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팬으로서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mixed review를 받은 것과 달리 역시나 나의 집중력 부족으로 작가의 의도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 역시나 일과 독서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분량이 적다고 이해가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간 조금씩 읽는 것은 허영이며 사치이고 책을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다는걸 다시 느낀다. 나의 지적 허영이 피로 쓴 작가의 귀한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하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책을 가까이 함이 오히려 독서의 본질을 해치는 것일까?

작가가 의도했던 깊은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했으나, 제목 자체에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 있다고 추측했다. 언어 천재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언어의 연금술사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의 축제(The Festival of Insignificance)라는 것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며 열심을 다해 살아내는 일들이 결국엔 무의미하며, 무의미한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즐겁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감을 의미하고 있을까?

무의미가 존재의 본질이고, 우리는 무의미를 사랑해야 하고, 무의미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한다(Insignificance is the essence of existence. We must love insignificance, we must learn to love it. p. 113) 무의미를 인정할뿐만 아니라 사랑해야함은 삶 자체가 무의미의 연속이고 축제이기 때문인가? 지난 날 내가 엄청난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며 안달하고, 흥분하고, 잠못 이루던 일을 생각해 보면 위의 말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몇 달이 지나고, 몇 년만 흘러서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기억이 흐려진다.

심지어 무의미의 가치(value of insignificance), 총명함의 쓸모없음(uselessness of brilliance)에 대한 표현도 공감이 된다. 총명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여자 또한 남자만큼 총명해야 된다는 의무와 부담감이 생기기에 총명함은 쓸모도 없고 해롭기까지 하다. 오히려 무의미함은 여자를 자유롭게 하고 경계심으로부터 해방감을 준다. 사실 여자들은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남자를 원하지만, 만약 실제로 그런 이성을 만난다면 실수할까봐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에 항상 긴장되고 불편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Alain의 사과에 대한 표현도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은 그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그에게 사과해야 하는데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하고 자신은 늘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며, 엄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서로 사과할 때 기분이 좋고, 서로 사과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냐고 묻고 있다. 이것은 엄마의 사과를 받기 위한 그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그는 매 순간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결국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 자가 승자이기에 먼저 사과함으로써 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사과하는 자라고 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미움과 분노를 벗기 위한 수단, 즉, 마음의 평화를 위한 용서의 수단일 수도 있다.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사과를 먼저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낮은 자세이나 승자의 위치에서 하는 사과일 수도 있다. 어떤 의도이든 사과는 아름답다 생각한다. 심지어 후자라 할지라도 쌍방의 사과가 허락되고 서로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면 아름다운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설령 그렇지 못해도, 사과의 시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과하는 척, 시늉‘ 조차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과하지 않아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무섭기도 하다. 몸이 매우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상식이 통용되고 있는지 가끔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고 기본인 세상이 되면 좋겠다. I am an apologizer. That’s the way you made me. I feel good when we apologize to each other. Isn’t it lovely, apologizing to each other? (p. 103)

이 세상을 전복시키고 새롭게 바꾸거나 정면으로 위험에 맞서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다. 세상을 향한 유일한 저항이 있다면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 것. 이 부분에서 작가의 체념이 보이기도 한다.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세상에 대한 힘겨운 싸움을 해 온 지식인이 결국 농담 속에서 안주하며 모든 싸움이 무의미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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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에 감동을 더하고 밤을 지새며 읽었던 톨스토이의 두 작품,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8)‘와는 결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1)’ 와도 다른 색깔의 작품으로써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이 책은 1886년에 발표된 책으로 톨스토이의 신앙적 고뇌가 담겨진 책이라 들었다. 정통 러시아 정교회와 국가 권력의 결합, 형식적 교리와 의식에 회의를 느끼던 그가 기독교에서 새로운 내적 질서를 찾아가는 과도기적 시점의 작품이라 들었다.

톨스토이의 깊은 고뇌가 어쩌면 바로 모든 인간의 원초적 궁금증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반의 죽음은 살아 생전보다 더 근엄하고, 살아 있는 자들에게 보내는 꾸짖음과 경고처럼 보인다고 첫장을 시작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세지는 무엇일까?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 , ‘죽음의 불가피성을 기억하며 유의미한 삶을 살아라’ 등등의 사인일까? 죽음이란 단어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 자 누구인가?

