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pstairs Delicatessen: On Eating, Reading, Reading about Eating, and Eating While Reading (Paperback)
Dwight Garner / Picador USA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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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지적 유연함을 지향한다고 말은 하지만, 내게 익숙한 것을 먼저 취하고 낯섦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는 것 같다. 사고의 경직성을 지양하려면 다양성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열고 다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데, 인지 장벽이 높아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만 안주하려 한다. 이런 나의 고집은 이 책의 보석을 캐내는 데 큰 장벽이 되었고, 즐거운 독서가 아닌 완독에 의미를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했다. 독서(reading)에 관한 내용인 줄 알고 구매했는데, 실상은 음식(food)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왕성한 식욕만이 주가 아니라 eating과 reading이 늘 병행되는 내용이라서 매우 독창적이고 이국적인 면이 있었다.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 도서라 할지라도 내 독서의 지평을 넓히는 데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대화와 사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음식을 논함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시대가 되었다. 음식은 공용어이며 즉각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라는 표현(Food was a lingua franca and a source of instant nostalgia. p. 213)은 현대를 가장 잘 대표하는 문구가 아닌가 한다. 나 역시 먹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나 음식은 나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 요리에 문외한이고 미각이 발달하지도 않아서인지 ‘맛집 투어’라는 말이 생소할 정도다. 그러나 이런 내가 별종이다 싶을 정도로 지인들 대부분은 음식에 관심이 높아, 심드렁한 내가 이상한가 싶을 때가 많다. 보편성이라는 흐름에 올라타는 흉내라도 내야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이 책은 내게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

어린 시절 작가는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먹으면서 책을 읽고 책을 읽으며 잠이 드는 열독가였다. 책뿐 아니라 신문, 잡지, 간행물 등 다양한 분야를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것이 요즘의 우리와 다른 점이지 않을까 한다. 오늘날 먹기와 읽기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다. 친구들과 어울려 보내야 할 시기에 읽기와 먹기를 동시에 하며 왕성한 식욕뿐 아니라 열정적인 독서 편력을 과시했다. ‘Popcorn Reading Parties’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작가는 먹으면서 독서를 했던 것 같다. ‘인간은 기기와 결혼했다(men are so wedded to their gadgets. p. 204)’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휴대폰에 중독되어 있는 현대인에게 작가의 방법을 도입하면 독서 인구가 늘어날지 궁금하다.

