근심이나 걱정도 잔잔한 일상을 얼마나 심하게 흔들 수 있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그간 내가 책에 매달린 것도 마음의 평정을 위함인지도 모른다. 나는 인문학 서적, 궁극적으로는 철학 서적에서 내 평정심을 찾을 수 있고 내 마음을 훈련시킬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으나 그것이 임시방편임을 알게 되었다. 책이 주는 위안은 세상 문제의 큰 무게를 감당할 만큼의 파급력은 없었다.

작가만큼이나 나 역시 driven, 혹은 driveness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좋은 취지로 말하면 내적 강박증이 있어 추진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는 성공 지향성이 있으며 가시적 결과에 집착하여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단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오늘날 이 사회를 끌어가는 리더들의 성격도 이 단어와 맞물려 있다. 이 단어와 어울리는 성경 속 인물로 Saul을 예로 들고 있다. 외모마저 출중한 인물로 많은 것을 가졌으나, 다윗에게 강한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끼며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해 결국 파국을 맞이한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듯이 driven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 자기 마음을 잘 지켰더라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Saul과 대비되는 인물로 죄인 중의 괴수가 자칭했던 Paul과 John the Baptizer가 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엄청난 대중의 인기몰이를 하며 인기의 절정에 있던 세례 요한은 물러날 때를 알고 세상의 명예에 집착하지 않으며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2)라는 말로 예수님을 높인 인물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기에 세례 요한의 인품이 보석처럼 빛난다고 생각한다. 겸손히 나를 낮추며 누군가의 축복을 빌어주면서 마음의 평안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보다 훌륭한 그릇이 있을까 싶다. 나의 때를 알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현명함을 배우고 싶다.

베다니 마을의 두 자매 마리아(Mary)와 마르다(Martha)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맞이한다. 언니인 마르다(Martha)는 예수님을 위해 음식 준비에 바빴던 driven 성격의 인물이고, Mary는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 듣기에 바빴다. 그런데 이 책에서 Just give Mary a little chance as well as Martha. (P. 83)라는 표현이 있었다. 주도적인 인물은 늘 앞장서서 일을 추진하기에 속도가 다소 느린 사람이나 뒤늦게 합류하는 사람들을 덜 배려할 수가 있다. 내가 예전에 Mary 같은 친구나 동료에게 기회를 주며 함께 가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driveness의 반대 개념으로 calledness가 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뜻에 앞서, 내가 먼저 일을 생각하고 계획하며 추진하려 했음을 회개한다.

추진력과 주도성이 무조건 단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추진력은 내적 공허함과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어 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느 날 벽돌에 부딪치듯 큰 공백을 느끼며 감정적 대홍수(emotional deluge)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적 성장의 방법으로 listening, reading, purposeful study를 추천하고 있고 나는 이 방법에 격하게 공감한다. 잔인할 만큼 정직하게 들려오는 쓴소리와 비판의 소리까지 겸허하게 받을 때 성장할 수 있다. 작가는 연필로 감동적인 문구를 표시하거나 메모하면서 독서를 한다고 했다.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방어적 공부(defensive study)가 아니라, 순수한 배움의 즐거움을 향유하며 자발적인 동기에서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참여하는 offensive study(공격적 공부)를 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신앙인으로서 영적 훈련을 위해 추천하는 5가지는 침묵과 고독, 찬양, 듣기, 묵상과 중보 기도이다. (silence and solitude, singing, listening to God, reflection and meditation, prayer as worship and intercession) 작가가 실천하는 journaling을 나도 했었는데, 현재는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아쉽다. 글쓰기에 관심과 욕심이 많은 내가 오랜 기간 일지를 써 왔는데, 손으로 쓰는 것이 힘들어 아이패드로 실천하려다 지금은 못하고 있다. 특히나 일지를 통해 기도를 쓰고 싶었다. (writing prayers)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기도를 쓰는 내용이 나와서 한동안 실천하다가 지금은 멈추었는데, 다시 시작해 볼까 고민 중이다.

