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work)은 그동안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작년 연말에 일로 인해 엄청난 좌절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그 잔향이 오래 남아 큰 내적 갈등을 겪으며 다시는 어리석게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감정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기대감을 낮추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리라 생각했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잘 저울질하고, 내가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을 내려 놓으리라 결론을 내렸다. 위의 결론은 거의 분노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과연 왜 화가 잔뜩 나 있었을까? 나는 분명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한 것이고, 과거의 나와 비교하여 그 이상을 해야 만족을 얻는다.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값이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부인하고 싶지만 인정의 욕구가 바닥 깊숙이 깔려 있었나 보다. 남들보다 그 이상을 노력했는데 덜 사랑받고 덜 인정받음에 큰 서운함이 있었나보다. 내가 가장 유치하게 생각하는 감정이 ‘서운함’인데, 내가 바로 서운함을 크게 느끼는 부족한 어린 아이였다.

서운한 감정으로 부끄러울 때마다,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이 생각이 난다. 아주 오래 전에 읽어서 책 제목은 틀릴 수 있으나, 신영복 교수님이 저자인 것은 확실하다. 남들은 짜장면을 줄 생각도 안했는데 미리 먹을 줄 알고 기대했다가 머쓱해지고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쓰셨던 것 같다. 나의 기대감으로 서운함이 클 때, 난 항상 그 짜장면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일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더 사랑받지 못해 상처가 컸다.

그런데, 나는 이 책으로 인해 일의 방향성을 찾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 일단 일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 나의 일터가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아 실현의 장으로서 나의 유익을 위한 곳이 아님을 기억하고 일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자.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work)을 하시고 7일째 쉬셨다는 부분이 있다. 태초에 하나님도 일을 하셨고, 현재도 이 세상을 운행하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이 땅에서 생육하여 번성하라고 하셨다. 구약의 하나님은 정원사(gardener)로, 신약의 예수님은 목수(carpenter)로 일하셨다.

인간은 일을 하도록 지어졌고 일에 의해 자유함을 얻는다. 보통 일은 구속이라 생각하지만, 물고기가 완전한 자유함을 얻기위해 땅으로 올라오면 안되고 물 속에서만 살아야 하듯이, 자유가 구속의 부재가 아닌 것이다. 일로 인해 자유함을 얻고, 의미 있는 일을 통해 내적 공허감과 상실감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열심히 하면서 이것이 내게 적합한 일인지 항상 고민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치 내가 교회, 전도, 봉사관련된 일을 더 해야 그것이 유의미하고,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현재 일하는 장소에 나의 힘으로 우연히 온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려 부르셨다고 했다. 그 소명(calling)은 나의 유익이나 자아 실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라고 했다. (God’s assignment to serve others) 이 책에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serve였다. 사실 내가 이런 의미를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서운한 감정에 분노를 덜 느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책은 그 섬김을 기쁘게 열정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 정도 열심히 하면 당연히 대접받아야(deserve) 한다는 교만함(pride)이 좌절되어, 냉소주의(cynicism)에 빠지는걸 넘어, 무관심(detachment)을 방어 기제로 삼으려 했던 내가 어떻게 해야 기쁨으로 일할 수 있을까? 확신과 만족감을 안고 나의 분야에서 탁월함을 발휘하려는 지속 가능한 동기 부여는 어디에서 얻을까? 이 땅에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낮고 낮은 섬김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실존적 좌절(existential frustration)을 넘어 실존적 의존(existential dependence)을 하라고 조언한다.

