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onfession Leo Tolstoy (Paperback)
Leo Tolstoy / Fili Public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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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톨스토이의 송두리째 흔들렸던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기까지의 고백을 담은 이 책이, 길 잃은 세대의 나침반이 되길 소망한다. 풍요 속에서 그를 끈질기게 괴롭힌 화두는 ‘대의명분, 이유, 의미(cause, reason, meaning)’였다. 존재의 이유와 목적에 스스로 답할 수 없다면 그 삶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는 자신을 ‘기생충‘이라 자책할 만큼 치열하게 괴로워했다. 오늘날에도 같은 고민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들에게, 아픔마저 투명하게 드러낸 이 참회록이 잠든 영혼을 깨우는 촉매가 되길 바란다.

15세에 철학 작품을 읽으며 교리를 거부하고 16세에 기도를 멈춘 그는 ‘도덕적 완벽’을 추구하다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갈구했다. 어디선가 완벽이란 단어는 오직 신에게만 어울리는 단어라고 들은 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했기에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교리와 삶의 실천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종교인과 지인들의 모습에서 그가 얻은 것은 좌절감과 경멸감이었다. 파리에서 바라본 공개 처형 장면을 지켜보며, 과연 이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지 생각하며 그는 참담해했다.

부와 명예의 절정에서 그를 사투로 몰아넣은 결정적 계기는 형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지혜롭고 선했던 형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그는 물질도, 사랑도, 신앙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함을 깨달았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그는 비참하고 괴로웠다. ‘진보‘와 ‘발전‘이라는 화려한 이름 아래 지인들처럼 향락을 쫓으며 살았으나,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역 앞에서는 모든 성장이 허무로 귀결될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이면과 달리 그의 내면은 어두운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인간은 질병, 노화, 죽음(sickness, old age and death)이라는 필연적 굴레를 피할 수 없다. 이를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다르다. 무지로 외면하거나(Ignorance), 쾌락에 탐닉하거나(Epicureanism), 죽음으로 저항하거나(Strength), 혹은 솔로몬과 쇼펜하우어처럼 삶의 허망함을 노래하며 약함(Weakness)을 드러내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철학과 과학이 삶의 의문에 답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지게 함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는 직관을 지울 수 없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은 유기체이든 무기체이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정렬되어 운행되고 있음을 보며, 결국 그는 지식의 교만함과 그 허상을 인정했다. 삶의 유의미함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은 이성을 버리고 비이성적인 지식이라 생각했던 신앙을 택하는 것이었다. 죽음이 파괴하지 못하는 삶이 의미를 갖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이다. 죽음이 예정된 유한한 세상에 살지만 무한하고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인지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믿음과 삶이 일치할 때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농민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모습에서 참다운 신앙을 보았다. 과중한 육체노동을 하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내는 농민들을 보며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직 읽지는 못했으나 ‘편안함의 습격’이란 책이 시사하듯, 몸의 편안함이 마음의 질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주는 불편함을 일부러라도 감수하고 노동의 신성성을 깨달으며 편안함을 벗어나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수반될 때, 소소한 일상에 대한 감사가 넘칠 수도 있다.

지식의 한계로 명시할 수 없으나 이 세상을 정확하게 운행하는 섭리가 있음을 깨닫고도 실존의 위기는 언제든 덮칠 수 있다. 인간이 공중에 덩그러니 매달려 있고 심연의 아래를 보아도 무섭고, 바라보지 않아도 언제 떨어질지 몰라 무서울 때, 단지 위를 바라봄으로써 공포를 물리칠 수가 있다. 질병, 노화,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기둥이 있는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20대에 저술을 시작하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라는 대작을 쓰고도, 50대 초반에 삶의 위기를 맞이한 톨스토이가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 크다.

그의 치열한 사투가 바로 나의 오랜 화두였고 누구나의 고민일 거라 생각한다. 내 소견으로 다 알지 못하나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를 희미하게 알고 있다. 명확하고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처럼 또다시 ‘삶의 이유’로 흔들릴 때가 올 수 있으리라. 그때는 내 지식의 한계와 교만을 내려놓고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하며 유한한지를 기억하며,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신의 섭리는 얼마나 무한하고 영원한지를 떠올리며 아래가 아닌 위를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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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Why Bother? (Paperback)
Philip Yancey / Zondervan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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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인 ‘Church: Why Bother?’를 직역하면 ‘교회, 왜 굳이 성가시게 가야 하지?’라는 냉소적인 질문이 된다. 반면 우리말 도서명인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은 애증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신앙인의 마음을 절묘하게 포착해냈다. 불신자가 교회에 갖는 의구심 또한 그 기저에는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 비판을 성장을 위한 뼈아픈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나와 같은 고민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따뜻한 해답을 건네준 이 책이 못내 고맙다.