아침, 점심, 쇼핑 리스트, 수영, 낮잠, 음료, 저녁 등의 순서로 각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각 시기에 맞는 책과 작가가 함께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언급된 작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과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다. 나는 그들의 책을 읽으며 기억나는 요리가 전혀 없는데, ‘사랑하면 알게 되고 보인다’더니 작가는 수많은 도서 속 음식과 작가의 취향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커피(Kopi Luwak)도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음식 비평을 쓰기 위해 6~7시간 동안 장소를 바꾸어가며 집중해서 읽는다는 내용에는 매우 공감했다. 그만큼 독서에 대한 사랑과 실천은 별개의 일이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현재 K-Food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해서 한국 음식을 살짝 기대하며 읽었는데, 2023년에 출판된 책임에도 언급은 한 번 정도였다. 『Crying in H Mart』를 통해 떡국이 소개된 것이 약간 아쉽긴 하다. 과거 서양 문화에 대해 가졌던 무조건적인 동경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지금, 언젠가 한국 음식이 전 세계적으로 더 깊이 인정받는 시기가 오길 바란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도 좋지만,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나라 고유의 미, 멋, 맛을 유지하며 다양성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음식이 아닌 독서에 관심이 많기에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형이상학적 숙취’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작가는 우울증, 슬픔, 외로움 등의 형언할 수 없는 복합체를 ‘형이상학적 숙취(metaphysical hangover)’라고 불렀다. 숙취를 독서로 이긴다니 얼마나 창의적인가. 숙취 해소용 독서(hangover reading)로 밀턴의 『실낙원』을 추천하며, 기분이 나아지기 전에 감정적으로 더 우울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적인 고통은 단순한 조언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행복의 상대성으로 인해 즐거운 상황이 오히려 박탈감을 줄 수 있기에, 낙원을 잃은 절망감을 먼저 직면해야 숙취를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일까. 이 대처법만 보아도 작가가 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요리는 ‘조리법의 불확실성을 음식의 확실성으로 변화시키는 것’(transformation of uncertainty(the recipe) into certainty(the dish))이라 했다. 요리사에 따라 불확실성이 커질 위험은 있으나, 결국 확실한 예술 작품으로 탄생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어린 시절의 취미를 직업으로 이어가며 평생 즐겁게 일하는 작가가 한없이 부럽다. 나는 먹으면서 독서하지는 않지만, 맛집 투어가 유행인 시대에 작가의 독서법을 빌려서라도 더 많은 사람이 책을 가까이하게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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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light (Paperback)
수잔 최 / Vintage Publishing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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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고 그저 나의 부족함만 일깨워준 책이다. 글자만 읽는 느낌이었고, 책이 나를 무섭게 노려보는 압박감이 있었다. 차라리 한숨에 다 읽었다면 감동을 더 크게 느꼈으리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 반드시 끝내리라는 의무감으로 접근해서 더 어려웠다. 비행기 안이나 호텔 방에서도 책을 펼쳤지만, 눈으로만 읽고 마음으로는 다가가지 못했다. 많은 분량을 넘어 어려운 단어가 너무 많았다. 고전을 읽을 때도 단어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는데, 오히려 신간을 읽으니 완전히 처음 보는 단어가 많아서 찾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전후 문맥으로 추론할 수 있었으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 하나씩 찾아보니 시간도 오래 걸렸고, 생소한 단어가 너무 많아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느끼며 절망했다. 배움은 끝이 아니라 날마다 시작임을 알게 해 주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가 한국의 아픈 분단 현실을 조명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영어 전공 후 우리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고조되었다고 자부하는 나도, 통일에 대해, 북한 동포에 대해 잊고 사는 적이 많은데, 작가가 우리나라의 슬픈 분단 현실을 소설을 통해 상기시켰다. 분단의 현실은 한국인이라면 직시하고 인지함으로써 반드시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한다. 작가는 영문학 전공이고 창의적인 글쓰기를 지도하는 작문 교수라서 탁월한 은유나 직유를 통한 서사적 표현이 많았으나 직관적인 감동을 느끼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건의 전개, 한국의 아픈 과거에 대한 역사적 배경, 한국의 고유명사를 그대로 표기한 점 등이 아마 외국인 독자들에게는 약간의 난관이 아닐까 한다.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줄거리에만 길들여진 나의 두뇌도 큰 도전을 받았다.

