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others Karamazov (Paperback)
Dostoyevsky, Fyodor / Penguin Classics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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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면서 반드시 해야 할 숙제를 끝낸 희열이 있었다. 985 페이지의 고전을 시작할 때는 너무나 먼 길 같았고, 중간을 지날 때도 마지막 장은 까마득해 보였으나, 읽는 과정이 매우 행복했다. 마치 연애하는 들뜬 기분으로 독서삼매경에 푹 빠져서 무더위를 잊으며 읽었다. 산해진미를 사준다고 친구가 회유해도 독서를 핑계 삼아 거짓말을 하고 싶을 정도의 유혹이 있었다. 내게 독서의 즐거움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너무나 단조롭고 무료했을 것이 분명하다. 분량이나 문학적 깊이 측면에서, 톨스토이의 ‘War and Peace’와 비슷한 면이 있으나 또 다른 감동이 있었다. ‘전쟁과 평화’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등장인물, 어려운 러시아 이름, 복잡하게 얽힌 스토리, 미묘한 심리 묘사, 만연체 문장이라 조금만 방심하면 내용을 놓칠까 염려하여 늘 긴장하면서 줄거리를 따라갔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만연체 문장은 대가들의 전유물인가 할 만큼 문장의 긴 호흡은 읽기 힘들었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한글판으로 읽기 시작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어서 결말을 알지 못하므로 끝까지 호기심과 긴장감을 가지고 읽었다. 법정 드라마나 영화를 매우 좋아하지만, 범죄 스릴러에 관한 고전은 많이 읽지 않은 터라 결말이 엄청 궁금했다. 과연 대문호는 어떤 탁월하고 신선한 결말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할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검사와 변호사 측의 변론을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었고 이미 그 전에 작가가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준 터라 당연히 무죄가 선고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피고 변호인의 날카로운 변론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유죄로 선고되었다. 작가가 그 전에 진짜 범인을 독자에게 미리 알려 주었음에도 사실 그 재판은 무죄 선고가 되었다면 윤리적 파장이 엄청 컸을 것이다. 독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의해 범인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리 정확한 물적 증거는 없다 하더라도 부친 살해를 무죄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에서 어떻게 진짜 범인 이야기를 작가가 펼쳐 나갈 것인지가 궁금했다.

마지막 장이 소년의 Ilyusha의 장례식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오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권선징악이나 해피엔딩에 길들여진 편향된 독자의 고집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런 이유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대단한 작가인가? 살아생전 Ilyusha에게 돌을 던진 친구들, 절교했던 친구들이 모두 참여했다. Alyosha는 어린 친구들을 모아놓고 간곡한 부탁을 한다. 한때는 서로 돌을 던지고 싸우고 미워했지만, 이렇게 모여 화해의 장을 만들고 사랑을 나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어디서나 친절하고 정직하며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기를 권고한다. 직전 장까지 부친 살해에 대해 누가 범인인지 변론하는 어른들의 어두운 세계가 그려졌는데 갑자기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넘어왔다. 심지어 아이들은 죽어도 다시 부활하여 서로 만나며 영원히 산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으로 마지막 장이 끝났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태복음 19:14) 말씀이 떠올랐다.