살아 있는 자들의 슬픔과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인지, 살아 남은 자를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으나, 이미 죽은 자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마치 내게는 부자연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평소에 행동을 한다. 알지만 일시적으로 애써 부인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자기 부정이 아닐까? 죽음은 터부시해야할 주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로 늘 기억하며, 하루를 헛되이 살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나침반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반의 삶의 목표는 쉽고, 유쾌하고, 품위있게 사는 것이었다. 가족에게 조차 품격있는 거리(dignified aloofness)를 유지하며 자신의 편안함과 취미를 침해 당하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불편하고 지저분하며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그와는 무관한 삶이었고, 그 주변에는 그와 비슷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 뿐이었다. 삶의 흐름과 질서가 늘 있어야 할 곳에, 가장 어울리는 세련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과연 겉으로 보이는 풍요와 안정된 삶이 그의 행복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온 질병이 심해지면서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해야하는 그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외로움이었다. 아내와 1남1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평온한 삶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철저한 외로움을 느끼며 그의 삶 전체가 거짓과 사기였음을 알게 된다. 오직 한 가지, 그가 죽는다는 것만이 진실일 뿐 무기력, 외로움, 인간과 신의 잔인함, 신의 부재를 느끼며 아이처럼 울고 있는 이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성공가도를 따라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온 그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고, 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그가 평생을 잘못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하게 된다. (What if my whole life had been wrong?)또한, 어쩌면 해야할 것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깨닫게 된다.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가슴과 옆구리를 맞게 되고 숨쉬기 조차 힘들어진 그가 구멍으로 떨어져 바닥에서 빛(light)을 보게 된다. 그 때 그는 실제로는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무엇이 옳은 일인가? (What is the right thing?)를 생각한다.

결국, 그는 그 빛을 잡고, 비록 그동안 틀린 방향에서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 왔으나, 잘못 살아온 삶도 여전히 수정되고 교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구멍의 바닥에 있던 그가, What is the right thing? 이라는 질문을 하고 나니, 누군가가 그의 손에 키스를 했고, 눈을 떠 보니 아들이 그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동정심과 연민을 얻은 두 사람은 하인(Gerasim)과 아들뿐이었다. 친구와 가족이라는 이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돌아보게 된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무서운 상황보다, 혼자라는 처절한 외로움과 나약함으로 절규하며 건강하지만 냉소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향해 비난과 원망을 쏟아내던 그가, 이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 놓고, 죽음의 자리에 빛이 있음을 알게 되며(In pace of death there was light.)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 건강하고 부유하여 모든 것이 평온할 때, 이반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하여 옳은 방향인지 점검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앞으로가 아닌 뒤로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반 같은 속물에게도 빛(light)은 여전히 기회를 주고 있다. 그의 삶이 바뀔 수 있고 교정될 수 있다고 하고 있다.(though his life had not been what it should have been, this could still be rectified.) 이 얼마나 희망적인 메세지인가? 그래서 이반은 죽음 자체가 영원한 끝이 아니며, 죽음의 자리에 빛(light)이 있음을 알게 되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생각한다.

비판적,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톨스토이가 완전히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할지라도, 빛(light), 아들(son), 교정되는(rectified)이라는 실마리에서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내 나름의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죽음을 앞두고 빛을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고,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으리라. 나처럼 뒤늦게 잘못 살아왔음을 알고 가슴을 칠때,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 교정, 구원의 기회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 삶의 목표, 의미, 방향성을 늘 점검하고, 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 몸을 더 움직이고, 나 자신만의 유익과 편의만를 도모하는 삶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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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은 카톨릭 신부님이자 하버드 대학 교수님이셨다. 그런 그가 서커스단에 매료되어 몇년간 생활을 같이 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신부님과 교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 그의 명성에 큰 타격이 있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한 그의 용기와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뜨거운 가슴이 시키는 일에 도전하여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 아울러 서커스 단원들과 함께 했던 시간으로부터 영성을 끌어 낼 수 있었던 그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나이든 노교수가 서커스 공연 맨 앞자리에 앉아 어린아이와 같은 황홀한 얼굴로 박수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족쇄가 있다면 ‘나이’라는 단어이다. 마치 그 누가 몇 세에는 무엇을 하고 몇 세에는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해둔 것 처럼 나이값이란 단어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내가 여자라서 더 나이에 민감한 것일까? 평생을 정신적인 고뇌와 영적인 싸움에 시간을 쓰신 신부님이 몸으로 표현하는 서커스단에 매료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ody-centered spirituality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서커스와 영성은 서로 닮아 있었다. 서커스 공연은 매일 위험을 감수하고 실패를 극복하며 한계에 도전해야 한다. 서커스 단원들은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영적 허기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flying을 잘 해도, 잡아주는 catcher가 없다면 그 공연은 실패로 끝이 난다. Flyer의 노력이 아니라 catcher가 잡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공연의 완성이 전적으로 catcher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lying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이 단어 속에서 자유를 보았다. 구속에서 자유롭게 어딘가로 마음껏 날 수 있는 자유함이 그립고 그립다. 현재 나의 하루 하루가 얼마나 버겁고 큰 구속에 단단히 묶여 있는가? 난 이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 싶다. 그러나, 비행을 시도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자유롭게 마음껏 날아 오를 때 누군가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잡아주는 catcher가 있다는 것과 떨어져도 safety net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날 수가 있다.