광복 직후 좌익으로 몰려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죽음을 당한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갔던 한국인 부모의 피를 받아 일본에서 태어나 총명했던 Seok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교수가 되었으나 그는 늘 그늘과 친숙했던 사람이었다. 안정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 그린 카드를 소지하였으나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사이에서 그의 정체성은 표류하는 배와 같았고, 아내인 Ann조차도 그의 과거에 대해 알 수 없었고, 과거를 말하는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북으로 간 한국인 부모가 있다는, 죽음보다 무서운 연좌제는 평생의 업보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하루가 얼마나 무섭고 암울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조총련 소속이었던 동생 순자와 지속적인 연락을 하는 그에게 부모와 가족은 어떤 개념이었을까? 위로 받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안식처이기 전에 계륵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바닷가 산책 중에 아빠를 잃은 Louisa는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빠가 익사했다고 하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익사가 아니라고 추측하지만 증명할 길이 없다. 어린 시절 아빠를 잃은 상처, 평생 자유롭지 못한 몸을 끌어안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엄마를 지켜보아야 하는 Louisa를 읽어 내는 것도 힘들었다. 각자의 관점에서 심리를 그려내고 있는 것도 이 책의 묘미이다. 청소년 소설 Wonder처럼 전지적 시점으로 등장 인물의 심리를 묘사해 주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입장을 이해할 수가 있어서 독자들이 오해하는 걸 막아준다. To Kill a Mockingbird에서 읽은 유명한 명언이 생각난다. “You never really understand a person until you consider things from his point of view… until you climb into his skin and walk around in it.” 피부 속으로 들어가 걸어보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북한으로 납치당한 Seok의 처참한 인간 이하의 삶이 그려지고 있다. 체계적인 굶주림 (systematic starvation)이라는 표현이 있다. 굶주림 앞에서 고상하고 품격 있는 삶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초라한가? 살기 위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오직 생존만을 위해 살며, 나무껍질 없으면 눈을 먹으며 삶을 유지한다. 겨울에는 눈까지 인색하여 눈덩이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상상이 되는가? 먹을 것이 없어서 쥐도 잡아먹으며 삶을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만주 땅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선교사와 NGO 기자의 도움으로 마침내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빠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오게 된 Louisa의 손을 잡고 그는 평안히 잠들게 된다. 소설 속 그는 마침내 북한 땅을 목숨 걸고 탈출하기는 했지만, 현재 이 순간에도 1인 독재 체제 속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있을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온다.

만주에서 탈출한 북한 동포들을 돕고 있는 목사님이나 NGO 기자처럼 현재 이 순간에도 목숨 걸고 인도주의적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나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내가 아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유익을 살아가는 것 같으나, 현실 속에서도 이타적인, 인도주의적인 희생과 봉사를 펼치며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다 같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불의와 싸우며 노력하기에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닐까 한다. 불가능처럼 보였던 독일도 통일을 이루었는데, 우리나라는 언제 즈음 통일 한국을 그릴 수 있을까? 불가능이란 단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이고 신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이냐는 역시 신이 결정을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한 꿈을 꾸며 지속적인 도전으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역사적인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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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r (Paperback)
John Edward Williams / New York Review of 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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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몰이를 하는 책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측하여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고, 나도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 작년부터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이제야 읽으며 발행 연도 때문에 깜짝 놀랐다. 1965년도에 출판된 책이 이제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중간에 이유를 찾아보곤 했다. 사실 영문과 교수였던 분이라 문학적인 표현을 많이 기대했는데 앞부분은 다소 지루했다. 아름다운 배경 묘사나 마음을 꿰뚫는 심리적 표현 없이 무미건조하게 전개되는 주인공의 삶은 흥미롭지 않았다. 감정의 널뛰기를 하는 나와는 대조되는 그의 삶은 이름만큼 단조롭고 묵직했다.

Stone이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발에 걸리는 돌은 어디든 굴러간다. 작게 혹은 크게 차이든, 내던져지는 대로 그 자리에 머무르고, 어떤 건축물에 사용되든 그 자리에 꼭 알맞게 부합되어 조화를 이룬다. 가볍지 않고 진중하며 어떤 상황에도 분노하지 않는다. 진흙과 섞여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금세 적응하여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빛나지 않으며 튀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나 맡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고 인정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눈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존재 가치는 기억에서 잊힐 것이다. 석화된 인간과 유사한 스토너를 읽으며 화가 나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적응하는 그는 행복한 삶이었을까?

무엇이 스토너를 스토너답게 만들어 주는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생계 유지가 전부였던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대학 졸업 후에도 당연히 농업을 이어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셰익스피어 소네트 73번을 읽으며 문학적 감수성이 폭발하고 교수의 추천을 받아 영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 그것 말고 그 무엇이 필요한가? (˝It’s love. You are in love. It’s as simple as that.˝ p. 20).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좋다는 문구가 생각이 난다.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우선순위가 사랑이길 바란다. 스토너는 자신이 사랑했던 문학 교수가 되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을 간파하고 이끌어 준 교수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학생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어 발굴하는 것 또한 교사의 역할이 아니던가? 스토너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읽어내어 영문학 전공을 추천한 Sloane 교수가 없었더라면 스토너는 농부가 되어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도와 조언으로 인해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그의 삶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아내 Edith였다. 그들은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왜 불행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몹시 궁금하다. Edith의 성격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기에 그렇게 특이한 양상을 보였는지, 그녀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그 사람의 피부 속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문구를 떠올린다.