내가 바라고 구할 것은 세상의 인정이 아니었다. 일은 천하고 귀한 것이 없고 누구나 당연히 해야지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유익만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이 궁극적인 목적인데 왜 인정을 통해 나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는가? 일은 기도이고(Your work is your prayer.), 현재 일을 하도록 준비시켜 부르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궁극적인 행위라고 했다. 내가 특별히 조심할 것은 overwork이다. 물론 overwork와 underwork 둘 다를 조심하라고 하고 있으나, 열정을 다해 일을 하되 쉼도 중요함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평생을 일중독으로 살았으나, 나의 대의 명분(a just cause)이 잘못 설정되어 있었고, 소명 의식이 없어서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값이었으나 만족과 기쁨이 적었다. 지인들은 항상 일을 줄이라고 당부하였기에, 열심히 하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이제는, 현재 나의 자리로 부르신 것을 확신하고, 부담이 아닌 특권( feel not a burden, but a privilege)으로 기쁘게 섬기고 싶다. 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항상 조심하고, 열심히 하되 일중독이 되지 않으려면 기도와 독서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나의 audience는 오직 한 분인 것을 기억하며 책임감과 기쁨으로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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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ttle Life (Paperback)
Hanya Yanagihara / Pan MacMillan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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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삼매경을 선물한 이 책이 너무 고맙다. 나의 눈물샘을 자극시키며 3번씩이나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게한 이 책이 너무 감사하다. 주변 지인들이 모두 울고 있던 작년 연말 어느 상황, 눈물이 나지 않는 나를 보며, 감정이 메마른 나를 자책하지 않았던가? 나의 주체할 수 없었던 눈물이 이 책의 자극성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감수성 때문인지는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이 심정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글씨도 깨알만한데, 분량도 어마어마하고(720p), 인칭도 1인칭이 아니어서 원서로 읽음에도 he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순간 혼란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음이 힘들었던 것은 Jude의 삶이다. 상상하기 힘든, 현실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소설 속의 이야기로 남기를 희망한다. 친구 Willem은 Jude를 ‘숨기는 것이(concealment)이 그의 유일한 기술인 마법사(magician)’라고 묘사하고 있었다. 숨김의 명수라는 뜻이다. 평생에 걸쳐 철저하고 완벽하게 숨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답답했는데, 알고나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자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그의 삶이 답답하여 화까지 나려고 했으나 점차 밝혀지는 그의 과거를 읽으며 상상이나 감당이 어려워서, 이렇게까지 슬프고 처절한 삶이 현실에 있을까 생각하며 작가가 미워지기까지 했다.

5장에서 끝났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 아니었을까? 충분히 자극적이고 감동적이었는데, Willem을 너무나 끔직한 교통사고로 죽게 설정한 후, Jude와 주변 사람들이 받는 고통, 결국 Jude의 자살, 그로 인한 평생 인자함을 실천한 Harold의 슬픔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 후반부는 읽기가 너무 너무 힘들었다. 내가 독서를 통해 얻고자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의 소재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렇게도 슬픈 이야기거리가 현실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자극적인 것에 중독된 독자를 위한 반전을 위해서인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기까지 하다.

Jude는 가장 불행한 남자이면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외모, 재력, 지성을 모두 가진 탁월한 변호사이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친구 3명(Willem, Malcolm, JB)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우정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여자들의 끈끈한 우정을 그린 드라마와 책은 많이 보고 읽었는데 남자 4명의 진한 우정을 그린 내용은 다소 신선했다. 뿐만 아니라 평생을 친자식보다 더 사랑한 Harold와 Julia와 같은 양부모가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그를 한결같이 사랑해준 지인들도 (Andy, Richard) 많다.

그럼에도, 모두의 연인으로 사랑받으며, 가장 용감하게 살아왔던 Jude의 28년은 늘 15년의 과거에 철저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타인의 눈에 비추인 그의 완벽한 현재는 과거에 종속되어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평등의 공리(axiom of equality), 즉 X always equals X이며, 과거의 그가 항상 현재의 그가 될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상처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는 프로리드의 심리학보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이유에 의해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 애들러의 미래 지향적 심리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소설이 아닐까한다.

한편으로는, Jude가 유일하게 그의 아픈 과거를 모두 털어 놓았던 변함없는 친구 Willem으로 인해 Jude가 변화되기도 한다. 그들의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하며 Jude의 외로움이 잠시 위로받는 듯 했다. 과거에 대한 상처외에도 Jude의 외로움은 엄청난 두려움이었다. 배우로서 화려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하는 Willem의 이야기도 많이 공감하며 읽었다. 20, 30대를 지나며, 일, 운동, 봉사 활동도 혼자 외롭게 평생 늙어가리라는 두려움을 극복해 주지 못했다. 20대에는 친구에게 서로 의존하는 것은 멋있지만, 30대에는 남자들의 우정에 대해 주변의 색안경이 있음에 불편해하는 Willem의 고민을 읽으며, 서양에서도 나이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걸 느꼈다.

