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ale of Two Cities (Paperback) A Tale of Two Cities 11
찰스 디킨스 지음, Maxwell, Richard 엮음 / Penguin Classics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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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학수고대했던 이유는 2권의 책을 끝내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휴 시작 직전에 책의 Introduction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위대한 Charles Dickens가 아닌가? 그간 읽었던 그의 모든 책은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page turner였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게 하는 그의 작품은, 밤을 지새며 읽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명불허전이었다. 사실 약간 걱정이 되었던 것은, 누군가의 리뷰에서 A Tale of Two Cities를 읽으면 실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 지금까지 미뤄두었다는 점이다. 눈물 범벅으로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글 독자들의 리뷰를 다시 보니 그 우려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영어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1859년도에 출판된 고전으로, 수사학적 기교가 넘쳐나는 만연체 문장이 많았다. 대화체를 제외하면, 배경과 상황 묘사는 탁월한 은유와 직유를 사용해 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Mr Cruncher의 비문법적 문장은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 은유와 비교가 넘치는 함축적 긴 문장을 제대로 번역하는 일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한글 독자 리뷰가 번역의 한계를 지적했다. 작가 본연의 의도를 살리면서 문학적으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부분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위대한 작가의 탁월한 문체에 감탄하고, 부족한 나의 지식의 한계를 느끼며, 연애 소설에 포장된 역사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으며 읽었다. 처음 진입 장벽은 높았지만, 중간에 포기했더라면 장엄하고 숭고한 뒷부분의 감동을 놓치는 큰 실수를 했을 것이다.

거의 마지막 직전까지 Charles Darnay와 Lucie Manette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18년 동안 억울하게 바스티유 감옥에 있었던 아버지(내과 의사)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Lucie는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여성이다. 프랑스 귀족이었던 신분을 스스로 버리고 영국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는 Charles는 도덕과 양심의 대명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다. 평온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던 중, 부하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듣고 목숨을 걸고 프랑스에 들어가 1년 이상 갇혀 있었던 정의의 사도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고, 다른 누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대미를 장식한 인물은 Sydney Carton이었다. 자기 파괴적 삶을 살며 자존감도 낮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그가 Lucie Manette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Lucie는 Carton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를 건네며,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고, 평생 이 고백을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녀의 선량함과 따뜻함이 만들어낸, 엄청난 영향력의 순간이다. 이로 인해 Sydney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자신을 희생하리라고 다짐한다. 이 부분이 Chapter 13이다. 그리고 한동안 잊혀진 Sydney는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나, 감옥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던 Charles 대신 옷을 바꿔 입고, Charles를 내보낸 뒤 자신이 대신 죽음을 맞이한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생소하지 않지만, 막상 책으로 읽으니 엄청난 감동이 밀려왔다. 마지막 장은 그 어떤 책보다 감동적이었다. Sydney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뿐 아니라, 옆에서 같이 죽어야 했던 소녀의 손을 잡아 위안이 되어 주었다. 죽는 순간까지 편안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Sydney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을 발산했다. 그의 마지막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It is a far, far better thing that I do, than I have ever done. 그가 죽음으로 누군가를 살린 행위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온 모든 행위보다 의미 있고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가? 현실에서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Lucie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그는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 평온하게 삶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남편, 아이, 아버지 모두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사랑이 이렇게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을까? 나 역시 어디서든 주인공으로 살고, 센터에서 조명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러나 Sydney는 처음에는 비중이 적고,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조연 정도라 생각했지만, 결국 내 눈물을 쏟게 하고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인공의 목숨을 살린 조연이 아니라, 혁명의 의미, 사랑의 가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Sydney가 암기했던 성경 구절은 마지막 부분에 세 번 정도 반복된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John 11:25) 결국 진정한 부활은 혁명을 통해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작가가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와 복수를 부르는 프랑스 대혁명의 민낯이 연애 소설의 포장 속에 담겨 있었다. 평민 여자들이 차라리 불임이 되어 비참한 평민들이 죽기를 기도한다는 평민 청년의 말은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귀족들의 고귀한 잠을 위해 평민은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밤을 지새워야 했다. 배고픔, 헐벗음, 가난, 고통, 목마름 외에 가진 것이 없었던 그림자 같은 삶을 살던 평민들에게 혁명만이 살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프랑스 대혁명(1789)의 실체는 The Reign of Terror(공포 정치: 1792~1793)로 이어져, 많은 사람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52명이 처형되기로 예정된 단두대가 놓인 장소는 마치 대중의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공원(a garden of public diversion)처럼 묘사되었고, 여성들은 바쁘게 뜨개질하며 현재 몇 명이 죽었는지 숫자를 세고 있다. Sydney의 손을 잡고 억울하게 죽었던 소녀는, 공화국이 정말로 평민에게 선한 행위를 한다면 배고픔과 고통이 줄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혁명이 아니고서는 바꿀 수 없는 뿌리 깊은 체제와 관습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야 하는가? 악을 악으로 이길 수 없음을 프랑스 대혁명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악을 선으로 이길 능력조차 없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귀족들의 횡포, 평민들의 불행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대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을 표방한 공포 정치 또한 무섭고 섬뜩하다. 이어지는 우울함 이면에는 Sydney의 희생이 주는 감동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사람의 따뜻함과 진정성으로 변모된 삶, 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삶, 사랑받지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삶. 그는 이런 행위가 평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다고 고백했다. 숭고함을 넘어 장엄하다. 다시 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만난다.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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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ering Your Private World (Paperback)
고든 맥도날드 / Thomas Nelson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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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everything you do flows from it. (Proverbs 4:23)