스토너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애정 없는 아내와의 관계, 갑자기 아이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 퇴근 후 채점하고 수업 준비하며 딸 돌봄, 딸과 서재에서 함께 책 읽으며 유지했던 평온한 관계, 아내의 딸에 대한 집착으로 딸과 소원해진 거리 등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인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나 프로처럼 잘 적응하는 모습에 놀랄 뿐이다. 개인적으로 스토아학파 관련 책을 읽고 나도 그렇게 환경에 상관없이 인내하고 적응하고 싶었다. 스토너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가 stoical이다.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그는 화석화된 인간이 아니고 살아 숨 쉬는 감정의 동물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쉽게 단정 지음은 매우 위험하다.

Lomax와의 일로 인해 가르침에 대한 열정도 상실하고 마치 식물인간처럼 살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덧없고 허무하며 무(無)에 수렴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Katherine Driscoll을 만나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일에 대한 열정도 잃어버린 그에게 캐서린은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그에게 그녀는 ‘처음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아님‘을, ‘사랑은 끝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가르쳐 주었다. 캐서린 또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It takes being in love to know something about yourself.˝)

서로의 관계를 given opinion으로 부르며 사랑과 배움이 하나의 과정인 듯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지적인 탐구도 잘 이어갔으나, 결국 스토너는 캐서린을 잃고 다시 폐인이 된다. 사랑에 대한 상실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을 반복하며 40년간의 가르침을 이어갔다. 은퇴를 완강히 거부하던 그에게 찾아온 질병으로 마침내 가르침을 내려놓게 된다. 스토아 철학적 인내의 삶(stoical endurance)을 살아낸 그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을까? 대학 시절 이래로 늘 책과 함께했고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책의 가치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고 책에서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허상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작은 일부가 책에 있었고, 앞으로도 책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스토너는 문학을 사랑했고 가르침을 좋아했다. 딸을 돌보며 채점을 하고 수업 준비를 했던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된다. 의무감을 넘어 애정이 있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비난받는 캐서린과의 사랑은 죽어 있던 그의 영혼을 살렸고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성과 논리로만 판단하기에는 사랑과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열정적인 삶이 무엇이고 열정을 바쳐 사는 것이 과연 훌륭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스토너가 일상과 환경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면 부적응자가 되었으리라.

왜 21세기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스토너를 읽는가? 감정 노동에 지치고 상처받아 차라리 스토너의 삶을 부러워해서일까? 내게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그의 삶을 선택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상황에 저항하지 않고 잘 순응하며 책과 가르침에서 위안을 얻고 거기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 그의 삶이 약간 탐나는 것은 사실이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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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urrection (Paperback)
Tolstoy, Leo / Penguin Classics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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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알지 못한 채 마주한 고전은 뜻밖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칫 지루한 순애보로 읽힐 법한 제목 너머에는, 살점과 뼈가 튀는 치열한 사랑과 구원의 투쟁이 숨겨져 있었다.