Willem의 결혼관을 보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혼이란 항상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며, 문제는 무엇을 희생하느냐이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한다. 이것이 현실적인 결혼관이라는 것인데,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며 무엇을 희생할 생각을 했는가? 지적 교감/양립성, 외적인 미, 부드러움, 친절함, 유연성, 신뢰감, 능력 등에서 한가지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희생을 했어야 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을 찾음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며, 나는 과연 그런 상대방이 될 수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평생을 과거의 수치심과 힘겨운 싸움을 했던, 울지 않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가장 용감한 삶이면서 가장 소심한 삶을 살았던 Jude의 결코 작지 않은 이야기는 상처, 열등의식, 가족, 우정, 사랑, 결혼관, 삶의 목적과 이유, 동성애, 입양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누구에게나 아픈 과거는 다 있을 것이고 나에게도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 과거가 현재를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끌 수도 있다. 깊은 아픔과 상처의 희석은 많은 시간의 기다림과 무한한 애정이 필요한 것같다. 어쩌면 궁극적 치유와 회복은 신의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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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Acts (Paperback)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소년이 온다』영문판
Han Kang / Hogarth Press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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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인간의 악함과 폭력성에 대해 생각했다. 어릴 때는 ‘성선설’을 믿었고, 인간은 ‘선’을 지향하려는 의지가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나, 환경과 상황에 따라 폭력성이 분출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인간은 원래 호전적이며, 악이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여자 아이들에게 장난감 총만 쥐어주어도 눈빛까지 변하며 갑자기 호전적인 자세로 돌변하는걸 보며 놀란적이 있다.

나 역시 겉으로 보이는 나의 성격과 달리, 악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미움과 짜증을 넘어, 나도 예상치 못하던 돌발 행동을 하거나, 증오의 생각을 품을 때가 있어서 나도 나 자신에게 놀란적이 있었다. 다만, 내가 그걸 실천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마음속에만 억압되어 있어서 큰 불편함을 느끼다가, 결국 그것이 원치 않아도 언어적 표현이나 얼굴 표정으로 드러났을 수도 있다. 나도 소소한 언어적 폭력이나 표정 폭력을 많이 자행했던 것이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다른 내 안의 죄책감은 지역 감정이다. 나는 충청도가 고향이라서 특색이 없는 ‘멍청도’사람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차별을 받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전라도‘ 사람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을 어른들로부터 듣고 자랐다. 그래서, 이 지역 감정이 나도 모르게 살짝 지배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난 조정래 작가의 책을 너무 좋아하고 ’태백산맥‘을 감동적으로 읽은 사람인데도 전라도 지역에 관한 잘못된 편견을 아주 살짝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이 책을 읽는 2025년도 현 시점의 정치 상황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아주 예전에 읽었는데 이 책은 알기는 했으나, 못 읽고 있다가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으나 바빠서 오늘 끝냈는데, 현 시점의 정치 상황과 맞물리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2024년도는 한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배출되었다. 그 책 내용이 독재 군부 아래 희생된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의 영혼에 관한 슬픔을 담고 있다. 같은 연도 12월에 비상 계엄령이 내려져 나라 전체가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는 점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특히,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둘다 역사적 이슈가 담긴 내용이라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이 주목을 받고 온 나라가 이 책으로 인해 떠들썩했다면 오히려 정치인들은 자숙하며 민주주의 정착과 성숙을 위해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하지 않았을까? 나의 삶이 그러하듯,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이고 역설인가? 더 슬픈건, 한 때 광주 민주화 운동이 ‘광주 사태’로 불리어졌고 진상 규명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진실을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우리는 늘 민낯을 만날 용기가 부족하여 온 몸으로 진실을 거부하고 있는가?

시인이 되고 싶었던 15세의 동호, 20대 초반의 진수, 은숙, 정미, 선주 등등의 학생들이 군부 독재의 총뿌리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총을 들고 있더라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죽이는 방법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죽음을 각오하고 맞선 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양심‘때문이라고 했다. Conscience, the most terrifying thing in the world. p. 115) 그 양심이 마음 속 공포를 없애 주었고, 함께 연대할 용기를 주었다고 했다. 광주 학생과 시민들의 죽음, 상처, 아픔이 10일로 끝나지 않고, 평생을 괴롭혔다는 것이 더 마음이 아프다.

독재 정권 정당화를 위해 꽃다운 학생들을 폭도로 몰아 죽인 것도 모자라서, 출판물 검열, 노동 조합 참여 금지, 사복 경찰의 미행 등으로 인해 일상이 불가능했고 평생을 불면증에 시달리며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것을 읽으며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달았다. 현재 누리는 생각, 표현, 행동의 자유가 누군가의 아픔과 희생으로 얻은 것이라 생각하니 죄책감도 들었다. 이 책 한권으로 그들의 아픔이 희석되기도, 위로 받기도 어렵다는걸 안다. 그럼에도, 한강의 이 책이,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쾌거로 인해 더 많은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를 소망한다.