사적 세계, 내적 정원, 영적인 세계의 질서를 잘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려주는 책이다. 제목이 주는 일시적 통찰력을 넘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현대인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와 평안일지도 모른다. 아주 작은 근심이나 걱정도 잔잔한 일상을 얼마나 심하게 흔들 수 있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그간 내가 책에 매달린 것도 마음의 평정을 위함인지도 모른다. 나는 인문학 서적, 궁극적으로는 철학 서적에서 내 평정심을 찾을 수 있고 내 마음을 훈련시킬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으나 그것이 임시방편임을 알게 되었다. 책이 주는 위안은 세상 문제의 큰 무게를 감당할 만큼의 파급력은 없었다.

작가만큼이나 나 역시 driven, 혹은 driveness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좋은 취지로 말하면 내적 강박증이 있어 추진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는 성공 지향성이 있으며 가시적 결과에 집착하여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단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오늘날 이 사회를 끌어가는 리더들의 성격도 이 단어와 맞물려 있다. 이 단어와 어울리는 성경 속 인물로 Saul을 예로 들고 있다. 외모마저 출중한 인물로 많은 것을 가졌으나, 다윗에게 강한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끼며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해 결국 파국을 맞이한 인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듯이 driven의 성격을 지닌 인물이 자기 마음을 잘 지켰더라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Saul과 대비되는 인물로 죄인 중의 괴수가 자칭했던 Paul과 John the Baptizer가 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엄청난 대중의 인기몰이를 하며 인기의 절정에 있던 세례 요한은 물러날 때를 알고 세상의 명예에 집착하지 않으며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2)라는 말로 예수님을 높인 인물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기에 세례 요한의 인품이 보석처럼 빛난다고 생각한다. 겸손히 나를 낮추며 누군가의 축복을 빌어주면서 마음의 평안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보다 훌륭한 그릇이 있을까 싶다. 나의 때를 알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현명함을 배우고 싶다.

베다니 마을의 두 자매 마리아(Mary)와 마르다(Martha)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맞이한다. 언니인 마르다(Martha)는 예수님을 위해 음식 준비에 바빴던 driven 성격의 인물이고, Mary는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 듣기에 바빴다. 그런데 이 책에서 Just give Mary a little chance as well as Martha. (P. 83)라는 표현이 있었다. 주도적인 인물은 늘 앞장서서 일을 추진하기에 속도가 다소 느린 사람이나 뒤늦게 합류하는 사람들을 덜 배려할 수가 있다. 내가 예전에 Mary 같은 친구나 동료에게 기회를 주며 함께 가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driveness의 반대 개념으로 calledness가 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뜻에 앞서, 내가 먼저 일을 생각하고 계획하며 추진하려 했음을 회개한다.