기도는 나의 나약함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인정함으로써 엄청난 해방감을 얻을 수 있고 내가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내가 빈손일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낄 수가 있다고 했다. (God gives where He finds empty heart. P.148) 또한, 중보 기도는 기독교인이 가지는 특권이기에 마음껏 누리고 싶다. 작가는 중보 기도의 범위를 확장하여 세계 복음화를 위해 요일별로 기도 지역을 달리함에 감동 받았다. 정말 큰 그릇은 자신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다운 쉼(Sabbath)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내면의 질서를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됨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 작가가 청년의 때에 200개 이상의 성경 구절을 대문자, 쉼표, 마침표까지 정확하게 암송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암송했던 시편 구절이 74세가 되어 종양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절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 필사를 하는 기독교인이 많은 것을 안다. 나 역시 성서대학에서 2년 공부할 때 성경 구절 암송 시험이 있어서 출퇴근 길이나 주말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암송했던 때가 있다. 이런 성경 구절이 자양분이 되어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저절로 연상이 된다. 그때는 조사까지 이렇게 암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생각했지만, 정확히 암기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쓰고 암기하기를 반복해야 하고, 반복하지 않으면 오래 남지 않기에 정확하게 암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가시적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보다 타인은 나에게 관심이 없을 수 있다. 내면의 성장과 질서 없이 나는 항상 외로움, 고독, 공허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이 기간이 오래되면 결국 감정적 대홍수를 넘어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느낄 수도 있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가시적 결과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작가의 추천 방식을 모두 실천하기는 어려우나, 조금씩 시도하며 내 마음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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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20대에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이성주의를 신봉하는 무신론자이며 급진적 개혁가로 활동하다가 시베리아에 정치범으로 4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책은 신약(The New Testament)이었고, 신약을 읽음으로써 교만했던 지식인이 심오한 크리스천 사상가로 변화되었다.

이 책의 스토리는 허구이지만, 주인공 Raskolnikov는 젊은 시절의 도스토예브스키이며, 주인공의 심리적, 도덕적, 사회적 요소는 작가의 삶 및 경험과 닮아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자서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양대 산맥으로 러시아가 자랑하는 위대한 소설가의 고전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었다.

주인공은 19세기 St. Petersburg에 만연했던 가난, 범죄, 사회적 부패를 척결한 자격이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 믿었다. 사람을 ordinary vs. extraordinary로 나눈다면 그는 대의명분을 위해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죽일 자격이 되는 특별한 지식인인 것이다. 나폴레옹의 사고에 큰 영향을 받은 그는 대학교 때 기고했던 ‘특별한 사람’ 이론을 시험이나 하듯이 2명을 도끼로 살인하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물질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돈에는 손도 대지 않고 땅 속에 돈과 귀중품을 묻어 두고, 버젓히 길거리를 다니며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나이든 여자를 죽인 것이 아니고, 자신을 죽인 것이며, 사람이 아니라 이론을 죽였다는 표현도 있다. 20년간 그를 괴롭힌 가난과 외로움, 사회 부패를 척결하고 싶었으나 결국 신의 섭리를 위반하며 자신을 도덕적으로 죽였다는 뜻일까?

인간은 평생 ‘선과 악’의 양극단에서 싸울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던가? 대의 명분을 위해 2명을 죽였다고 생각했으나 죄책감, 편집증, 정신 분열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동생 Dunya, 친구 Razumikhin의 변함없는 사랑과 일관된 정서적 지지로 그는 외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Sonya의 헌신적 사랑으로 인해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의 살인을 처음 고백했던 사람도 Sonya이다. 그녀는 인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기독교적 사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Sonya가 그에게 읽어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었던 나사로처럼 그는 결국 Sonya의 사랑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Sonya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상징하는가? 결국 하나님은 죄책감 없이 2명을 살인한 인간도 사랑하시어 Sonya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다.

죄과 악은 결국 선과 사랑으로, 인간의 죄악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밖에 구원할 길이 없다는걸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세상에 난무하는 부정과 부패, 타락을 인간이 심판주가 되어 악을 척결하려는 교만은 더 큰 죄악을 낳을 수 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위대한지, 결국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책의 분량이 너무 많고 하루의 피곤함은 눈꺼풀을 무겁게 하였으나, 이 책만큼 결론이 궁금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결론을 오해하고 있었던 탓에, 마지막 장을 읽을 때 부정이 아니어서 너무 행복했다. 희망적인 결론도 너무 너무 감사하다. 문학적 장치나 문체보다 스토리 중심으로 장기간 읽으면서 지루하지 않았고, 작가가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도출할지 가장 궁금했던 책이다.

어쩌면 내가 기다린 것은, 죄인이었던 주인공이 용서와 구원을 받은 것처럼, 나 같은 죄인도 사랑받고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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