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oblems of Philosophy (Paperback, 2)
Russell, Bertrand / Oxford Univ Pr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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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변화된 나의 모습 중 하나는 철학에 대한 나의 접근이다. 예전에는 철학하면 어렵고 지루하다는 선입관이 있었다. 기초 영양소이며 삶을 지탱해주는 토대라는 개념이 없었고 무조건 진입장벽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방어벽을 내리고 나니 철학의 매력이 보인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철학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자체가 철학일진데 철학과 너무 소원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철학을 만나면 고민의 답이 풀리면서 따뜻한 안식처에 들어온 느낌이다.

러셀은 수학자이며 철학자이다. 이 책은 순수하게 감정이나 심리를 뺀 상태로 수학자이며 과학자가 증류시켜 깔끔하게 만든 철학 입문서이다. 사실 그동안은 철학이란 단어가 들어갔어도 심리학의 경계에 있었던 것이 많아서 철학이라지만 마음을 읽는 심리서적 느낌이어서 쉬웠으나 이 책은 순수 철학 입문이라 약간 딱딱하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했다. 물론 나의 한계에 도전받는 책이기도 했다.

내가 쉽게 말하는 ’나는 안다(know)’는 것도 여러 종류의 앎이 있다. 앎을 통해 지식(knowledge)을 얻는다. 이 지식(knowledge)도 얻는 과정이 다를 수 있다. 대면/직접 만남(acquaintance)을 통해 얻는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과 사적인 공간과 경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묘사/기술(description)에 의해 얻는 지식(knowledge by description)이 있다. 과거에 대한 앎에서 오는 기억(memory)이나, 내적 성찰(introspection)에 대한 지식도 있고,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신적 영역인 자의식(self-consciousness)에 의한 지식도 있다.

2+2=4이다라는 일반적 명제는 연역법에 의해,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경험론적 일반화는 귀납법에 의해 설명된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자신의 존재까지 의심하며 ‘방법론적 의심(methodical doubt)’을 만든 데카르트 내용은 여전히 신선했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은 더 큰 불안 및 의구심과 만날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고 반대와 거절을 만날 용기를 내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보편적 원리의 관계를 배타적으로 다루는 선험지식(priori knowledge), 정반합에 의해 도달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관념(Absolute Idea)은 절대적 현실(Absolute Reality)을 구사하기에 적합하다는 헤겔(Hegel)의 이론은 여전히 어려웠다. 본질적인 불완전성을 이렇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철학의 본질이고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실용가치를 논할 때 철학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천문학의 분야인 천체 연구도 한 때는 철학에 포함되었다거나, 과학자 Newton의 위대한 저서인 ‘자연 철학에 대한 수학적 원리’를 보아도 철학이 미쳤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심리학으로 독립했지만 인간의 마음에 관한 연구도 한 때는 철학의 부분이었다는 예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철학적 가치를 논할 때 학문이 무조건 실용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편견에서 우리가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근본적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었을 때에도 마음의 양식을 부지런히 채워야 하는 영역은 여전히 남아 있기에 철학은 어쩌면 가시적이지 않지만 높은 실용가치가 있다고 본다.

눈에 보이는 분명하고 확실한 답을 찾는 분야가 과학이라면 분명하지 않고 불확실성 속에서 끊임없는 탐구를 하며 불완전한 답과 익숙치 않은 수 많은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철학이다. 낯선 환경에서도 익숙한 것들을 보여주며 습관의 폭군으로 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 철학이었다. 상식, 확실성, 유한함, 명백함이 가지는 한계와 편견에 갇힌 나를 자유하게 하여 생각의 영역, 애정과 행동의 대상을 넓힘으로써 자유함과 공평함을 얻어 자유로운 지성인(free intellect)이 되는 것에 진정한 철학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철학이 가지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숭고한 가치를 볼 때 철학의 존재 이유가 보인다. 철학은 마음의 감옥에서 자유로와지는 지름길이며 지친 나를 달래고 보듬어 다시 회복력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영양제였다.