나는 이제 확실히 나의 catcher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동안에도 여러번 떨어졌고 우아하기는 커녕 엄청 추한 모습으로 떨어진 적이 있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또다른 추락이 있을 수 있다. 이제는 예전과 다른 나의 safety net을 생각하며 용감하게 도전할 수 있을까? Henri Nouwen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쉼없이 도전하는걸 좋아한다. 이제 나도 직업에서 소명으로,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의식으로, 쾌락에서 영성으로 삶에 도전이 가능할지 생각해 본다.

놀라운 문장이 있었다. God does not want to be feared. God wants to be loved. God wants to be as close to us as we are to ourselves.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 했기에 경외감이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사랑과 친밀함을 원하실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도 마치 서커스 공연을 하듯이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catcher에 대한 믿음이 없이 날 수 없고, 떨어져도 safety net가 있다는걸 믿어야 도전할 수 있다.

나의 catcher이자 safety net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멀리 있지도 않다. 늘 나와 함께 동행하며 나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고, flying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신다. 가끔은 falling도 계획하시어 나의 교만을 고개 숙이게 하시고, 겸손이 글로벌 코드임을 알게 하신다. 나에게 falling이 없었다면 나는 고개 숙이는 법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사랑할만한 구석하나 없는 내가 무조건적으로 사랑받았음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조건없이 사랑하고 돌려받지 못함에 서운한 마음을 품지 않고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기도하고, 신앙 서적을 읽으며 감동하고 회개해도 하루에도 몇번씩 넘어지고 실패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safety net으로 떨어졌기에 매번 다시 일어나 사랑하기를 연습한다. 덜 받음에 서운한 감정은 조금씩 희석되는 것 같으나, 또 넘어질 가능성은 여전하다. 그래도 catcher가 있는걸 알기에 사랑과 도전을 계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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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단어 중의 하나이며 내가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 ‘waiting’이었다. 속도와 효율성을 큰 자산으로 하는 시대에 기다림이 낭비가 아닐 수 있다는 반전에 이 책을 선택했다. 고정관념을 깨는 정도의 신선함은 있어야 집중할 것 같았다. 나는 왜 그리 ’기다림‘을 싫어하는가? 이 단어는 개인적인 아픔과 관련이 있다. 오래 오래 기다렸는데 응답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한 응답을 오래 오래 기다렸고, 언젠가 응답이 있느리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 자신감이 교만과 오만이라는걸 알고, 결국 난 지쳤고 자포자기 하다가 무기력에 빠지곤 했다. 기다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anger, anxiety, and apathy의 반응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내가 바로 그럴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왜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가? 상황이나 환경을 통제하고 제어할 능력이 없음에도 나 스스로가 바꾸어가지 못함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에 화가 났던 것이었다. 결국, 궁극적인 통제권과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 나의 뜻과 계획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계실 수도 있는데, 헤아리지 못하는 나의 소견은 늘 불안했던 것이었다.

기다림은 왠지 ’느림‘과 관련이 많은 것 같다. 인내심있게 잘 기다리려면 시간을 갖고 여유있게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 그럼, 게으른 성격이 무던하게 잘 기다릴 수 있을듯하다. 실제로, 난 천성적으로 느린 나무늘보 같은 성격인데, 이것이 삶속에서 드러나 나의 치부가 될까봐 매우 이른 시간부터 활동하기 시작해서 지인들은 내가 아침형 인간이라 생각한다. 의도치않게 일중독으로 살아서 멀티태스킹이 일상이 되었고 말도 빨리 하다 보니 습관이 행동이 되어 나에게서 ‘느림’이란 단어가 빠지게 되었다.

결국, 나는 느림을 늘 동경하면서 추구하지 못했고, 무능력과 동의어로 치부하며 경시하며 살았다. 빠름이 자산이 되고 힘과 능력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다 보니, 기다림을 통해 나타나는 느림을 견디지 못했다.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기제에서 생기는 ‘quiet quitting’은 기다림과 희망이 포기된 상태를 말한다. 최소한의 일을 하고, 포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은 하는데, 동기부여되지 않은 무기력한 상태이다.