추진력과 주도성이 무조건 단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추진력은 내적 공허함과 불가피하게 만나게 되어 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느 날 벽돌에 부딪치듯 큰 공백을 느끼며 감정적 대홍수(emotional deluge)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적 성장의 방법으로 listening, reading, purposeful study를 추천하고 있고 나는 이 방법에 격하게 공감한다. 잔인할 만큼 정직하게 들려오는 쓴소리와 비판의 소리까지 겸허하게 받을 때 성장할 수 있다. 작가는 연필로 감동적인 문구를 표시하거나 메모하면서 독서를 한다고 했다.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방어적 공부(defensive study)가 아니라, 순수한 배움의 즐거움을 향유하며 자발적인 동기에서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참여하는 offensive study(공격적 공부)를 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신앙인으로서 영적 훈련을 위해 추천하는 5가지는 침묵과 고독, 찬양, 듣기, 묵상과 중보 기도이다. (silence and solitude, singing, listening to God, reflection and meditation, prayer as worship and intercession) 작가가 실천하는 journaling을 나도 했었는데, 현재는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아쉽다. 글쓰기에 관심과 욕심이 많은 내가 오랜 기간 일지를 써 왔는데, 손으로 쓰는 것이 힘들어 아이패드로 실천하려다 지금은 못하고 있다. 특히나 일지를 통해 기도를 쓰고 싶었다. (writing prayers)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기도를 쓰는 내용이 나와서 한동안 실천하다가 지금은 멈추었는데, 다시 시작해 볼까 고민 중이다.

기도는 나의 나약함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인정함으로써 엄청난 해방감을 얻을 수 있고 내가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내가 빈손일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낄 수가 있다고 했다. (God gives where He finds empty heart. P.148) 또한, 중보 기도는 기독교인이 가지는 특권이기에 마음껏 누리고 싶다. 작가는 중보 기도의 범위를 확장하여 세계 복음화를 위해 요일별로 기도 지역을 달리함에 감동 받았다. 정말 큰 그릇은 자신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다운 쉼(Sabbath)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내면의 질서를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됨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 작가가 청년의 때에 200개 이상의 성경 구절을 대문자, 쉼표, 마침표까지 정확하게 암송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암송했던 시편 구절이 74세가 되어 종양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절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 필사를 하는 기독교인이 많은 것을 안다. 나 역시 성서대학에서 2년 공부할 때 성경 구절 암송 시험이 있어서 출퇴근 길이나 주말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암송했던 때가 있다. 이런 성경 구절이 자양분이 되어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저절로 연상이 된다. 그때는 조사까지 이렇게 암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생각했지만, 정확히 암기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쓰고 암기하기를 반복해야 하고, 반복하지 않으면 오래 남지 않기에 정확하게 암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가시적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보다 타인은 나에게 관심이 없을 수 있다. 내면의 성장과 질서 없이 나는 항상 외로움, 고독, 공허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이 기간이 오래되면 결국 감정적 대홍수를 넘어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느낄 수도 있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해 가시적 결과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작가의 추천 방식을 모두 실천하기는 어려우나, 조금씩 시도하며 내 마음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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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20대에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이성주의를 신봉하는 무신론자이며 급진적 개혁가로 활동하다가 시베리아에 정치범으로 4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책은 신약(The New Testament)이었고, 신약을 읽음으로써 교만했던 지식인이 심오한 크리스천 사상가로 변화되었다.

이 책의 스토리는 허구이지만, 주인공 Raskolnikov는 젊은 시절의 도스토예브스키이며, 주인공의 심리적, 도덕적, 사회적 요소는 작가의 삶 및 경험과 닮아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자서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양대 산맥으로 러시아가 자랑하는 위대한 소설가의 고전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었다.

주인공은 19세기 St. Petersburg에 만연했던 가난, 범죄, 사회적 부패를 척결한 자격이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 믿었다. 사람을 ordinary vs. extraordinary로 나눈다면 그는 대의명분을 위해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죽일 자격이 되는 특별한 지식인인 것이다. 나폴레옹의 사고에 큰 영향을 받은 그는 대학교 때 기고했던 ‘특별한 사람’ 이론을 시험이나 하듯이 2명을 도끼로 살인하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물질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돈에는 손도 대지 않고 땅 속에 돈과 귀중품을 묻어 두고, 버젓히 길거리를 다니며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나이든 여자를 죽인 것이 아니고, 자신을 죽인 것이며, 사람이 아니라 이론을 죽였다는 표현도 있다. 20년간 그를 괴롭힌 가난과 외로움, 사회 부패를 척결하고 싶었으나 결국 신의 섭리를 위반하며 자신을 도덕적으로 죽였다는 뜻일까?