물론 내가 내용을 절반도 제대로 내재화하지 못했고, 읽고 싶고 마음에 담고 싶은 내용만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내 지식의 한계이고 둘째는 너무 오랜 시간 이 책을 붙들고 있으면서 내용의 흐름이 끊겼다는 문제도 있다. 영양제를 먹는데 바쁘다는 핑계는 이제 그만하는 습관을 꼭 형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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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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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옮긴 직장내에서 같이 하는 북클럽 도서라 몇 년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몇 년 전에도 북클럽 지정 도서이긴 했으나 엄청난 분량에 눌린 탓인지 나 혼자 읽었기에 그 당시 토론은 불가했다. 이번을 계기로 두 번 읽게 되는 호사를 누림에 감사한다. 사실 읽어야 할 새 책들의 중압감 때문에 두 번씩 읽기가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기에 나중에 또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3000년에 걸친 대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인문학 서적에 ‘우연, 행운, 혜택’이란 말이 자주 반복된다면 믿겠는가?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인간의 역사도 과학적 연구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낙관하고 있으며 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이 현대세계 형성 원인도 밝히고 미래 형성 원인도 조명해 볼 수 있다고 했다.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하면 ‘우연이나 행운’은 어울리지 않을 법 들린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세계의 불평등의 시작은 지리적 입지라는 역사적 우연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윤리적 공백과 간극을 메우기 위함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지리와 역사를 배우긴 했으나 누구의 관점과 시점에서 규명하고 바라보았느냐도 중요하다. 차이에 대한 궁극적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채, 환경이 아닌 생물학적 원인이라 단정 지어왔다. 문명/비문명, 우수/열등의 이분법적 단정은 윤리적, 도덕적 공백을 만들었고 무의식적으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게 했기에, 잘못된 인과관계의 사슬을 끊고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우리에게 편견을 벗기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백인과 흑인을 논할 때 기본값으로 우수와 열등이 떠오름은, 마치 도시와 시골을 논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시골의 삶이 반드시 부족함이 많은 것이 아니듯이 흑인이 더 열등하고 지능이 낮지 않지만 우리는 어쩌면 오랫동안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학습되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인과 원주민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무슨 근거로 문명인의 삶의 질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오랫동안 자리잡힌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유라시아 대륙이 뉴기니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보다 먼저 발달할 수 있었던 궁극적 원인은 지능적으로 더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 생태학적 우연이었으며 결국은 지리와 환경이 발달을 좌우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야생 동식물이 풍부했기에 식물의 작물화와 동물의 가축화가 먼저 이루어 지면서 식량생산도입이 가능했고 이는 인구밀도를 높이고 정주형 생활, 기술발달, 중앙집권화를 가능하게 했다. 결국 식량생산과 기술의 역사는 자가촉매작용을 일으키며 총기, 해양기술, 문자, 군사기술 등의 발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동물의 가축화로 인한 병원균이 대량 살상력을 일으키며 많은 원주민들을 죽이게 되었고 유럽인들의 정복과 탐험을 가능하게 했다.

반대로 지협이나 사막으로 인해 격리나 고립 상태에 있거나 생태적 지리적 장애물이 많았던 뉴기니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수렵 채집민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병원균에 속수무책으로 전염되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콜롬버스는 신대륙 발견의 영웅으로 역사책에서 찬양되고 있지만, 한 번도 원주민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했다. 결국 그로 인해 구유럽인들의 탐험과 정복이 가속화 되고 많은 원주민들이 총기와 병원균으로인해 죽게 되었으니 원주민 입장에서 그는 테러범이 된다.

문자의 발견도 비옥한 유라시아 대륙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니 역사도 백인의 입장에서 조명되어 온 것이다. 결국 백인들의 정복욕에 의해 대부분의 원주민은 영토를 빼앗기고 말라리아나 척박한 토양으로 인해 백인이 접근하기 힘든 극한 지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도 원주민의 삶은 미개하고 열등하기에 문명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수와 열등, 문명과 비문명도 누가 규정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인종차별문제로 시끄럽다. 흑인과 백인의 차별 논란은 뿌리 깊은 고질병 같은 문제로 수많은 문학책의 소재로 자리했고, 현재도 늘 잠재적 위협성을 안고 있는 문제이다. 작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소재로 한 책을 몇 권 읽으며 슬펐던 적이 있었다. 이 책에도 유럽인들이 희망봉 일대의 코이산족을 평정하기까지 9차례 전쟁으로 175년의 세월이 걸린 것으로 나온다. 지리적 생물학적 우연으로 유산자가 된 지배계층의 정복 욕심, 문명화 또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전쟁, 학살, 파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리적 결정론과 환경 결정론이 절대적이고 문화 차이나 개인의 특성은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화나 거대 영웅이론이 인류의 발달사에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으나 그런 요소로 설명되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역사가 너무 많았고 결국 그 궁극적 원인으로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그간 놓치고 있었다.