기다림이 낭비가 아님을 인정하며 느림까지 수용하고 인정하려면 기다림은 어렵고, 보편적이며, 성경적이고, 느리며, 명령이고, 관계지향적임을(hard, common, biblical, slow, commanded, relational)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한나, 예수님 등등 모두 오랜 기다림의 여정을 통과했다. 이 시간 많은 사람들과 교회가 각자의 다른 기도 제목을 놓고 긴 기다림의 여정을 통과하고 있으리라. 희망을 안고 기다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기다림에 대한 FAST(Focus, Adore, Seek, Trust)의 처방이 마음에 든다. 삶에 우선순위, 방향을 먼저 설정하고 집중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주를 사모하고 예배하며, 간구하면서 끝까지 믿으며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상황과 환경을 통제하려는 의지와 고집을 내려 놓고 전적 의존과 확신에 찬 기대감(absolute dependence and confident expectation)을 갖고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과정은 낭비가 아니며, 영적 성숙과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보여주는 척도임을 기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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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ezzo (Paperback) - 『Normal People』저자 샐리 루니의 신작
샐리 루니 / Farrar, Straus and Giroux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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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l People에 심취해서 읽어서 큰 기대감을 안고 읽었는데, 그만큼의 재미는 아니었고 과정에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다. 완성 문장이 아니라 주어, 목적어도 생략하고 명사구로 이루어진 문장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특이한 문체가 처음엔 어색했으나,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자극적인 줄거리에 길들여진 탓일까 아님 클라이막스나 반전이 없이 같은 내용이 계속 전개되어 그런지 다소 단조로운 느낌이었다.

놀라운 스토리 전개, 감동적인 영어 문장이나 문체는 적었으나, 연애나 사랑의 개념에 대해 도전거리를 던져주는 내용이다. 제목 Intermezzo는 두 공연 사이에 연주되는 간주곡이란 뜻이다. 마치 이 책이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사이에서 고민하는 신세대들의 사랑 방식을 이야기한다고 해야할까? 현재는 한 사람과의 연애와 사랑이 당연하고 정상적이며 사회에서 용인되는 방식이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색안경을 쓰고 보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어쩌면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지난 번 읽었던 A Little Life에서도 Jude와 Willem의 사랑이 다르지만 조금 비슷했다. Willem은 지적, 정서적 사랑은 Jude에게서, 성적인 만족은 다른 여자에게서 찾았고, Jude도 이걸 용인했다. 이 책에서 Peter 역시 Sylvia와의 사랑 과정에서 Sylvia가 교통 사고로 성적 관계가 불가능해지자 다른 여자 Naomi와의 만남을 동시에 이어갔고, 두 여자 역시 Peter의 이런 사랑 방식을 다 받아들인다. Peter는 지적, 정서적 교감은 교수인 Sylvia와 성적 관계는 Naomi와 나누는 느낌이다.

현재는 이런 사랑 방식이 용인되지 않음에 고통을 느껴서인지, 동생 Ivan이 14살이나 많은 Margaret과의 사랑을 이야기하자 상당한 불쾌감을 보인다. 정작 Peter 본인은 10살 어린 Naomi를 일 년 이상 만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역시 아일랜드 문화에서도 나이가 문제가 되고 중요하다는걸 보여준다. 이 책은 2024년 신작이지만 여전히 현대에서도 남자는 되고 여자에게 연하는 논란이 많이 된다는걸 보여주기도 한다. Peter는 변호사이며 경제적 여유가 있어 더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Peter만 Ivan의 만남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Margaret의 부모 역시 연하와의 만남에 우려를 나타냈고, 친구들에게도 연애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큰 상실감을 느꼈던 Ivan은 Margaret과의 큰 나이 차이에도 그녀의 따뜻한 공감 능력과 이해심으로 인해 전례 없는 삶의 이유를 찾게 된다. 형 Peter에게 늘 부족하고 비정상적이라 무시 당했던 그가 사랑의 힘으로 인해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의 생각의 변화를 보며 새삼 느낀다. 한편, Peter가 두 여자 사이에서 죄책감을 느끼고, 어떤 것이 정상적인 삶인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두 여자를 모두 만나는걸 보며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에, Peter는 그의 관계가 정상적이거나 관례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고, 고민을 해 보았으나 해결책을 못찾고 현 상태를 이어가며 아무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고 한다.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랑이 항상 매끄러운 것은 아니고 삐걱거릴 수 있으나 최선을 다할 것이고 어찌되었든 삶은 계속된다는 말로 책은 끝이 났다. Ivan은 나이 차이로 결국 Margaret과 헤어질 수도 있고, Peter도 두 여자를 모두 사랑한다고 하지만, Naomi가 떠나갈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끝까지 영원히 사랑을 이어갈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면서 사랑 방식만은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한 사람에 의해 사랑받음이 아름답고 고상한 것이라 말하는 전통에 도전하는 소설이 많이 나오고 있고, 실제 삶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현재 읽은 이런 사랑 방식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닌 그런 시대가 올까? 이런 소설을 시도한 작가는 이전 책 Normal People에서 처럼 이 책에서도 normal, conventional이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며 과연 무엇이 정상인지 독자에게 묻고 있다. 이제 어떤 것인 정상적인 사랑법인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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