마지막 510페이지를 읽으며 깜짝 놀랐다. 마치 클라이맥스를 지나는 것처럼 그 전 페이지부터 몰입해서 읽고 있는데 마지막 장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시베리아로 행군하면서 처음으로 이 책이 약간 지루한 감이 있었으나 엔딩이 너무 궁금했다. 유명한 고전이라도 제목으로 인해 흥미가 덜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고 나는 결말을 모르고 있었다. 현대에는 지루한 순애보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제목 이면에 이렇게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신약에 푹 빠져서 치열한 자신의 고민에 답을 찾는 장면도 너무 감동적이었으나, 결국 완전히 새롭고 다른 의미를 찾게 된 그가 어떤 사랑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하지만 결국 나의 상상력에 도전을 주는 오픈 엔딩으로 끝이 나니 너무 허무하고 아쉬웠다. 사랑은 언제나 미완성인가? 진정한 사랑이기에 떠나보냄으로써 미완성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반자서전적 이야기이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이라 엄청나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분량 면에 있어서 ‘전쟁과 평화’의 1/3, ‘안나 카레니나’의 2/3에 해당되는 적은 분량이지만, 두 권의 책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쓰여진 책이며 왜 현대에도 명불허전이라 불리는지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목숨 걸고 쓴 책과도 같고, 이 책으로 인해 파문까지 당했다고 들었다. 진정한 대문호 톨스토이의 용기, 대담성, 소명의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눈물겹고 감상적인 연애 소설의 옷을 입고 있는 이면에, 당시 그리스도 정교의 허상, 러시아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과 대조되는 농민들의 참담한 현실, 정부 고위 관직들의 부정부패, 비참한 러시아 감옥 체제의 현실이 담겨있다. 그 어떤 사회 혁명가나 개혁가보다 엄청나게 파괴력 있는 울림을 전하는 사회 비판 소설이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의 사회악에 대한 진지하고 치열한 고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을 통해 회개하고 다른 삶을 살려는 치열한 노력이 묻어나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악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은 쉬울 수 있다. 아니라고 말을 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조롱과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또한 말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자신의 논리를 피력할 수가 없다.

톨스토이를 대변하는 네흘류도프(Nekhlyudov)는 귀족으로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배심원 자격으로 법정에서 카튜샤 마슬로바(Katyusha Maslova)를 만나면서 그의 삶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마슬로바이지만 그녀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에 반해 불꽃 같은 사랑을 한 후 기억 속에서 지운 지 10년이 되었으나, 배심원과 피고인으로 만나 서로의 삶을 변화시키게 된다. 그녀가 직업 여성으로 변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네흘류도프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부인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그녀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일단 일을 시작하면 전에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주인공의 경우도 그런 것 같다. 무고한 마슬로바가 유죄를 받게 되어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고 상소를 하기 시작하며 교도소를 드나들게 되다 보니, 무고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된 농민들, 정치범들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게 되고 교도관들, 관리소장, 형법 체제의 비리를 알게 되어 분노하며 더욱 의욕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된다. 도중에서 그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끌 것인지, 힘들어도 지치지 않고 나아갈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가 다른 귀족들처럼 향락과 사치를 즐길 때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영향으로 토지 소유법에 대해 새로운 시선과 관점을 갖게 되고, 귀족들의 토지 소유를 반대하며 자신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하려고 할 때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결국 갈림길에서 편한 길을 택함으로써 남들처럼 살고자 결심하긴 했으나, 마슬로바를 피고인으로 만나게 되면서 그는 양심을 따르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녀의 최종 결말이 어떠하든, 어디에 있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 그에게 ‘당신은 당신의 양심을 구원하기 위해 나를 이용하는 것이다(You want to use me to save your soul. You disgust me.)˝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슬로바는 수면 아래에 묻어 두었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사랑과 아픔을 다시 상기시키게 된다. 한결같은 그의 태도와 행동으로 입증하는 그의 사랑, 두 명의 정치범 마리야(Marya), 시몬손(Simonson)의 영향으로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실감할 수 있다. 미모를 무기 삼지 않으며 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제일 좋아하는 취미가 자선이라 불리는 마리야, 과거의 죄를 보상하기 위해 자신을 선택하는 네흘류도프와 달리 현재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는 순수한 청년 시몬손이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과연 그녀는 누구를 선택하고 싶었을까? 네흘류도프의 노력으로 시베리아의 힘든 노동에서 사면(pardon) 소식을 들었으나 기뻐하지 않으며 시몬손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이것이 그녀의 진심이었을까? 진심으로 네흘류도프를 사랑했기에 신분 자체가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른 그를 구속할 수 없어서, 그를 떠남으로써 그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싶었을까? 시몬손을 선택한 그녀가 다시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다시 예전의 그녀로 돌아갈까 봐 불안하다. 물론 그녀가 어떤 남자를 선택하더라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는 항상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성과의 사랑은 항상 불완전한 것인가? 완전한 사랑이 존재하기는 할까?