슬픈 장례식이지만 한 아이의 죽음으로 사랑과 화합의 장을 이루며 천국을 생각하는 마지막 장과는 달리 이 책은 전반에 devil이란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인간 자체의 본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 악마의 소행으로 못된 행동을 저지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는가?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신이 없어도 인류가 서로 사랑하며 양심에 따라 살 수 있는가? 신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도덕 윤리는 무너질 것이고 인간은 자신을 찬양하고 숭배하며 신이 되려고 하지 않겠는가? 신이 존재한다면 왜 순수하고 무고한 아이들이 고통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다닌다. 이 책은 세 명의 아들과 아버지를 중심으로 탐욕과 사랑이 부른 부친 살해를 다룬 범죄 스릴러의 옷을 입고 있으나 신의 존재 유무, 선과 악의 싸움, 회개와 용서, 진실과 정의의 의미를 묻고 있다. 이런 질문은 종교인이 아니어도 살면서 한 번씩 아니면 평생 고민하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Zosimo 신부님의 이야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인상 깊다. Alyosha의 멘토이자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신부님은 생전에 신의 경지에 있었다. 그런 그가 죽고 며칠이 안되어 시체 썩는 냄새가 심하게 나게 되자 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되고 충격을 받고 실망한 Alyosha는 수도원을 나오게 된다. 영웅은 언제나 한 자리에 흔들리지 않는 고고한 자세로 독야청청 푸르게 남아 있어야 하는데 다른 신부님들과 달리 악취가 풍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성스러움과 거룩함이 의심받게 되고 많은 실망감을 낳았다. 그러나, 진정한 거룩함은 외적인 것에 있지 않았다. 가나의 혼인 잔치(wedding at Cana: John 2)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셨다. 결국 Zosimo의 거룩함은 외적인 신체의 부패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영적 가치에 있음을 알게 된다. 부족한 인간이 아무리 선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의 힘과 노력에 의해 거룩함이 성취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Zosimo 신부가 수도원에 오기 전에 만났던 신비에 싸였던 Mikhail이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것을 시사하다. Mikhail은 수많은 자선 사업을 하면서 늘 겸손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을 적극 실천했다. 가끔은 선행을 베풀면서 자신도 모르게 우쭐해지고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 수 있으나 그의 겸손은 지나치다 싶은 면이 있었다. 그런 Mikhail이 Zosimo 신부에게 14년 전에 사랑했으나 거절당한 여자를 살해했고 증거가 불충분하여 미해결 처리되었음을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듣는 사람에게도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다. 결국 고해 성사를 권유했고 망설이던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함이란 이런 것일까? 그는 14년 동안 죄의 감옥에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회개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나서야 자유함을 얻는 것이 아닌가? 외적인 자비와 선행이 의인의 척도가 될 수 없고 죄 사함을 받을 수도 없다.

Mitya의 재판 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이 엄청나게 흥미진진했다. 작가는 그 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미리 알려주었으나 과정 전체를 암시한 것이 아니라서 어떻게 유죄와 무죄임을 변론하는지 궁금했다. 소문난 변호사의 변론을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놀라웠다. ‘심리학은 두 개의 끝을 가진 막대기와 같다’는 논리가 인상적이었다. Mitya의 폭력적인 기질,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 재정적 궁핍, 유산 및 여자 문제는 그가 범인임을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돈이 봉투에 있었는지, 절도가 일어났는지 증거가 없다는 변론은 놀라웠다. 정확하게 반박할 수 없는 증거는 하나도 없음이 변호인의 변론이었다. 눈에 띄고 강렬한 정황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인간의 심리를 생각하며 현저성 편향이라는 개념도 떠올랐다. 모든 인간은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정확한 인간의 논리와 이성에도 치명적인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오랜 기간 확증 편향의 노예로 살아온 나는 변호사의 변론을 들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은 사랑, 질투, 명예, 불명예, 자존심, 물질 등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Mitya가 Katya를 사랑하지 못함은 자존심과 불명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스럽지만,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고상한 면이 있어서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Katya는 그에게 당한 수치심과 채무감이 있어서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평생 희생하겠다고 다짐하며 실제로 희생을 감수한다.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Ivan이 있지만 수치심에 대한 복수심 혹은 채무감 때문인지 Mitya에게 집착한다. Grushenka가 Mitya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고 그를 구원하겠다고 자처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호언장담이 아니라 그를 향한 연민 앞에서 오히려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한 것일까?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은 질투, 명예, 자존심, 물질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그 이름 자체로만 존재하기에는 인간의 사랑은 너무나 불완전하고 거짓이라 생각한다.