인간은 평생 ‘선과 악’의 양극단에서 싸울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던가? 대의 명분을 위해 2명을 죽였다고 생각했으나 죄책감, 편집증, 정신 분열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동생 Dunya, 친구 Razumikhin의 변함없는 사랑과 일관된 정서적 지지로 그는 외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Sonya의 헌신적 사랑으로 인해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의 살인을 처음 고백했던 사람도 Sonya이다. 그녀는 인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기독교적 사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Sonya가 그에게 읽어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었던 나사로처럼 그는 결국 Sonya의 사랑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Sonya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상징하는가? 결국 하나님은 죄책감 없이 2명을 살인한 인간도 사랑하시어 Sonya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다.

죄과 악은 결국 선과 사랑으로, 인간의 죄악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밖에 구원할 길이 없다는걸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세상에 난무하는 부정과 부패, 타락을 인간이 심판주가 되어 악을 척결하려는 교만은 더 큰 죄악을 낳을 수 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위대한지, 결국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책의 분량이 너무 많고 하루의 피곤함은 눈꺼풀을 무겁게 하였으나, 이 책만큼 결론이 궁금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결론을 오해하고 있었던 탓에, 마지막 장을 읽을 때 부정이 아니어서 너무 행복했다. 희망적인 결론도 너무 너무 감사하다. 문학적 장치나 문체보다 스토리 중심으로 장기간 읽으면서 지루하지 않았고, 작가가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도출할지 가장 궁금했던 책이다.

어쩌면 내가 기다린 것은, 죄인이었던 주인공이 용서와 구원을 받은 것처럼, 나 같은 죄인도 사랑받고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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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ason for God: Belief in an Age of Skepticism (Paperback) -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원서
Timothy Keller / Riverhead Books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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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진정한 즐거움은 리뷰 작성에 의해서 완성이 된다. 리뷰를 만족스럽게 쓰고 나면, 읽는 것 이상의 기쁨이 내 가슴속에 차오르고,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끝낸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것은 쉽고 편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리뷰 쓰는 일은 가장 피하고 싶고 부담이 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읽는 동안 행복했고, 많은 감동을 받은 책에 대해 리뷰를 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매 순간, 나의 부족과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불신자와 신앙이 있는 자 둘 다를 위해 쓰인 책이다. 전반부는 무신론자 및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고, 후반부는 신의 존재, 죄, 십자가, 부활 등에 대하여 역시 맹목적인 종교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논거에 근거한 의견을 제공한다. 그 누구도 성공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20, 30대 싱글이 주를 이루는 맨해튼의 교회 목사로서 성공한 탓인지 조금 더 개방적일 것이라 추측했으나, 믿음에서만은 회색지대가 없으신 듯 보인다.

그럼에도 무신론자나 회의론자들을 향한 그의 마음은 다른 분에 비해서 더 열려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불신자들은 오히려 우리의 기도와 따뜻한 마음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며, 회의론자와 신앙인들조차도 개인적인 반대나 맹목적 신앙과 항상 치열한 싸움을 할 수 있고, 의심을 의심해야 한다는 말씀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You must doubt your doubts.) 나 역시 교회를 다니면서도 회의적인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나의 회의적 사고가 너무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나의 회의적 사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싸워 나갈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완고한 회의론자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 자신의 인지력(cognitive faculty) 안에 엄청난 믿음(faith)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수 있어도, 회의론자들조차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의심은 실상 대안적 믿음이라 불릴 수 있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기독교는 배타적이며 구속력을 가진다기보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종교이다. 물고기는 단지 물에서만 살도록 제한될 때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듯이, 자유란 자신에게 가장 옳고 적합한 것을 찾게 하는, 자유함을 주는 구속력(liberating restrictions)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속이나 제한은 진정한 자유를 위한 적극적인 수단이 되며, 절제와 제한은 그렇지 않으면 안에 갇혀서 발휘하지 못할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게 한다. 기독교가 지니는 아름다운 구속력에 대한 설명은 매우 인상적이고 설득력이 강했다.