필립 얀시의 책을 읽는 지금, 공교롭게도 그는 불명예스러운 논란으로 활동을 멈춘 상태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성경의 선언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작가의 이중성에 잠시 반감이 일기도 했으나, 이내 그의 티눈보다 내 눈 속의 들보가 더 무거움을 깨달았다. 소설 ‘주홍글자’의 딤즈데일 목사처럼, 그 역시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영혼의 가벼움을 얻었을까. 그의 인간적 얼룩이 이 책이 머금은 빛나는 가치까지 희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작가의 허물은 교회의 민낯과 닮아있다. 교회는 선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세상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위태로운 운명을 타고났다. 교회가 완성이 아니라 ‘공사 중인 시작점’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과도한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다. 기대를 내려놓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용이며, 오랜 기다림의 시작이다. 실수투성이인 나를 포기하지 않고 안아주어야 하듯, 부족함이 교회의 ‘기본값’임을 인정해야 한다. 작가는 관찰자의 시선을 거두고 시선의 방향을 하늘로(Up), 주변으로(Around), 밖으로(Outward), 그리고 안으로(Inward) 옮기라고 조언한다.

예배의 청중은 오직 하나님이며, 목사는 배우에게 대사를 상기시키는 ‘프롬프터(Prompter)’에 불과하다. 전령이 메시지를 전달할 때 표현이 다소 서툴거나 지루하더라도, 그가 전하는 본질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기쁘게 해야 할 대상이 오직 하나님뿐이라면, 우리에겐 설교의 기교를 채점하거나 목사를 정죄할 자격이 없다. 그간 주제넘게 설교를 판단했던 나의 오만함이 이 글 앞에서 뜨겁게 부끄러워졌다.

교회는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뒤섞인 ‘멜팅 팟(Melting Pot)’과 같다. 하나됨(Unity)은 획일성(Uniformity)이 아니며, 다양성(Diversity)은 분열(Division)의 동의어가 아니다. 본능적으로 결이 같은 사람에게 끌리겠지만, ‘같음’만 수용하는 곳에는 예수의 숨결이 머물 수 없다. 나와 다른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

교회는 ‘거름’과 같다. 한곳에 쌓여 있으면 악취를 풍기지만, 넓게 나누고 펼쳐지면 세상을 비옥하게 일군다. 기독교를 ‘목발 종교’라 부르는 냉소적인 시선조차, 사실은 우리가 서로의 목발이 되어주어야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증명한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AA)이 교회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사례는 뼈아픈 대목이다. 교회가 은혜의 등불이 되기는커녕, 판단의 잣대로 타인의 아픔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본다.

헌신에 있어서는 ‘신경과민’과 ‘굳은살’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되, 내 눈물만으로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의 수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의 가시처럼, 인간은 약함이라는 틈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한다. 이웃에게 어깨를 빌려주어도 아무런 진전이 보이지 않는 그 막막한 순간, 우리는 지나친 예민함을 내려놓고 거룩한 굳은살이 돋기를 기다려야 한다. 내 사랑의 무게를 다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교회가 나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해묵은 기대를 내려놓으려 한다. 오직 하나님의 전에서는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함을 가슴에 새긴다. 겸손히 말씀을 경청하는 연습부터 다시 시작하여, 공동체의 가장 낮은 곳에서 기꺼이 사랑의 흔적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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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pstairs Delicatessen: On Eating, Reading, Reading about Eating, and Eating While Reading (Paperback)
Dwight Garner / Picador USA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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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지적 유연함을 지향한다고 말은 하지만, 내게 익숙한 것을 먼저 취하고 낯섦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는 것 같다. 사고의 경직성을 지양하려면 다양성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열고 다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데, 인지 장벽이 높아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만 안주하려 한다. 이런 나의 고집은 이 책의 보석을 캐내는 데 큰 장벽이 되었고, 즐거운 독서가 아닌 완독에 의미를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했다. 독서(reading)에 관한 내용인 줄 알고 구매했는데, 실상은 음식(food)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왕성한 식욕만이 주가 아니라 eating과 reading이 늘 병행되는 내용이라서 매우 독창적이고 이국적인 면이 있었다.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 도서라 할지라도 내 독서의 지평을 넓히는 데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대화와 사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을 논함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시대가 되었다. 음식은 공용어이며 즉각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라는 표현(Food was a lingua franca and a source of instant nostalgia. p. 213)은 현대를 가장 잘 대표하는 문구가 아닌가 한다. 나 역시 먹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나 음식은 나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 요리에 문외한이고 미각이 발달하지도 않아서인지 ‘맛집 투어’라는 말이 생소할 정도다. 그러나 이런 내가 별종이다 싶을 정도로 지인들 대부분은 음식에 관심이 높아, 심드렁한 내가 이상한가 싶을 때가 많다. 보편성이라는 흐름에 올라타는 흉내라도 내야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이 책은 내게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