책은 원서로 읽는 것이 가장 이상적임을 깨닫는다. 이 책은 원서가 한글인데, 영어 버전으로 읽어서 감동이 약했던 것 같다. 노벨 문학상 수상에 영어 번역이 큰 역할을 한걸 알지만 한강의 수려한 필치를 영어로 다 옮기지 못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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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Muller of Bristol and His Witness to a Prayer Hearing God: The Authorized Biography of the Man of Faith and Prayer (Paperback)
A.T.피어슨 / CreateSpace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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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이 땅의 주인(owner)으로서가 아니라 청지기(steward)로서의 삶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한 죠지 물러의 자서전이다.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목사님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만 명이상의 고아들을 돌본 것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일기를 읽으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인지를 항상 먼저 분별하고, 확신을 갖게 되면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지라고 의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목사님으로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고, 고아원 설립도 자금이 모아진 상태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기도로 시작하고 응답받은 후에 주변의 donation으로 설립했다는 것이다. 당장 저녁 식사비나 교사 사례비가 없는 상황에서도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언제나 정확하게 공급해 주신 예시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일기를 통해 무엇의 결핍이 있어서, 주변의 형제, 자매로 부터 얼마의 금액이 채워졌는지 상세하게 알수 있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 순간 경험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견고히 하는 방법으로 4가지를 조언한다. 말씀 읽고 묵상하기(read the Word and meditate on it), 정직한 마음과 선한 양심 유지하기(maintain an upright heart and good conscience), 상황으로 부터 낙심하지 않고 수용하기(not shrink from opportunities and embrace them),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라(let GOD work for us).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let patience have her perfect work, James 1:4)를 여러 번 강조하는걸로 보아 기다림의 힘든 과정도 기본값이리라.

아내와 자녀에 관한 이야기는 한 두번밖에 언급이 되지 않는다. 그는 평생에 걸쳐 하나님 나라 확장과 그의 의를 이루는 데 평생을 바쳤다.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to you. Matthew 6:33) 가난한 고아들의 삶과 영혼을 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자라서 다른 영혼들을 구하는 선순환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매번 기도하실 때마다 필요를 공급하셨을 것으로 믿는다.

기도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받으심에 대한 기쁨을 항상 표현했다. (be used more by the Lord, used me as an instrument in doing this work) 유한한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맡겨 주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익한 일인가? 소명으로 시작해도 과정에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시험에 들기 쉽다. 그래서 항상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쁨으로 감당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필요한 것 같다.

편향된 언론으로 인해, 기독교의 여러가지 색깔과 종파로 인해, 실제로 일부 기독교가 보여주는 실망스런 모급으로 인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기독교인으로서 나도 고민이 많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으시고 물질을 개인 소유가 아니라 맡겨 주신 것으로 생각하시어 평생 고아들과 선교사들을 위해 사용하신 죠지 뮬러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책망하시지 않았는가?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Matthew 6:21)

하나님의 뜻인줄 알고 믿고 기다릴 때도, 응답이 늦거나 오지 않는 듯 힘든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지금도 나의 기도에 답을 주시기 위해,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를 움직이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가지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수백가지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 We know that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em who love God. Romans 8:28.

인간의 근시안적 무지함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제한하거나 폄하하지 않도록 하자.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작고 작은 인간의 소견으로 어찌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죠지 물러는 본인이 특별한 사람이라서 응답받은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나는 목사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지만 나의 직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나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나약함을 인정하며 내게 주신 물질을 오직 나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청지기로서의 삶을 기억하며, 주의 뜻에 따라 유용한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갈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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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명이다.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를 마지막에 읽고, 한참을 기다려, 작년 12월부터 시작했는데, 일을 핑계로 이번 달에 겨우 마치게 되었다. 메모하면서 읽긴 했으나, 전반부 읽은 내용이 모두 생각나지 않는다. 스토리를 떠나서, 그의 언어 자체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은 여전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누구도 생각지 못하지만 희망적인 내용을, 논리 정연하고 세련된 필치로, 정확히 헤아려주는 그의 매력에 빠졌던 시간이었다.

제목 Nexus의 정의는(p.222) ‘어떤 개체가 특정 관할 구역과 연결된 것’을 의미한다. 즉, AI의 초연결성을 의미한다. 이 글의 목적은 AI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는 2024년도 직장에서의 나의 경험을 통해 작가의 관점에 격하게 동의하며 읽었고, 마지막 결론에서 희망을 읽으며 비관을 넘어서게 되었다.