앉은 자리를 바꾸어야 풍경이 달라진다고 했다. 관점과 시선을 바꾸지 않으면 편견은 벗을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의 원인이 환경인지도 모른 채 유전적 요인으로 단정짓는 오류를 범하고 내 안의 편견으로 쉽게 평가와 판단을 내려왔다. 인종차별 아니어도 내 안의 편견은 수 없이 많음을 인정해야 한다. 날마다 점검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윤리적 공백을 크게 만들어 가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걸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깨어 있는 연습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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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tethered Soul: The Journey Beyond Yourself (Paperback) - 『상처받지 않는 영혼』 원서
Singer, michael A. / New Harbinger Pubns Inc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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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번역은 ‘상처받지 않은 영혼’인듯하나 원서를 직역하면 ‘구속받지 않는 영혼’, ‘묶여 있지 않는 영혼’, ‘자유로운 영혼’ 정도이다. 물론 책을 끝내고 나니 어떻게 번역되어도 전체 책 내용과는 의미는 통한다. 그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인가? 내가 만든 생각과 감정의 벽으로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 내적인 자유로움을 얻음으로써 무조건적 행복을 찾으라는 내용이다. 스토아 학파의 이론도 떠오르고 ‘명상록(Meditations)’ 내용도 생각났다.

내 안에 살고 있는 내적 룸메이트(inner roommate)가 보내는 정신적 목소리 즉 내 안의 목소리는 쉬지를 않는다.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가 누구인지 알아감과 내 안에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가 있음을 인지하고 항상 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 문을 열어 두었을 때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고통과 상처일 수 있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let go/letting go/let go of이다. 자유로움의 대가로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있지 말고 놓아 주라는 것이다.

상황이 바뀌어도 절대적 만족은 없을 것이고 나를 힘들고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은 없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이 내 성장의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내 생각이 키운 구속으로부터 자아를 해방시킴로써 영혼으로부터 자유를 훔쳐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라 한다. 또한 내적 고통과 혼란을 두려워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익숙해지고 공존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영적 성장을 갖게 된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책 제목 ‘구속받지 않은 상태’를 12장에서 플라톤이 사용했던 ‘동굴의 알레고리(Allegory of the Cave)’와 유사한 내용으로 설명을 한다. 자연경관이 너무나 멋진 공터에 아름다운 집을 지은 사람이 있다. 탁 트인 벌판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으나 집 자체의 매력에 홀딱 빠져서 완벽한 요새처럼 짓고 그 안에서 독서와 쓰기에 빠져 산다. 그 누구와의 접촉도 없이 완전한 고립 상태로 살다가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켜고 살게 된다. 인공조명이 언제 떨어져서 암흑의 세계에 빠질지 몰라 두려움에 떨면서 살고 있다. 사실 한 발만 내딛고 나가면 너무나 찬란한 빛이 쏟아지지만 내가 만든 생각과 감정의 벽 때문에 벽을 헐지 못해 외부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 벽은 물론 과거의 경험이 만든 상처와 아픔으로 점철된 것이기에 더 이상의 상처를 막기위해 방어기제로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안식처는 나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는 것이다.

빗장을 풀고 벽을 헐고 나와 무조건적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그 어떤 조건도 행복을 제한하게 된다. If, and, but등의 조건은 상황이나 사람이 바뀌면 또 달라지고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집착(cling)없이 저항(resistance)없이 수용하고 아픔과 상처를 보내기(let go)를 해야하는 것은 죽음(death) 때문이라 한다. 죽음이 우리의 최고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우주의 역설이다. 서양 문학에서 자주 토론되고 다루어지는 화제이다. 죽음을 잘 인지해야 하며 죽음과 건강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연령, 시간, 그리고 장소에 상관없이 언제나 죽음이 우리를 도사리고 있다. 죽음의 불가피성과 예측불허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게 되고 부질 없는 저항과 집착을 내려놓게 될지도. 죽음은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하고 의미있게 만든다. 결국 우리의 유한한 삶은 죽음이 소유하고 있으며, 죽음이 세 놓은 땅에서 시간을 빌려 살아가는 세입자인 인간이 무조건적 행복을 선택하지 아니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작가는 요가와 명상을 통해 이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의식(consciousness)이란 단어도 수 없이 반복되는데, 자아의식의 탐구과정을 통해 변화된 내 모습을 갖게 된 나는 양 극단의 추가 아닌 균형을 맞추는 삶과 판단과 평가를 보류하고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신의 경지에 까지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유발 하라리도 하루에 2시간씩 명상을 한다고 했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느낌은 우리가 그 만큼 불필요한 소음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외부가 너무 시끄러워 내 안의 룸메이트가 아픔을 토로해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어쩌면 들려 오지만 애써 부인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인정하기 싫어서 내 안에서 나가기 싫어서 말이다.