늘 느끼지만 책은 단숨에 연이어 읽어야 줄거리를 잘 따라가며 생각의 깊이도 넓어지고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이번에는 이 책에 몰입하며 집중해서 읽었으나 워낙 대작이라 리뷰에 소감을 다 담을 수 없는 나의 부족함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두 명의 대문호를 가진 러시아가 부럽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들의 문학적 탁월성에 대한 존경과 질투심으로 잠 못 드는 밤이 될 것 같다. 진부한 사랑과 질투심, 물질에 대한 탐심에 관한 스토리를 가지고 심리학적 통찰, 신의 존재 유무, 죄와 회개, 사랑과 화합의 메시지를 모두 담을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책 전반에 걸쳐 ‘무가치한 내가 자격이 있는가?’라는 겸손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겸허의 표현이자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진실한 고백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고 부족하기에 타인을 향해 판단할 자격이 전혀 없다. 추후 Mitya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

매 순간 나의 방법을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금수처럼 살았다. (Every instant I strove to mend my ways, but lived like a savage beast. p.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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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y from the Sea (Paperback)
Carr, Garrett / Pan MacMillan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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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나의 소유가 적고, 남들이 보편적이라 부르는 소유물이 없는 나에게 독서는 특별한 선물이다. 부족한 나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며 요동치던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선사한다. 너무나 힘들었던 상반기를 보내며 얼마나 책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좋은 것은 쉽게 오지 않기에, 일에 중독되어 있다가 독서삼매경에 빠지기 어렵다는 것을 짐작해 최근 소설을 먼저 집어 들었다. 높은 평점과 달리 클라이맥스가 없어서 그런지 잠 못 들게 하는 책은 아니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니면 자극적인 줄거리와 놀라운 반전에 길들여져 언제쯤 반전이 나올까 기대하며 읽었기에, 잔잔한 어촌의 이야기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극적인 전개는 없었고 시대적 배경이 예전인 데다 어업 관련 특정 영어가 생소하긴 했으나, 영어의 아름다움에 다시 젖어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절한 언어로 구사한다는 것도 당연함이 아닌 감사의 조건이 되며, 같지만 다른 세련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예쁜 감정 표현, 한 문장 한 문장이 바로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책을 읽는 시간 자체가 힐링이었다.

바다에서 온 소년 Brendan이 특별한 존재일 거라 생각하며 계속 읽었다. 선한 어부 Ambrose의 입양으로 어촌 전체가 떠들썩했고, 성장 과정에서 보인 그의 특별한 행동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어린아이임에도 마치 목사님이나 예수님처럼 어른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을 내리고, 어른들은 그 아이를 만나기를 기다린다. 나는 작가의 이 설정이 아주 특이하다고 생각했고 무엇을 위한 장치인지 굉장히 궁금했다. 처음부터 Brendan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무엇이 어른들로 하여금 경외감과 존경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에게 축복을 받고 싶어 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를 미워하고 싫어했던 Declan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나이에 동생이 생겼다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평범한 동생이 아니라, 부모님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특별한 사랑을 한 몸에 받으니 동생은 증오와 제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물며 Ambrose가 친아빠라고 소문내고 다니는 Brendan을 가문의 수치라 여기며 짐을 싸서 쫓아내고 말았다. 그러나 이모와 함께 그의 과거를 추적함으로써 부모일 가능성이 있는 한 남자를 만나고 와서는, 마침내 동생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Ambrose는 어떤 마음에 바다에 떠 있던 Brendan을 선뜻 입양했을까? 마치 성경 속 인물 모세를 이집트의 공주가 입양하여 아들로 맞이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Ambrose의 살림은 넉넉지 않았고, 아내 Christine도 남편의 의견에 동의하긴 했으나 평생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보냈다.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혹시나 아들을 노동력 창출의 수단으로 여겨 경제적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Brendan의 아이 같지 않은 특이한 표정, 마을 사람들에게 끼친 선한 영향력이 더 이상의 진전 없이 평범하게 묘사되고, 그가 Declan과 정서적 원한을 풀고 그냥 대학 진학을 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못내 아쉽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생각이 앞서감을 느낀다. 책 내용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생각을 더해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다른 책이나 매체에서 받은 영향일 수도 있고, 평범함을 홀대하는 내 습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평범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Brendan의 과거 궤적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고 친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제 과거가 아닌 미래를 Declan과 논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비로소 진정한 형제가 되었다.