어린 시절 작가는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먹으면서 책을 읽고 책을 읽으며 잠이 드는 열독가였다. 책뿐 아니라 신문, 잡지, 간행물 등 다양한 분야를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것이 요즘의 우리와 다른 점이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 먹기와 읽기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다. 친구들과 어울려 보내야 할 시기에 읽기와 먹기를 동시에 하며 왕성한 식욕뿐 아니라 열정적인 독서 편력을 과시했다. ‘Popcorn Reading Parties’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작가는 먹으면서 독서를 했던 것 같다. ‘인간은 기기와 결혼했다(men are so wedded to their gadgets. p. 204)’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휴대폰에 중독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작가의 방법을 도입하면 독서 인구가 늘어날지 궁금하다.

아침, 점심, 쇼핑 리스트, 수영, 낮잠, 음료, 저녁 등의 순서로 각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각 시기에 맞는 책과 작가가 함께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언급된 작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과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다. 나는 그들의 책을 읽으며 기억나는 요리가 전혀 없는데, ‘사랑하면 알게 되고 보인다’더니 작가는 수많은 도서 속 음식과 작가의 취향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커피(Kopi Luwak)도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음식 비평을 쓰기 위해 6~7시간 동안 장소를 바꾸어가며 집중해서 읽는다는 내용에는 매우 공감했다. 그만큼 독서에 대한 사랑과 실천은 별개의 일이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현재 K-Food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해서 한국 음식을 살짝 기대하며 읽었는데, 2023년에 출판된 책임에도 언급은 한 번 정도였다. 『Crying in H Mart』를 통해 떡국이 소개된 것이 약간 아쉽긴 하다. 과거 서양 문화에 대해 가졌던 무조건적인 동경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지금, 언젠가 한국 음식이 전 세계적으로 더 깊이 인정받는 시기가 오길 바란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도 좋지만,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나라 고유의 미, 멋, 맛을 유지하며 다양성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음식이 아닌 독서에 관심이 많기에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형이상학적 숙취’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작가는 우울증, 슬픔, 외로움 등의 형언할 수 없는 복합체를 ‘형이상학적 숙취(metaphysical hangover)’라고 불렀다. 숙취를 독서로 이긴다니 얼마나 창의적인가. 숙취 해소용 독서(hangover reading)로 밀턴의 『실낙원』을 추천하며, 기분이 나아지기 전에 감정적으로 더 우울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적인 고통은 단순한 조언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행복의 상대성으로 인해 즐거운 상황이 오히려 박탈감을 줄 수 있기에, 낙원을 잃은 절망감을 먼저 직면해야 숙취를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일까. 이 대처법만 보아도 작가가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요리는 ‘조리법의 불확실성을 음식의 확실성으로 변화시키는 것’(transformation of uncertainty(the recipe) into certainty(the dish))이라 했다. 요리사에 따라 불확실성이 커질 위험은 있으나, 결국 확실한 예술 작품으로 탄생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어린 시절의 취미를 직업으로 이어가며 평생 즐겁게 일하는 작가가 한없이 부럽다. 나는 먹으면서 독서하지는 않지만, 맛집 투어가 유행인 시대에 작가의 독서법을 빌려서라도 더 많은 사람이 책을 가까이하게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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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light (Paperback)
수잔 최 / Vintage Publishing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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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고 그저 나의 부족함만 일깨워준 책이다. 글자만 읽는 느낌이었고, 책이 나를 무섭게 노려보는 압박감이 있었다. 차라리 한숨에 다 읽었다면 감동을 더 크게 느꼈으리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 반드시 끝내리라는 의무감으로 접근해서 더 어려웠다. 비행기 안이나 호텔 방에서도 책을 펼쳤지만, 눈으로만 읽고 마음으로는 다가가지 못했다. 많은 분량을 넘어 어려운 단어가 너무 많았다. 고전을 읽을 때도 단어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는데, 오히려 신간을 읽으니 완전히 처음 보는 단어가 많아서 찾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전후 문맥으로 추론할 수 있었으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 하나씩 찾아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고, 생소한 단어가 너무 많아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느끼며 절망했다. 배움은 끝이 아니라 날마다 시작임을 알게 해 주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가 한국의 아픈 분단 현실을 조명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영어 전공 후 우리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고조되었다고 자부하는 나도, 통일에 대해, 북한 동포에 대해 잊고 사는 적이 많은데, 작가가 우리나라의 슬픈 분단 현실을 소설을 통해 상기시켰다. 분단의 현실은 한국인이라면 직시하고 인지함으로써 반드시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작가는 영문학 전공이고 창의적인 글쓰기를 지도하는 작문 교수라서 탁월한 은유나 직유를 통한 서사적 표현이 많았으나 직관적인 감동을 느끼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건의 전개, 한국의 아픈 과거에 대한 역사적 배경, 한국의 고유명사를 그대로 표기한 점 등이 아마 외국인 독자들에게는 약간의 난관이 아닐까 한다.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줄거리에만 길들여진 나의 두뇌도 큰 도전을 받았다.