이 책은 쉬운 영어로 쓰여졌고 같은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된다. Be open no matter what도 많았다. 무조건 열어야 한다고 했다. 닫지 않아야 구속하지 않아야 내적인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반성의 시간이 되었다. 새로운 바쁨이 지난 몇 개월의 나의 상처를 치료했다 생각했다. 그러나 책 읽는 내내 그 상처가 나를 따라 왔으니 난 완전한 자유함을 얻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나의 생존 본능은 구속과 미움을 벗게 했다 생각했는데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지금은 그 때 상황만큼 우울하지 않은 상태로 이런 책을 접하니 객관적인 내가 보이는데, 막상 내 마음이 상처로 점철된 당시에도 이런 책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 시험해 보고 싶다. 사실 책이 치유책이라는거 알지만 슬픈 당시에는 책이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며 슬픔의 옷을 벗을 수 있는 경지가 올지 도전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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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s Therapy (Paperback)
Alain Botton / Phaidon Press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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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이 작가의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철학의 위안)”을 읽고 얼마나 감동이 컸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읽은 4권의 그의 작품은 늘 날 기쁘게 했다. 제목 “Art as a Therapy”가 전체 내용을 대변한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책 속에 다양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눈의 호사도 또 다른 선물이었다. 책 장을 넘겼을 때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그림이 보물처럼 담겨 있었다.

왜 요즘 현대인은 Therapy란 말에 집착하는가? Healing이란 말도 연령 상관없이 많이 사용한다. 그 만큼 상처가 많다는 반증일까? 아님 치료나 힐링에 자꾸 안기려는 나약함은 아닐까? 정말 내 마음이 치유가 필요한만큼 곪아 있는지 아니면 삶의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고단함을 피하고자하는 나약함인지 가끔은 혼동스럽다. 그렇게 나도 그 단어에 익숙해져서 이 책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겐 작가 Botton의 매력적인 언어를 접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정신적 피로감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psychological frailty(심리적 나약함), inner frailty(내적 나약함), appalling fragility(끔찍한 연약함), native defects(선천적 결함) 등의 유사한 표현들이다. 이런 인간의 부족한 면을 보상하는 기능을 미술작품이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추함과 연약함을 증류시키고 농축시켜서 고요하나 지쳐 보이지 않고 평온하나 무기력하지 않은 세련된 작품을 감상하게 한다.

슬픔까지도 위엄있고 품격있게 묘사된 작품을(dignify our sorrows)감상하며 그 속에 보이는 나의 슬픔을 읽게 되고 결국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면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예술은 사랑을 지속시키는 기능도 한다. 주변의 좋은 것들은 진부함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금방 익숙해지기에 내재화는 힘들게 된다. 그렇다면 수시로 인식을 새롭게 하며 이를 습관처럼 자리잡게 해야 한다. 즉 사랑에 지루해지기 쉬운 보편적 경향이 있는 우리는 그림을 감상하며 익숙한 것과 평범한 것들에 새롭게 눈을 뜨고 재평가하여 열정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고 한다.

예술가라는 직업을 통해 작가는 과연 무엇이 하나의 직업을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더 유의미한 그 무엇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책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기쁨, 이해, 위안을 이끌어 내며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첫째 조건이고, 둘째는 자신의 깊은 재능과 흥미에 잘 맞는 일로서 내재되어 있는 귀중한 능력을 표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유의미한 일을 하는 예술가들이 순간 스쳤던 직관과 통찰력을 하나의 창의성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내었던 원동력은 집념과 인내심이리라. 요즘 회의감에 싸여 출근하는 나는 어떻게 노력해야 유의미한 나의 직업이 될지 생각해 본다.

예술은 결국,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능력을 고양시키고,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도 계몽시키고, 자연과의 대처 능력도 도와주며, 정치에 있어서 야망과 이상도 형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예술의 진정한 목적과 기능은 예술이 덜 필요한 세상을 만드는 것, 예술작품이 약간만 필요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했다. 삶이 곧 아름다운 예술이 되고, 삶 속에서 슬픔과 연약함의 언식처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미술작품에서 치유를 덜 찾게 되리라.

나의 거실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까페 테라스’를 보며 그 동안 나의 외로움과 만성적 피로감이 얼마큼 위안을 얻었는지 생각해 본다. 사실 칸딘스키 그림에 빠진적이 있었는데 나의 거실을 지키는건 고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배경으로 늘 거기 있었으나 나의 심리적 나약함을 읽어주며 감싸준 것에 고마움을 느껴야 할 것 같다.