사실 Declan은 늘 Brendan을 미워하며 동생이라 부르기를 거부했으나, 이상하게도 늘 Brendan을 찾아다녔다. 이렇게 미움과 사랑은 감정의 양극단에 있는 쌍둥이가 아닐까 한다. 서로 닮아서 싫고, 똑같아야 하는데 달라서 밉고, 궁극적으로는 같은 뿌리에서 나와 만날 수밖에 없고 공존해야 하는 불가분의 운명 공동체 같다고 할까? 나에게도 늘 소소하게 미운 사람이 있고, 현재도 존재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있을까? 나도 이제는 그들을 미움이 아닌 사랑의 감정으로 온전히 마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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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raway Nearby (Paperback) - 『멀고도 가까운』원서
리베카 솔닛 / Granta Books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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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The Faraway Nearby’는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가 했던 말에서 차용했다고 생각한다. ‘멀지만 늘 가까이’라는 것은 언어의 역설이지만, 우리 삶에도 잘 적용이 된다. 짐작건대, 평생을 힘들게 했던 엄마와의 물리적·정신적 거리를 의미할 수도 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해야 하는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치매였던 엄마에게, 혹은 뇌종양에 걸렸던 작가에게도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나 실존 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자서전적 이야기는 우리가 늘 공감(empathy), 동정(compassion), 이해(understanding), 용서(forgiveness)를 가까이에 두기를 원한다. 이 네 가지는 타인을 위한 확장의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감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됨을 작가 스스로 입증했다.

이 책을 오랜 기간 붙들고 있을 때는 얼마나 귀한 책인지 몰랐는데, 연휴 기간 몰입하여 읽으니 한 권의 철학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어둡고 차가운 깊은 우물에서 건진 정화수 같은 작가의 회고록은 은유적·수사적 표현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답고 깊음이 있어서 오랜 기간 나의 좌우명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비록 배움은 선택 사항이지만, 어려움은 배움의 학교이며 그 어려움을 독서로 극복한 작가가 존경스럽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음이 꼭 축복일 수 없듯이,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함도 반드시 불행은 아니었다. 책은 우리가 만나는 고독이지만 작가는 책에 몰입하고 언어 단식을 통해 세상과 높은 담을 세웠던 조용하고 말이 없는 아이였지만, 결국엔 엄마를 이해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늘 도덕적 질문과 원리에 집착하고 성취와 공헌으로 정당화시키려 했던 엄마의 삶은 치매를 통해 마침내 모든 원한, 비교, 기대감, 불안한 포부를 내려놓게 되었다. 자신과 닮지 않아서 기대감에 미치지 못해 구박하고 미워했던 딸에 대해 관대해졌다기보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진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현재에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치매라는 질병도 엄마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고, 모녀 관계를 회복시키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아울러 작가는 엄마를 비로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의 시작이었고,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일종의 용서이자 사랑이었다. 내가 너를 용서하니 너의 빚은 나의 관대함으로 탕감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래되고 추한 낡은 고통을 내려놓고 미움과 증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당당히 과거로부터 걸어 나옴이 진정한 용서이자 자유일 것이다.

