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e Christianity (Paperback) - C.S.루이스의『순전한 기독교』원서
Lewis, C S / Collins / 201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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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동일한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직장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이 선정되어 다시 읽었다. 처음 읽고 나서도 후기를 쓰지 않은걸 보니 내가 집중해서 읽지 않은 것 같다. 두 번째도 모두 잘 이해는 못한 것 같다. 여전히, 언제나 부족한 나는 의지할 목발, 어깨, 팔이 필요하다. 나는 포도나무 가지로서, 절대 포도나무를 떠나 열매를 맺을 생각을 꿈꿀 수 없다는걸 새삼 느낀다.

‘나니아 연대기’란 책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작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한 때 무신론자이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기독 서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기정 사실화하고 시작하지만, 이 책은 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가로 시작한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 즉, 이기적이면 안되고 공정해야 하며 악이 아닌 선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본성이 있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할까?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며 온 우주는 어떤 섭리와 법칙하에 운행되고 있다. 그 섭리의 주관자가 누구인가?

오늘 우연히 물리 전공자 지인을 만났다. 난 오랫동안 과학적인 논리 끝에서, 과학자들이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이성적 논리적 분석적 논리로 풀지 못하는 과학적 원리가 얼마나 많을까? 지인은 그걸 ‘우연’이라고 말했고, 배웠던 물리학 교수님들이 대부분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연’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다. (Coincidence is God‘s way of remaining anonymous.) 우연의 우연이 반복되면 과연 그것이 우연일까? 우연이 절대자의 섭리가 아니라면 우연을 어떤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인간 본성은 옳은 일을 행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해서는 안된다는걸 알고는 있으나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기독교인은 절대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회개로 인해 용서를 약속받으며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얻지만, 기독교는 위안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믿기지 않는 당황과 놀라움으로 시작한다. 진리를 찾으면 위안을 얻고, 위안을 찾으면 그 어떤 진리와 위안을 얻지 못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내가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3장 기독교인의 행동 중용서이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고(loving your neighbors as yourself),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hate the sin and not the sinner)는 구절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낙담할까? 어떻게 원수까지, 미운 이웃까지, 죄를 지은 사람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는지, 이해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걸 실천해 왔다는걸 알고 깜짝 놀랐다. 즉, 나 자신(myself)을 그렇게 쉬지 않고 사랑해 왔다는 문구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실 나 자신의 교만, 허영, 큰 실수, 욕심, 분노, 질투, 게으름 등등이 싫고 혐오스러웠던 적이 얼마나 얼마나 많은가? 왜 내가 그 때 그 사람에게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큰 죄를 지었는지 내가 너무 원망스럽고 부끄럽다. 그런데, 쉬지 않고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기 위해 운동, 독서, 읽기 등등으로 노력해 왔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아픔과 분노가 약해지길 기다려 주고, 회복되어 다시 새롭게 시작할거라 믿어 주었다. 나 자신처럼 이웃을 대하라고 했다. 꼭 사랑이라고 해서 좋아할 필요는 없어도 용서하고 기다려 주고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사랑스러운 점이 하나도 없어도 오직 내가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 것처럼, 사랑해야할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영적인 암으로 정의되는 교만(Pride)은 기독교에서 가장 죄악시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교만은 타인과 경쟁하며 내가 아닌 나를 높이려하는 거짓된 자아의 모습이다. 추하고 어리석은 거짓 자아의 옷을 벗음으로써 기쁨으로 낮아지는 겸손과 참다운 나를 찾는 무한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내가 교만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도 교만이다(If you think you are not conceited, you are very conceited indeed.)라는 문구에서 엄청 충격을 받았다. 겸손의 옷을 입으며 믿음의 진보를 이루기가 이리 어려운가?

믿음이란 무엇일까? 상대가 누구이든 믿는 사람이나 물건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위안을 주지만 절대 절대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했다.(Never never pin your whole faith on any human being.) 조변석개로 변하는 나를 누군가가 믿고 있다면, 그는 나의 부족한 모습으로 반드시 실망할 것이다. 그 실망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 쉽지만 만족시켜 드리기는 어렵다고 했다.(God is easy to please, but hard to satisfy.)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new man)이 되어, 사랑받고 복받기를 넘어, 작은 예수(a little christ)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We must get over wanting be needed.) 불완전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프로젝트임을 알지만, 그런척하며 살기(pretence, behave as if)를 반복하다보면 실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만족하실 때까지 불가능 프로젝트에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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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3-08-04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리뷰네요 ^^

serendipity 2023-08-04 05:58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