광복 직후 좌익으로 몰려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죽음을 당한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갔던 한국인 부모의 피를 받아 일본에서 태어나 총명했던 Seok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교수가 되었으나 그는 늘 그늘과 친숙했던 사람이었다. 안정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 그린 카드를 소지하였으나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사이에서 그의 정체성은 표류하는 배와 같았고, 아내인 Ann조차도 그의 과거에 대해 알 수 없었고, 과거를 말하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북으로 간 한국인 부모가 있다는, 죽음보다 무서운 연좌제는 평생의 업보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하루가 얼마나 무섭고 암울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조총련 소속이었던 동생 순자와 지속적인 연락을 하는 그에게 부모와 가족은 어떤 개념이었을까? 위로 받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안식처이기 전에 계륵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바닷가 산책 중에 아빠를 잃은 Louisa는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빠가 익사했다고 하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익사가 아니라고 추측하지만 증명할 길이 없다. 어린 시절 아빠를 잃은 상처, 평생 자유롭지 못한 몸을 끌어안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엄마를 지켜보아야 하는 Louisa를 읽어 내는 것도 힘들었다. 각자의 관점에서 심리를 그려내고 있는 것도 이 책의 묘미이다. 청소년 소설 Wonder처럼 전지적 시점으로 등장 인물의 심리를 묘사해 주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할 수가 있어서 독자들이 오해하는 걸 막아준다. To Kill a Mockingbird에서 읽은 유명한 명언이 생각난다. “You never really understand a person until you consider things from his point of view… until you climb into his skin and walk around in it.” 피부 속으로 들어가 걸어보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북한으로 납치당한 Seok의 처참한 인간 이하의 삶이 그려지고 있다. 체계적인 굶주림 (systematic starvation)이라는 표현이 있다. 굶주림 앞에서 고상하고 품격 있는 삶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초라한가? 살기 위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오직 생존만을 위해 살며, 나무껍질 없으면 눈을 먹으며 삶을 유지한다. 겨울에는 눈까지 인색하여 눈덩이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상상이 되는가? 먹을 것이 없어서 쥐도 잡아먹으며 삶을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만주 땅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선교사와 NGO 기자의 도움으로 마침내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빠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오게 된 Louisa의 손을 잡고 그는 평안히 잠들게 된다. 소설 속 그는 마침내 북한 땅을 목숨 걸고 탈출하기는 했지만, 현재 이 순간에도 1인 독재 체제 속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있을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온다.

만주에서 탈출한 북한 동포들을 돕고 있는 목사님이나 NGO 기자처럼 현재 이 순간에도 목숨 걸고 인도주의적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나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내가 아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유익을 살아가는 것 같으나, 현실 속에서도 이타적인, 인도주의적인 희생과 봉사를 펼치며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다 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불의와 싸우며 노력하기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닐까 한다. 불가능처럼 보였던 독일도 통일을 이루었는데, 우리나라는 언제 즈음 통일 한국을 그릴 수 있을까? 불가능이란 단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이고 신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이냐는 역시 신이 결정을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한 꿈을 꾸며 지속적인 도전으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역사적인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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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r (Paperback)
John Edward Williams / New York Review of 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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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몰이를 하는 책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측하여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고, 나도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 작년부터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이제야 읽으며 발행 연도 때문에 깜짝 놀랐다. 1965년도에 출판된 책이 이제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중간에 이유를 찾아보곤 했다. 사실 영문과 교수였던 분이라 문학적인 표현을 많이 기대했는데 앞부분은 다소 지루했다. 아름다운 배경 묘사나 마음을 꿰뚫는 심리적 표현 없이 무미건조하게 전개되는 주인공의 삶은 흥미롭지 않았다. 감정의 널뛰기를 하는 나와는 대조되는 그의 삶은 이름만큼 단조롭고 묵직했다.