연애 소설의 이면에 종교가 있다. 어쩌면 톨스토이의 진정한 목적은 기독교의 복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치열한 고민인 악의 존재, ‘과연 범죄하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벌할 수 있는가? 과연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미친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의 답은 마지막 장에 있었다. 시베리아 장군의 초대에서 만난 영국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시베리아 감옥 체제 조사 및 분석, 둘째는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알리고 신약을 죄수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죄수들이 듣든 아니 듣든 간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을 돌려대고, 믿음이 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해진다고 설교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랑할 만한 이들만 사랑하고 쉽고 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으나, 교도소에서 이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은 마태복음 18장을 읽으며 그의 풀리지 않던 질문에 답을 찾는다. 날마다 죄인인 인간이 현재도 죄를 범하면서 악을 고치려 드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러시아 감옥 체제, 형법 제도, 귀족들의 허영과 이중성, 러시아 토지 제도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고치려고 분개하고 동분서주했던 그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느낌이었으리라.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그는 얼마나 가슴이 뜨거웠을까? 사소한 것이라도 인간의 의지로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결국엔 인간의 힘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악을 척결하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와 명예를 다 가졌던 톨스토이가 50세에 영적인 위기를 맞이했으나, 결국 신앙에서 답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쓴 직후에 바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나, 말년에 결국 그는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안다.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의미, 선과 악에 대처하는 방법, 같음과 다름의 삶의 여정, 언행일치의 삶, 기독교인의 태도와 자세, 작가의 역할과 영향력 등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 이 책이 내게 너무 소중하고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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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ckness Unto Death : A Christian Psychological Exposition of Edification and Awakening by Anti-Climacus (Paperback)
Anti-Climacus / Penguin Classics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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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궁극적 목표는 심리학 혹은 철학 원서 속에서 위안과 평안을 찾고 싶었다. 잠들지 않는 내적 불안감과 허무감을 철학서로 위로받으려 했다. 한글 번역서와 원서에는 큰 간극이 있고 영어가 부족하지만, 한글로 읽을 때보다는 영어로 읽는 것이 이해 체감도가 높았다. 마침내, 부족한 내가 키에르케고르의 원서를 도전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지만, 절반 정도 이해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영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력의 한계, 신학적 배경 지식, 신앙의 농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답답했던 갈증과 목마름에 시원한 해갈을 제시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일까? 질병이라 함은 신체의 질병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의학 발전에도 여전히 불치병으로 존재하는 암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책의 질병은 신체의 질병이 아니라 정신적, 실존적, 영적인 질병으로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질병인 despair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despair가 전체 책을 통해 관통하기에 읽기만 해도 내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 같다. 죽음(Death)이란 단어 앞에서 누구나 작아지고 소심해질 수밖에 없지만, 헤아릴 수 없는 신체의 고통으로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해방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육체의 죽음으로 고통이 끝나지 않는 질병이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청년의 때에는 암울한 미래를 놓고 절망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해 절망한다. 자신의 영혼을 세상에 저당 잡힌 채, 유능함, 부와 명예의 축적 등을 향해 달려가며,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만 집착하는 세상인(immediate person)으로 살아가다가 우리의 시선을 내적인 방향(inward direction)으로 돌릴 때가 있다. ‘나의 삶은 이대로 좋은가?’ 세속적인 것, 일시적인 것, 유한한 것에 절망하고, 영원한 것을 찾는 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서 또다시 절망을 한다. 이렇게 인간은 육적인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도록 지어졌다. 인간은 합성물이다(A human being is a synthesis.)라는 표현이 있다. 무한/유한, 영원한/일시적, 자유/필연이 합쳐진 존재이다. (infinite/finite, eternal/temporal, freedom/necessity)

