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3주간 깨알같은 817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니 덜컥 겁이 난다. 읽기만 해서는 책이 내 속으로 들어 오는 것은 아니기에, 누군가의 강압이 아닌데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꼭 리뷰를 써야 한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 있다. 오랜 숙제 같은 책이었고 언젠가 읽어야지 수백번씩 다짐했던 대략의 스토리와 결말을 알고 있던 유명한 책이라 내게 더 부담감이 크다.

엄청난 분량이고 오랜 기간 읽어서, 전반부가 아닌 후반부가 주로 내 기억에 남아서 그런지, 이 책은 통속적으로 알려진 Anna의 연애소설이라기 보다는 Levin의 유의미한 삶에 대한 탐구처럼 느껴진다. Anna가 철도역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한 후, 마지막 뒷 장은 주로 Levin의 삶에 대한 사색이 대부분이다. 그는 겉으로는 매우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으나, 죽음이라는 단어에 붙들려 있었고,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다. 결국,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선(the goo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유의미한 삶에 대한 추구는 세 가지 다른 사랑의 옷을 입고 실험대에 올려져 있다. Stiva와 Dolly의 사랑은 러시아 귀족들의 사랑 없는 가정 생활과 허영의 단면이다. Stiva의 불륜을 알고 있으며 그를 존중하지 않으나 필요하기에 Dolly는 이혼을 못하고 겉으로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다. 책 전반에 펼쳐지는 러시아 귀족들의 사교계는 매우 교양있고 세련된 모습이지만 위선과 가식의 포장지가 두껍게 쌓여 있어 진실이 숨을 못쉬고 있다. 영어 번역이지만 이 책에 mockingly(조롱하듯이)라는 단어가 매우 빈번이 사용됨이 우연이 아니리라.

뜨거운 불같은 사랑을 한 Anna와 Vronsky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둘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리라. 작가 톨스토이는 실제로 이웃에 사는 여성이 철도에 몸을 던진 사례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사랑도 모른 채 20살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와 결혼한 Anna는 고아로 자랐고 오로지 일밖에 모르는 기계같은 남편과 달리 기차역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적극적인 구애를 해 오는 Vronsky와 열정적인 사랑을 이어가고, 딸을 나은 후, 아들과 남편을 버리고 유럽으로 떠난다. 이혼도 못하고 사랑하는 아들도 만나지 못한 채 사교계에 발도 못 넣고 오로지 Vronsky의 사랑만을 갈구하고 그를 구속하려다가 질투의 화신이 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Anna와 Vronsky는 모두 사랑을 위해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른 경우이다. 반대로 그들이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고 감정을 속인 채 일상을 지속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은 비극적 결말로 처참했으나,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 도덕과 논리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기에 나의 어설픈 가정은 이 즈음에서 멈춘다. 보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미모를 갖춘 Anna도 질투의 마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저마다에게 다른 색깔로 찾아가는 사랑이 과연 무엇이길래?

작가 톨스톨이의 분신으로 생각되는 Levin은 올곧은 청년이다. Kitty에게 청혼 거절을 당하고도 삶의 순수(purity of life)를 추구하며, 고독한 시골 생활임에도, 그 고독때문에 더 충만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귀족의 신분이나 농민들과 소통하며 직접 농사일을 같이 하고 땀흘리는 육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정신이 쇠퇴할거라 믿으며 잔디깍기를 하루종일 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Kitty는 Levin을 ‘다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Everything for others, nothing for himself)’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Levin에게 두 가지 화두는 죽음과 종교였다. 사랑했던 형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언제나 죽음이란 단어가 그를 괴롭혔다. 수 많은 철학 서적을 읽어도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복형인 Sergei과 늘 공공선(common good)에 기여하는 삶에 대해 토론을 하며 죄책감을 느끼지만, 확신과 절대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았다. 결국 농민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필요에 의한 삶이 아니라, 신과 진리를 쫓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선의 법칙(law of the good)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공공선을 달성할 수 있다는걸 알게 된다.

제목(Anna Karenina)과 달리 이 책은 Levin이 주인공이다. 사랑이 없는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할지 짐작이 된다. 순수한 Levin도 Kitty를 향한 심장이 멎을듯한 사랑고백의 과정이 있었기에 삶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색이 인간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랑의 색깔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불같은 사랑이라 불리었던 그 황홀감이, 미세한 현실의 무게 앞에서는 흉물이 되다 못해 수치와 오명이 되는걸 보면서 허무감이 찾아든다.

예전에 내가 가졌던 설레임과 들뜬 감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내가 진정한 사랑이란 감정을 한 번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사랑과 함께 종교 또한 내가 이 책에서 건진 보물이다. Levin의 종교에 대한 고민거리를 읽으며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책은 종교에 발을 담그며, 내 지식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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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2-1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원서!!! 로 안나를. 대단하세요!
레빈이 Levin 으로 보이니 더 근사하네요 ㅎㅎ

초딩 2021-02-1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역시 펭귄!

serendipity 2021-02-14 23: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ㅋ 펭귄 문고가 좋아요^^ 그리고, 전 국어 실력이 부족하고 전공이 영어라서 원서로 천천히 읽는게 이해에 도움이 되긴해요 ㅜ 전 문과라서 이과계열 도서 읽는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또한, 북플에서 책 열심히 읽으시는 분들 보면서 너무 많이 배워서 아주 좋아요^^ Thanks a million!

초딩 2021-02-15 00:04   좋아요 0 | URL
호기롭게 산 펭귄 원서들을 serendipity 님 보고 다시 슬쩍 봐야겠습니다.
괄호 말도 무척 감사합니다. Common good, law of the good
한글로도 설명하기 힘든데 도대체 영어로는 뭐라고 할까 궁금한 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때 그 목적으로 원서를 사기도하는데 찾다가 포기해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