신앙인들의 이중성, 교회의 역기능에 대한 반박도 일리가 있다. 교회는 성자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미성숙하고 상처받은 죄인들이 모인 병원과 같은 장소(The church is a hospital for sinners, not a museum for saints.)라는 데 공감한다. 마음 아픈 사람들이 갔다가 상처받고 떠나는 장소가 교회이기도 하다. 세상에 의인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을 기억하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면 사람으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기에 신중하게 교회를 고르라고 충고한다.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며, 그들은 부족하기에 교회를 찾아온 나약한 사람들이며, 정서적·도덕적·영적으로 성숙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상처는 큰 기대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인식이 있고, 사랑을 베푸는 장소여야 한다는 큰 기대감 때문에 사랑으로 덮지 못하고, 사랑으로 용서하지 못할 때 기독교를 향해, 신앙인을 향해 돌을 던지며 비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지니는 큰 책무감이 있다. 실상은 기독교가 보여준 순기능과 사회에 끼친 선한 영향력도 많다. 시민권 운동에 앞장섰던 Martin Luther King Jr.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당겼을 것이다. ‘Let justice roll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as a mighty stream. Amos 5:24’. 결국 기독교가 인종차별의 해독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사랑·공의·정의의 하나님이신 것은 받아들이지만, 심판과 노여움의 하나님이심은 용납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곧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사랑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심판과 노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분노는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에게 과연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인간적인 생각, 가치관, 판단으로 정죄하거나 비난하고 심판하려는 것도 위험하고, 오히려 하나님만이 심판주가 되어야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저마다의 원한과 분노를 자신의 능력으로 풀고 타인에게 갚으려고 할 때 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며, 신의 분노가 없다면 악인의 권력은 무서움과 절제력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의 특정 구절에 대한 지협적 해석으로 성경 전체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설명도 있다. 나 역시 과거에 성경을 제대로 한 번도 읽지 않은 채 오해했던 적이 있었다. 성경이 2000년 전에 쓰여진 이야기이고, 문화적·역사적 거리가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특정 부분만 떼어내어 퇴행적·보수적이라 속단하는 사례가 많다. 어떤 이단들은 요한계시록이나 선지서 부분만을 오해하여 심판의 하나님만으로 오역하며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progressive’라는 기준으로 성경을 ‘regressive’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몇십 년만 지나면 현재의 progressive는 또다시 regressive가 된다. 진보 혹은 퇴행이라는 단어의 기준으로 재단하며 성경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면 핵심 원리를 파악할 수 없다.

과연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계몽주의 이래로 우리는 이성과 논리의 원리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신의 존재가 시험대에 올라야 하고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이타심과 도덕적 의무감은 과연 이성과 합리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은 아니다. 마치 우리가 태양이 떠 있다는 것을, 태양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즉 우리는 태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이고,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다. 늘 찬란하게 우리 곁에 빛나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 강해서 태양을 바라볼 수가 없다. 그러나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어쩌면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현실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갈망하는 것에 대한 부재를 느낀다. 이는 ‘축복받는 갈망(blessed longing)’이라고 했다. 즉, 현실의 욕구를 모두 채워도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인간은 원하고 있고, 그 공간은 오직 신만이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이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를 억누르고 있을 뿐이며, 만약 신이 없다면 사랑, 이타심, 도덕적 책임감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만약 진화론적 사고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입증될 수 있다면, 인간은 왜 마음속에 선한 삶에 대한 욕구와 갈망이 있으며, 물질적 만족이 있음에도 빈 공허감을 느끼는 것일까?

Victor Hugo의 Les Misérables의 예시는 매우 감동적이다. 신부의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용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공격이 되어 뿌리 깊은 자기 연민과 고통을 벗고 주인공 인생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은혜와 감사의 역학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은혜는 인간은 자율성을 지닌 존재라는 허상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즉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는 달라질 수 없었으나, 신부가 베풀어준 무조건적 은혜로 인해 한 사람의 생애가 달라졌다. 이렇게 부족한 인간은 자신의 행위나 공적 때문에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salvation by sheer grace). 만약 은혜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약하고 힘없으며 나약한 자는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 것인가?