그런데, 무한함과 영원함을 거부하며 나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인 기본값을 거부하며 혼자 힘으로 살아감은 마치 ‘나라가 없는 왕(a king without a country)’으로 살아감과 같다. 원래 왕은 따로 있는데 그를 인정하지 않으며 내가 왕이 되어 살려고 하는 것이 모순이고 반항이며 범죄가 되는 것이다. 나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절망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왕이라 스스로 생각하지만, 강함이 아닌 약함(weakness)에, 적극적인 세력을 펼치지 못하는 수동성(self-passivity)에 절망하는 인간이 바로 과거의 나였다. 정말 치열하게 게으르지 않게 살았으나, 미래가 항상 밝은 것이 아니기에 멈출 수가 없었고, 더 열심히 살면 밝은 미래를 손에 얻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에는 불행한 과거를 망각으로(forgetting) 달래며 원래의 나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절망은 늘 현재형이었고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죄(sin)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소크라테스 이론(Socratic doctrine)과 기독교적 이론(Christian doctrine)에 대한 비교가 있었다. 옳은 것을 알면서 행하지 못함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무지를 깨우치라고 주장했던 소크라테스의 이론은 정확치가 않다. 무지해서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함이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반항이 인간에게 있으며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나의 경우만 보아도 딸로서, 친한 친구로서, 지인으로서, 공직에 있으면서 어떤 일을 어떻게 행함이 좋은지 알지만, 행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으며, 양심이 시키는 데도 고집을 피우며 망설인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안의 죄성이 있어서 양심의 소리에도 모르는 척하며 눈감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죄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처럼 무지(ignoranc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이행하지 않는 의지(will)와 그 의지의 부패(corruption)에 있다.

왕과 일일 노동자의 비유가 있었다. 어느 날 왕이 일일 노동자에게 찾아와 사위가 되는 특권을 주었다고 하자. 그러나 일일 노동자는 자신이 왕의 딸과 결혼할 능력이나 위치가 안 되는 걸 알기에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믿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조롱하며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또한 죄(sin)이다.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어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특권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는데, 이것을 믿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조롱하며 온몸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것이 죄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은 강제로 일일 노동자에게 왕임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로(totally incognito) 일일 노동자에게조차 공평한 사랑을 베푸시고 자유 의지를 주시며 인간의 의지(will)를 테스트 하심과 같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큰지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와 비유한다. 심리학적 교묘한 수단(psychological master-stroke)은 죄의 계속성과 강화를 의미한다. 맥베스가 왕을 살해하고 죄책감과 공포에 시달리지만, 이미 악을 행했으므로 폭군이 되는 더 악한 일을 함으로써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죄를 유지하려고 한다. 결국 그는 절망을 덮으려고 죄를 강화시킴으로써 절망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이 인간의 목표이자 기준이 되어야 하거늘 인간 스스로 절망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절망을 키우는 일이 된다.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이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기다린다. 개인 각자가 잠시 다니러 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밝혀지는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죄성 이전 단계에 3가지의 offense 단계가 있다. 첫째, 가장 낮은 단계의 거부감/죄(offense)는 중립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결정하지 않고 유보하는 단계이다.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인간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을 인정도 거부도 안 하는 것이다. 둘째,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형태로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은 긍정적인 거부로 기독교적 관점을 모두 비진리 및 거짓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 내 주변에도 위 3가지 단계의 지인들과 가족이 있다. 나 역시 오랜 기간, 두 번째 단계로 살아왔기에 지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지만, 다시 이 책을 읽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신을 떠난 인간은 모두 절망이라는 질병을 만날 수밖에 없고 회개하지 않은 모든 죄는 새로운 죄를 낳을 수밖에 없다. 나를 아는 모든 지인들이 나라가 없는 왕으로 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모시며 왕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한다. 헤아릴 수 없는 높고, 깊고, 넓은 사랑으로 날마다 죄를 범하는 죄인인 인간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푸시며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참아주시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온몸으로 깨닫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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