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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brary at Night (Paperback)
Manguel, Alberto / Yale Univ Pr / 2009년 4월
평점 :
우리는 책에 의해 설립된 사회에 살면서 책을 읽지 않으며, 책이 악세서리가 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한다(p. 219). 매우 공감하는 표현이고 역설적 표현이나 악세서리라는 표현에는 긍정적이다. 책이 장식의 지적 소모품이 되어서라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다면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백화점, 까페, 심지어 공원 한켠에 책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고, 또 다른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책장을 열고 있는걸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런 겉치레도 아름답게 보이는건 나만 그런걸까?
이 책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영영 읽지 못했다면 서운할 뻔했다. 이렇게 보물찾기 하듯이 양서를 만나는 행운은 가끔씩 온다. 도서관에 대한, 책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고, 어느 페이지를 넘겨도 작가의 책 사랑이 스며 나온다. 여기저기서 책이 영혼의 치료제라고 노래하는 듯하다. 몽테뉴는 그의 집 3층에 위치한 도서관에 낮에만 갔다고 하지만, 작가는 밤의 도서관을 선호한다. 밤이 주는 신비함 때문인가 표지도 제목도 매력적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도서관에 갈 때마다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도서관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챕터마다 부제도 얼마나 잘 붙였으며 글도 얼마나 영혼을 울리는 표현이 많은지, 세계 최고 독서가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독서는 환생의 의식이라며 불멸을 추구하던 이집트의 신비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야기로 시작하여 책의 다양한 나라별 분류법의 역사 등 흥미진진한 도서관 이야기가 펼쳐진다.
‘권력(Power)으로서의 도서관’은 공공 도서관 만큼 인간 희망의 허영심을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는 사무엘 존슨의 명언으로 시작한다. 진정한 지식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페이지로 부터 건져낸 경험이 다시 새로운 경험으로 변화된 것이라 했다. 가난을 딛고 성장한 Andrew Carnegie의 역설은 다소 의아했다. 책을 읽었던 아버지와 노동 개혁 전도사였던 삼촌의 큰 영향을 받았음에도 카네기가 선택적 기억력을 가졌다고 할만큼 근로자들을 착취했고 부를 축적함에 무자비했다. 그런 그가 카네기 도서관 건립에 앞장섰다. 도서관이란 기념비적 건물을 통해 가난한 시절 탐했던 권력을 과시하고 싶었을까?
‘그늘(Shadow)로서의 도서관’이 가지는 역사도 전에 깊이 생각지 못하던 부분이었다. 세계대전 동안 파괴, 분실, 약탈된 도서관 및 책에 관한 내용이었다. Don Quixote, Pinocchio, Harry Potter 등의 책들이 나라마다 시대별로 금서로 지정했던 사례도 있었다. 많은 도서관 파괴와 도서 약탈 행위를 통한 상대 문화말살 정책은, 오히려 개종, 동화, 충성의 가능성을 없애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측면을 논하지 않더라도, 그 얼마나 귀중한 문화적 손실인가? 권력자들은 ‘기억(memory)’을 두려워 하는가? 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기에 범하는 파괴적 행동이리라.
‘마음(Mind)으로서의 도서관’에는 독일 역사학자 Aby Warburg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어린시절부터 책에 탐닉했던 그가 독서에 대해 상기했던 표현이 매우 인상깊다. “책은 무기력한 순간에 우울한 현실로 부터 벗어나게 했던 수단이었으며, 세상적 잔인함에 대비하는 예방접종” 같은 것이었다고.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면 세상적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면역력이 생길 수 있을까? 범인인 나에게도 가능하기는 한걸까?
‘생존(Survival)으로서의 도서관’에서도 그늘(Shadow)편에서 다루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로 1943년 나찌 정권시기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근처에 설립된 Block 31 수용소에서 8~10권의 책을 돌려 읽으며 열악한 상황에서 지적 삶을 지속했던 500명의 아이들 이야기가 있다. 일종의 아이들의 비밀 도서관이었던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서 책이 어린 아이들의 위안이 되고 희망이었다니 생각만 해도 뭉클하다.
‘망각(Oblivion)으로서의 도서관’은 제목만큼 굉장히 매력적인 내용이었다. 기억이 아니라 망각으로서의 도서관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많은 위안을 주었다. 많은 책을 읽었다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아둔한 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나를 탓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모든 독자는 지식과 무지, 회상과 망각 사이의 적절한 균형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고 했다. 밤이 혼돈이 낳은 자식이라면, 망각 즉 레테(Lethe)의 강은 밤과 불일치 사이의 끔찍한 조합으로 태어난 손녀라고 위안을 주고 있었다.
작가의 영적 스승이 되는 Jorge Luis Borges를 알게 된건 큰 수확이고 나의 무지의 재발견이다. 시력을 잃어가며 낮에는 글쓰기와 책읽기를 했고, 시력을 잃고 나서도 받아쓰기와 다른 사람에게 책을 읽어달라 하면서까지 독서를 한 Borges. 그는 시력을 잃고도 도서관장을 역임했다. 작가가 Borges에게 4년 동안 책을 읽어 주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사회나 국가의 정체성(identity)으로서, 범세계적 시민의 고향(home)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하는 도서관 속에서 우리는 과거를 만나고 과거 속에서 견딜만한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일까? 책 자체가 희망이나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하면 과장일 것이다. 우리가 찾는 것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인지도. 마지막에 작가는 자문한다. What do I search at the end of my library’s story? 답은, 위안(consolation)이었다. 직가가 도서관 속에서, 책 속에 묻혀 얼마나 행복했고 큰 위안을 받았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Bill Gates는 머지 않아 책이 없는 미래 사회(future paperless society)가 올거라 했고, 나도 예전에 그렇게 추측했으나 작가는 책을 읽는 것과 스크린을 읽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펄쩍 뛰고 있다. 나도 예전 추측과 달리 아이패드를 사용하지 않고 꾸준히 종이책을 구매하며 늘어나는 책장에 나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누군가 쓴 리뷰처럼, 책은 나의 사치품이자 필수품이며 운명이자 행운이 되었다.
책을 읽고 나서 또 다른 거대한 사치를 꿈꾸게 되었다. 서재나 북까페 개념에서 벗어나 작가처럼 나만의 도서관을 멋있게 꾸며서 책 속을 거닐며 책과 영혼이 만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도 삶의 활력이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