작가의 삶을 그늘지게 했던 것은 단순히 엄마의 영향만은 아니었다. 뇌종양을 진단받고 그녀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나이 들어가는 엄마에게만 가까운 줄 알았던 죽음이 내게도 곧 엄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의 욕망, 포부, 집착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 에라스무스의 ‘인간은 마치 거품과 같다’는 말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한하고 한시적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아이러니는, 그녀의 질병이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 책 속에서 위안을 얻었던 그녀의 고독을 완화했다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어야 하는,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는 고독도 사치였으리라. 만약 조만간 이 세상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에는 자신의 부정적 감정에 몰입하며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붙들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세상을 왜곡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이거나 냉소주의자의 거울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나 역시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었다가 다치고 나면 금세 냉소주의로 변하게 된다. 허무주의에 머물렀다가 어느새 냉소주의자가 되어 마음을 닫고 세상을 향해 부정과 불만을 마구 쏟아내려고 한다.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 이야기에도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초기에 길 위에서 만난 개별적인 인간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던 의사였으나, ‘더 나은 세상‘이라는 혁명적 대의를 위해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제거해도 좋다는 냉혹함으로 변하게 되었다. 혁명의 아이콘이 되면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멀리 있는(Faraway) 억압받는 민중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쏟았지만, 정작 자신과 가까이 있는(Nearby) 동료나 가족, 적대자들에게는 무자비하게 대우했기에, 아르헨티나와 쿠바에서 그에 대한 평이 엇갈리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책 외에 또 다른 건강한 출구를 통해 삶의 균형을 이룬 것 같다. 자신의 신조인 ‘타당한 이유 없이 모험을 거절하지 말라’에 따라 그랜드 캐니언으로 모험을 다녀왔다. 극한의 추위와 마주해야 하는 아이슬란드로의 여행도 매우 아름답다. 물론 책으로 그녀의 여정을 읽는 것보다 실제 겪어야 했던 그녀의 어려움은 어마어마했으리라. 그럼에도 모험 앞에서 ‘Yes’를 함으로써 그녀의 대답은 삶의 이정표가 되고, 또 다른 이정표를 세우는 계기가 된다. 많은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기에 ‘부족한 것이 경험을 다채롭게 했다(What was absent colored experience. p.253)’는 표현이 나의 좌우명이 되길 바란다. 현재의 나 역시 부족한 것투성이이다. 남들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이 너무 많아 늘 이것이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이 되었다. 부족한 것을 자산으로 삼을 수 있고 삶의 양념으로 노래할 수 있는 그녀의 용기와 패기에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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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as a River : The powerful Sunday Times bestseller (Paperback) - 『흐르는 강물처럼』원서
Shelley Read / Transworld Publishers Ltd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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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연애소설을 읽고 싶었고 사랑의 기운을 받고 싶어서 고른 책이다. 내가 부러워하는 흐르는 강물 같은 삶은 깊음과 넓음이 있어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편승하지 않기에 가볍지 않으며 강물의 색깔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는 아름다운 색채를 띠고 있다. 쉼이 없으나 분주하지 않고 멈춘 것 같으나 늘 어딘가를 향해 유유자적 흘러간다. 강물 같은 삶을 살았고 지향했던 Wilson Moon을 사랑했던 Victoria의 슬프지만 멋진 삶을 읽으며 인간은 생각보다 용감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큰 용기이고 그 용기의 대가 또한 엄청난 희생을 요구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Wilson을 순수하게 사랑한 대가는 엄청난 아픔과 고통이었다. 혼자서 외딴 오두막에서 아이를 낳고 그에 대한 그리움 못지않게 압도하는 배고픔에 아이마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연히 만난 다른 사람의 자가용 뒷 자석에 아이를 놓고 도망을 쳤다. 그것만이 아이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 저수지 건설로 인해 고향 집을 떠나야 했던 그녀는 대대로 물려받은 복숭아 과수원은 살리고 싶었다. 도망치고 묻고 싶은 과거가 있는 반면 오래 오래 가슴에 함께 간직하고 싶은 과거의 유산 중 하나가 과수원이었나보다. 농과대학 교수의 도움으로 복숭아 나무들을 성공리에 이전하고 열매 없는 몇 년을 보낸 후 마침내 복숭아 수확을 하게 된다.