Stone이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발에 걸리는 돌은 어디든 굴러간다. 작게 혹은 크게 차이든, 내던져지는 대로 그 자리에 머무르고, 어떤 건축물에 사용되든 그 자리에 꼭 알맞게 부합되어 조화를 이룬다. 가볍지 않고 진중하며 어떤 상황에도 분노하지 않는다. 진흙과 섞여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금세 적응하여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빛나지 않으며 튀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나 맡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고 인정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눈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존재 가치는 기억에서 잊힐 것이다. 석화된 인간과 유사한 스토너를 읽으며 화가 나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적응하는 그는 행복한 삶이었을까?

무엇이 스토너를 스토너답게 만들어 주는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생계 유지가 전부였던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대학 졸업 후에도 당연히 농업을 이어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셰익스피어 소네트 73번을 읽으며 문학적 감수성이 폭발하고 교수의 추천을 받아 영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 그것 말고 그 무엇이 필요한가? (˝It’s love. You are in love. It’s as simple as that.˝ p. 20).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좋다는 문구가 생각이 난다.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우선순위가 사랑이길 바란다. 스토너는 자신이 사랑했던 문학 교수가 되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을 간파하고 이끌어 준 교수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학생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어 발굴하는 것 또한 교사의 역할이 아니던가? 스토너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읽어내어 영문학 전공을 추천한 Sloane 교수가 없었더라면 스토너는 농부가 되어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도와 조언으로 인해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그의 삶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아내 Edith였다. 그들은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왜 불행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몹시 궁금하다. Edith의 성격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기에 그렇게 특이한 양상을 보였는지, 그녀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그 사람의 피부 속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문구를 떠올린다.

스토너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애정 없는 아내와의 관계, 갑자기 아이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 퇴근 후 채점하고 수업 준비하며 딸 돌봄, 딸과 서재에서 함께 책 읽으며 유지했던 평온한 관계, 아내의 딸에 대한 집착으로 딸과 소원해진 거리 등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인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나 프로처럼 잘 적응하는 모습에 놀랄 뿐이다. 개인적으로 스토아학파 관련 책을 읽고 나도 그렇게 환경에 상관없이 인내하고 적응하고 싶었다. 스토너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가 stoical이다.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그는 화석화된 인간이 아니고 살아 숨 쉬는 감정의 동물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쉽게 단정 지음은 매우 위험하다.

Lomax와의 일로 인해 가르침에 대한 열정도 상실하고 마치 식물인간처럼 살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덧없고 허무하며 무(無)에 수렴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Katherine Driscoll을 만나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일에 대한 열정도 잃어버린 그에게 캐서린은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그에게 그녀는 ‘처음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아님‘을, ‘사랑은 끝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가르쳐 주었다. 캐서린 또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It takes being in love to know something about yourself.˝)

서로의 관계를 given opinion으로 부르며 사랑과 배움이 하나의 과정인 듯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지적인 탐구도 잘 이어갔으나, 결국 스토너는 캐서린을 잃고 다시 폐인이 된다. 사랑에 대한 상실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을 반복하며 40년간의 가르침을 이어갔다. 은퇴를 완강히 거부하던 그에게 찾아온 질병으로 마침내 가르침을 내려놓게 된다. 스토아 철학적 인내의 삶(stoical endurance)을 살아낸 그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을까? 대학 시절 이래로 늘 책과 함께했고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책의 가치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고 책에서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허상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작은 일부가 책에 있었고, 앞으로도 책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스토너는 문학을 사랑했고 가르침을 좋아했다. 딸을 돌보며 채점을 하고 수업 준비를 했던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된다. 의무감을 넘어 애정이 있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비난받는 캐서린과의 사랑은 죽어 있던 그의 영혼을 살렸고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성과 논리로만 판단하기에는 사랑과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열정적인 삶이 무엇이고 열정을 바쳐 사는 것이 과연 훌륭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스토너가 일상과 환경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면 부적응자가 되었으리라.

왜 21세기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스토너를 읽는가? 감정 노동에 지치고 상처받아 차라리 스토너의 삶을 부러워해서일까? 내게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그의 삶을 선택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상황에 저항하지 않고 잘 순응하며 책과 가르침에서 위안을 얻고 거기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 그의 삶이 약간 탐나는 것은 사실이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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