내겐 책 자체가 해독제인데 책과 미술이라는 치료제를 양손에 들고 2주를 보냈으니 당연 감사해야 했지만, 문제는 단숨에 책을 읽었어야 하는데 결정적으로 주말에 직장에 책을 두고 오면서 흐름이 끊긴 것이 아쉽다. 책의 흐름이 끊기면서 진한 감동이 희석되었다.

나의 직업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일 중의 하나가 쉬지 않는 독서인걸 안다. 앎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예술가들이 보여 준 집념과 인내를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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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ght Diary (Paperback, Digest) - 『밤의 일기』원서, 2019 Newbery
Veera Hiranandani / Puffin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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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던 책을 직장에 두고 온 것을 집에 도착해서야 알고서 돌아가서 가져오고 싶었다. 그러나 금요일 중요한 약속이 있었고 비도 내리고 있어 시간이 허락치 않음에 안타까움을 금할길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책에 중독되어 있었다. 금요일 늦은 밤 귀가였지만 소중한 만남으로 다시 생활의 활력을 찾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불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다. 하루 만에 끝낼 생각으로 가벼운 책을 선택했는데 역시나 책이 주는 선물은 늘 다양하고 신선하며 매력적이다.

2019년 Newbery Honor Book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12세 인도 소녀(Nisha)가 돌아가신 엄마에게 밤마다 쓴 일기를 묶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과 상처를 보듬기에 글보다, 비밀이 보장되는 일기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그러나 이 책은 어린 소녀의 엄마 잃은 상처보다 더 큰 아픔이 숨어 있다.

200년 동안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인도가 마침내 독립을 하게 된다. 그렇게 기다리던 독립인데 결국 국민들은 새로운 종교전쟁으로 인해 신인도와 파키스탄로 나누어 지게 되면서 겪었던 아픔이 역사적 배경으로 되어 있다. 허구이지만 작가의 부모님이 실제로 Mirpur 지방에서 Jodhpur 지역으로 국경을 넘으면서 많은 것을 잃고 낯선 지역에 정착했던 내용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순수한 Nisha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종교전쟁에 대한 잔혹사를 아프게 그리고 있다. Hindus, Muslims, Sikhs 등의 종교는 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가?

그 당시 종교상의 이유로 천사백만명이 국경을 넘고 그 와중에 백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추정된다고 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평화로운 공존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이 쓰여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도 세계 각국에서 여전히 종교 분쟁은 일어나고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도 글로벌 이슈로서 우리의 커다란 도전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COVID-19을 물리치는 것 만큼이나 크나큰 난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생각과 의식의 전환을 갖는다는 것은 이리도 어려운가?

인도가 둘로 나누어 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합을 위해 단식을 하며 탄식했던 Gandhi의 노력도 책 속에 많이 나온다. Nisha를 죽이려 했던 이슬람 청년을 힌두교도인 Nisha의 아빠는 용서하며 보낸다. 누군가 (종교의 고리) 끊지 않으면 결국 끊나지 않을거라고 하면서. 빗물을 기쁨으로 먹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결국 새로운 땅에서 Nisha는 힌두교인 할머니의 기도 소리와 이슬람교도인 요리사 Kiza의 기도소리가 공존하는 집에서 평화를 느끼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실화를 읽으면, 나를 괴롭히는 정신적 고민들이 사치로 느껴진다.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상의 문제들이 아무리 크다한들 생사를 넘나드는 의식주 문제 만큼 크지 않으리라.
I couldn’t think of anything more beautiful than buckets of cool, clean water to drink. 마실 물 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주인공이 말하고 있다. 그 귀한 물을 훔치다가 칼에 찔린 사람이 있고, 그런 상처를 치료해준 아빠에게도 물 한방을 주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이 있다. 보상으로 몇 방울 줄만도 한데 당장 생사가 달린 물이기에 최소한의 인사치레도 없이 떠나간다. 이해가 전혀 안되지 않는다.

물질적 풍요가 낳은 감사함을 잊게 하는 정신적 빈곤함으로 이 책을 읽으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물만 있어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 마실 물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상황을 가끔씩 책으로라도 만나면 현재의 불평이 줄어들지 않을까? 또한 종교의 다른 색깔 아니어도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다양성이 주변에 너무 많다. 나 역시 나와 다름에 짜증을 내며 색안경을 쓰고 보는건 아닌지 점검을 해야 한다. 아니 점검을 넘어 다양성을 인정함이 꼭 해결해야할 과제임을 상기하게 된다.

Variety is a spice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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