물질적 번영과 외적인 삶의 안정이 반드시 마음의 평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산속 공터에 피덩어리 같은 아들을 남기고 온 엄마의 심정은 매일 매일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녀는 매년 공터로 순례를 다녀왔고, 기념비적인 돌탑을 쌓기 시작한다. 복숭아가 얹혀있던 그 바위 위에 아들의 나이만큼 돌을 얹기 시작하고, 그 돌탑이 아들을 만나는 교량 역할을 한다. 아들을 입양했던 Inga Tate는 같이 자란 친아들 Maxwell을 잃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Lukas는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된다. 어쩌면 친아들보다 더 사랑했던 Lukas를 얻기 위해 Inga Tate는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돌탑에 가져다 둔다. Victoria, Inga Tate, Lukas는 각각 인간이기에 짋어져야 하는 다른 슬픔을 가슴에 묻고, 견디며, 포기하지 않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반드시 희극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닌 저마다의 비극적 요소가 있다. 그 비극이 우리의 삶에서 권태, 지루함, 교만함을 제거시키며 인간의 모단 부분을 둥글게 다듬으며 겸손의 미학과 감사를 배우게 하는 것일까? 인간은 비와 구름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개 숙이지 못하는 오만한 동물인지라 아픔과 상처의 양념을 통해 성숙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극단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Victoria의 삶은, 겉으로 보이기에는 비극적이지만 희극으로 대단원을 내린 역설이 있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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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nial of Death (Paperback)
어네스트 베커 지음 / Free Pr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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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에 살면서 가장 확실한 명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다.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는 불평등의 시대에 가장 공평한 진리다. 그 누구도 질병, 노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경미한 것을 제외하고 심한 질병에 걸리지 않고 평생을 살 수는 있다. 의학, 의술, 물질의 혜택으로 노화의 시기도 최대한 늦추거나 감출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시기와 방법을 달리할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달해야 하는 종착역 같은 것이다. 가진 것이 많아서 이 세상의 삶이 행복한 자는 최대한 늦게, 가진 것이 없어서 이 세상의 삶이 곤고한 자는 최대한 빨리 도착하고 싶은 목적지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이란 단어는 오랜 기간 터부시되어 왔고, 공론화가 되더라도 달가운 화제는 아니며, 죽음을 원한다고 해도 과연 그 고백 속에 얼마큼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 의문이다. 탄생, 발전, 진화, 팽창을 거듭하는 인간이 결국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인간의 이중성(duality)은 존재론적 불안감을 야기시킨다. 결국엔 부패하고 무질서를 맞이해야 한다면 과연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삶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마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간다. 이를 두고 파스칼은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광기일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실존적 모순이나 역설은 극복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영웅주의, 나르시시즘도 죽음이라는 공포를 잊거나 피하기 위한 긍정적 방어 기제가 될 수 있다. 우울증, 노이로제 같은 정신 질환 역시 근본적인 뿌리는 죽음이란 공포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거짓과 허상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허상도 궁극적으로는 민낯이 드러난다. 어린 시절 산처럼 높아 보였던 부모님, 사랑하는 연인, 최고라 선택했던 배우자, 절친이라 믿었던 친구들의 변화를 보며 다시 존재론적 모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원한 영웅, 변치 않는 아름다움, 한결같은 선은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은 불멸에 집착한다. 심리학, 정신분석학, 과학으로는 불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 닮아 있는 심리학과 신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죽음의 공포를 잊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 아닐까 한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Freud의 영향력은 오늘날도 엄청나지만 그의 성에 대한 집착은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그의 논리를 경시할 수 없고 공감도 가지만 존재론적 딜레마를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자신의 죽음의 날짜를 정해 놓았던 것과 삶에 대한 그의 염세적 태도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반면 Otto Rank와 Kierkegaard는 프로이드와 달리 신학에서 죽음의 해결점을 찾는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고아와 같고 살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인간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평생 허상을 붙들고 씨름하다가 결국엔 공허감 속에 빠지게 된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믿었던 ‘가능성’이란 단어가 얼마나 나를 기만하고 짙은 패배감 속에 묶어 두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느니 오히려 죽음을 초월하는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로움인가?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을 벗어 신에게 맡김이 얼마나 창의적인 생각인가? 그 신은 인간이 찾아온 불멸의 대상이 아닌가?

프로이드는 가시적이고 가능한 영역만을 연구했지만 죽음의 압도적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해 염세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에 존재하는 신을 믿음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누군가는 믿음을 또 다른 ‘창의적인 허상’이라 말할 수 있다. belief와 faith 사이에서 faith로 나가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 인간의 의지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어떤 원초적 힘에 의해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되고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 원초적인 힘과 섭리는 무엇일까? 작가는 그 힘을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모든 과학은 부르주아이고 관료주의라 표현한 걸로 보아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은 결코 실존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

창조의 목적과 인간의 실존 이유에 대해 심리학은 마법의 치료약이 되지 못한다. 결국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고 죽음을 초월하는 절대자인 신의 손안으로 이 문제를 맡김으로 인간은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고 정신적인 건강을 얻을 수가 있다. 작가는 구체적으로 기독교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종교 및 믿음의 절대적 필요성에 공감한다. 실제로 나의 신앙은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모두 찾아 주었다. 질병, 노화, 죽음은 겸손과 신의 존재를 배우게 하는 관문이 아닌가 한다. 젊음, 아름다움, 건강의 유한함을, 인간은 everything이 아니라 nothing임을, 유의미한 삶은 독립이 아니라 의존을 통해 가능함을 가르치는 영적 스승이라 칭하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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