믿는다는 것은 현재의 나와 바라보는 것,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새벽 기도에 참석하고, QT를 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죽은 믿음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알고, 예배하고, 기뻐하며, 그를 닮아가려 노력하는 삶을 살라고 한다. 전심으로 사랑하면 닮아가고, 닮은 꼴이 되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신앙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평생의 과제를, 삶의 목적과 의미를, 행복의 원천을 뒤늦게 알았지만, 지금도 빠른 시간이라 위로하며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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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s Search for Meaning (International Edition) (Paperback) - 『죽음의 수용소에서』원서
Viktor E. Frankl / Beacon Press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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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지만, 동시에 ‘항상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편집증도 있어서,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두 번째로 읽게 되었고,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감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며 집중했고,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보석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책이 주는 선물은 읽는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목적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의지심장한 힘을 품고 있는지 다시 실감했다.

‘의미’와 ‘목적’은 평생 나를 따라다닌 화두였다. 삶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며 마음속 깊은 곳에 실존적 공허를 안고 살아왔다. 허무감과의 싸움은 늘 치열했고, 나를 붙드는 질문은 단 하나였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이토록 명료하고 따뜻하게 답해주는 책이 또 있을까. 이번 정독은 마치 내 삶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가는 여정 같았다.

작가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4개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3년간 수감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할 기회가 있었지만, 집에 있던 테이블 탁자에 새겨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보고는, 부모를 두고 혼자 떠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그는 부모와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고, 부모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자서전적 기록이기도 하지만, 수용소에서 겪은 인간 이하의 참혹한 삶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작가는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부터 의미 중심 치료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구상하고 있었고, 그 원고를 몰래 소지했으나 곧 빼앗겼다. 하지만 그는 수용소에서도 기억을 더듬어 원고를 재작성했고, 그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세상에 알리겠다는 목적이 그를 버티게 한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수용소 생활은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파괴적인 환경이었다. 극심한 굶주림, 무감각(apathy), 불면, 냉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수감자들은 원시적인 정신 상태로 퇴화해 갔다. 그런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프랭클은 이에 단호하게 “Yes”라고 말한다.“Meaning is possible even in spite of suffering.”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고통 때문에 의미는 가능하다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는다. 피할 수 있는 고통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삶은 불가피하게 고통을 수반하기에,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조언한다.

Priority: 가능하다면 상황을 창의적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
Superiority: 그래도 안 된다면 의미를 부여하고 견디는 노하우(know-how)를 익히라.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의미’와 ‘목적’이다. 삶의 의미는 고통뿐 아니라 ‘일(work)’과 ‘사랑’ 속에도 숨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음미하며 살아야 전체의 맥을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삶의 궁극적 의미는 죽기 직전, 모든 장면을 돌아보는 순간에야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의미가 내포되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프랭클은 말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삶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우리는 각자 대체 불가능한 소명을 안고 태어났고, 각자의 삶에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태도와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수용소에서도 누군가는 돼지(swine)가 되고, 누군가는 성인(saint)이 된다. 누군가는 종교 토론을 하거나 이탈리아 아리아를 부르며 박수를 받고, 누군가는 죽음만을 기다리며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런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랭클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동해안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면, 서해안에는 책임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
자유란 책임과 동의어임을 그는 분명히 했다. 프랭클에게 삶의 의미란 단지 자신의 쾌락과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미를 찾도록 돕는 것, 그 안에야 비로소 존재의 목적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수감 전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을 도왔고, 수감 후에는 로고테라피를 전 세계에 전파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는 Freud처럼 과거의 상처에서 원인을 찾지도, Adler처럼 인간의 힘만으로 미래를 개척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실존 역학(existential dynamics)이 실존 공백(existential vacuum)를 채울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몸소 실천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다.

책을 덮은 지금, 그는 여전히 내게 묻고 있다. “너는 너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삶이 나를 향해 기대를 걸고 있다는 생각은 때때로 큰 부담이 되지만, 동시에 나를 곧추세우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는 자아실현을 통해 남들처럼 행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자아실현은 자기 초월의 부산물로서만 가능하다(Self-actualization is possible only as a side-effect of self-transcendence)고 했고,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산물로서 뒤따라 오는 것이라 했다. (Happiness cannot be pursed; it must ensues.) 결국, 내가 아닌 남을 먼저 생각할 때, 나의 존재가치를 세우며 나를 실현시킬 수가 있고 비로소 그 때서야 행복이 나를 따라온다는 것인데 그동안 잘못 살아온 것인가? 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일까? 마지막으로 떠오른 문장은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A book must be the axe for the frozen sea within us.” by Franz Kafka
Man’s Search for Meaning은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산산이 깨뜨린 도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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