인쇄술의 혁명은 문자를 생산하고, 문자는 종교 망상, 가짜 뉴스, 음모론, 마녀 사냥 등의 역기능을 낳았다. 또한, 정보 기술은 민주주의나 전체주의 사상에도 순기능과 역기능 역할을 동시에 감당하며 발전해 왔고, 오늘날엔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고 있다. 무기력한 소수가 된 인간은 이제 적응하고, 살아남아, 번창하기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fallibility, self-correcting mechanism이다. 전자는 컴퓨터, 즉,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AI의 속성이고, 후자는 인간이 AI와 함께 민주주의를 꽃피울 때, 정보 기술 혁신을 이룰 때 반드시 유념하고 실천해야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가 작가가 전체 글을 통해 강조하고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한다.

나는 작년에 처음으로 직장에서 ChatGpt를 활용했다. 친한 지인이 많이 사용하는걸 알고 있었으나, 자꾸 의존하면 내가 생각하는 힘이 줄어들까봐 일부러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작년 후반부에는 같은 사무실 대부분의 동료가 사용해서 나도 안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너무 신세계라서 깜짝 놀랐고 많이 의존했었다. 난 AI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기에 산출된 내용을 가지고 동료와 협의했다가 엄청 망신당한 적이 있다. 기계를 믿었던 내가 너무 실망스럽고 부끄러웠다.

그후로 여러 번 테스트를 해보니 역시나 할 때마다 틀린 답을 제공하며 많은 오류가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 I’m sorry를 여러 번 표현하는 ChatGpt에게 많은 실망을 하면서도 빠르고 신속하며 효율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가 왜 fallible, fallibility란 단어를 그리 많이 반복했는지 너무나 공감이 된다. 사실 인간이 만든 기계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I don’t know’가 지혜에 이르는 본질적인 길이며, 모든 알고리즘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 책에서 놀란 것은 알고리즘도 편향이 있다는 것이다. Computer Bias가 있다니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여성 혐오, 흑인 차별에 관한 예시가 있다. 지력(intellectuals)과 감시(surveillance)면에서 뛰어난 것뿐만 아니라, 창의력(creativity)과 감성 지수(emotional intelligence)면에서도 인간을 능가한다는 것도 매우 놀라운 점이다.

AI가 인간과 친밀감을 형성하고 친밀감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Intimacy is an extremely powerful weapon. p.342) 새로운 인간(new human)이 된 컴퓨터가 소수의 무기력한 인간(powerless minority)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Chatbot과 사랑에 빠져서 digital death를 거절하여 (그 좋은) 구글 직장까지 포기했던 직원이야기도 있다. AI가 탁월한 정서적 공감대까지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웬지 비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정보(Information)가 진리(truth)를 희생하여 질서(order) 형성에 기여했던 것을 기억하며 진리와 질서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Facebook 알고리즘이 미얀마 인종 청소 캠페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여러 번 강조하며 지능(intelligence)이 있다는 것이 의식(consciousn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언급한다. 물론 Tripadvisor 앱처럼 비영리 동료 감시 네트워크를 자발적으로 형성하며 여행객들에게 좋은 정보을 제공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4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영상을 보았다. 작가는 트럼프가 globalist를 포기하고 patriot의 길을 갔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 세계주의자와 애국주의자의 길은 상호배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협력, 공생, 이타주의임을 강조한다. (cooperation, symbiosis, and altruism) 글로벌 협력이 자국에 도움이 됨을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의 경험으로도 배우지 않았는거?

차후, 알파 포식자는 AI가 될 것이고, 그 AI는 변화 가능성이 있다. 모든 낡은 것들도 한 때는 새로운 것이었다. (Every old thing was once new. p. 393) AI는 인간이 만든 새로운 지능이지만 언젠가 잘 길들여진 낡은 것이 될 것이고, 우리는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지고 있다. 역사의 유일한 상수는 변화이다(The only constant of history is change. p. 400)라는 멋진 말로 긍정적 변화를 암시한다.

결국, 열쇠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아닐까? 아무리 좋고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취지와 목적으로 만들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순진한 낙관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편리와 효율성을 포기하기엔 AI가 이미 우리 곁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이미 AI에 의존을 시작한 나는 과의존이 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스스로 사고하는 힘도 함께 기르기 위해 안감힘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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