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Paul Gauguin을 모티브로 하여 쓴 소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작가가 ‘인간의 굴레’를 출간 후, 익명의 비평가가 ‘주인공은, 많은 젊은이들 처럼 달을 바쁘게 쫒느라, 그의 발 아래 6펜스는 보지도 못하고 있다’라고 쓴 글에서 작가가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이 책은 모두가 6펜스를 쫒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갈 때 달을 찾아 과감히 현실을 등진 화가가 주인공인 예술가 소설이다.

나에게 부러운 직업 3가지를 꼽아보라하면, 나는 서슴없이 작가, 화가, 음악가라 할것이다. 말로 모두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 슬픔, 뜨거운 열정, 고통, 영적인 신비 등을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을 부여받음은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표현하는 순간 감정 정화가 이루어지고 그걸 읽거나, 보거나, 듣는 사람들도 대리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기에 세상에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한다.

예술가와 ‘자유’라는 단어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사회의 인습과 구속을 충실히 지키며 창의성을 발휘한 예술가가 한 명이라도 있던가? 우리 주위에 수 많은 외적 내적 구속이 있다. 신체적, 감정적, 지적, 사회적, 재정적 구속을 과감히 벗고, 사랑까지도 예술과 양립할 수 없으며 오직 ‘그람을 그려야 한다’는 내적 소리를 따라, 마치 악마에 사로잡힌듯 프랑스 파리로 떠난 남자가 있다.

Charles Strickland가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두 아이를 버리고 떠난 나이는 40세였다. 이 책이 발간된 연도는 1919년이고 책 속에서도 보통 그림은 18세에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 나이에 시작한다고 비꼬는 표현이 나온다. Strickland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세 번이나 반복을 하며 ‘물에 빠진 사람은 수영을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치 않고, 일단 헤엄쳐 나가지 않으면 익사하게 된다’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그림이라는 바다에 빠져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훌쩍 떠난다.

파리에서 겪는 물질적 가난과 빈곤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막지 못한다. 고열로 아파 누워 있을 때 그의 천부적 재능을 알아 본 화가 Dirk Stroeve의 도움으로 몇개월 만에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뜻밖에 Dirk의 아내 Blanche가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사랑은 질병이며, 여자들은 그저 쾌락의 수단일뿐이라며 과감히 그녀를 떠난다. 즉 그는 그림과 미의 창조에 대한 열정만 있는 영원한 순례자였기에 그를 묶어 두고 소유하려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결별을 선언하는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Charlie Strickland가 마침내 안식처를 찾은 곳은 남태평양의 섬인 Tahiti에서였다. 내려가 목욕할 수 있는 시냇물이 흐르고, 야자나무에 둘러 쌓인 외딴 마을에 17세 소녀인 Ata와 살면서 정적만이 흐르는 고요한 순간을 ‘밤이 너무 아름다워서 영혼마저 몸의 구속을 견디지 못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속과 속박이 없어서 영혼도 자유롭게 날개를 펼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 섬이 바로 Charlie가 평생을 찾아 다니던 곳이었다. 그가 찾던 것은 진리와 자유였고 그 섬에서 자신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상업적 목적으로 그림 팔기를 거부한 채, 나병에 걸리고 일 년간 실명이 된 상태로도 오로지 그림만을 그린다. 외딴 오두막 천장과 벽을 온통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걸작을 그리고 죽지만 아내에게 이 집을 불태우라고 부탁한다. 그림에 대한 이런 광적 열정을 가진 그가 평범한 가장으로서 남들처럼 살았다면 행복했을까? 물론 그는 가장으로서 자신의 꿈만을 찾아 떠난 이기적이고 냉정한 인간이라는 사회적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나, 본인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극적이고 감동적인 소설은 아니며, 자아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에 이 책이 던져주는 시사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미술이나 예술가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 스토리 전개가 독자들에게는 공감과 반감의 양극단을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장면이나 심리 묘사는 매우 탁월하다. 현학적이라 느낄만큼 은유나 비유가 범상치 않고 깊이가 있어서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게 된다.

개인적으로 Charlie Strickland의 행동은 매우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어느날 그렇게 훌쩍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자신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양심, 도덕, 안락함을 두 번 세 번 생각하며 고민했더라면 평생 주저앉아 평범하게 자신을 잃고 살았을 것이다. He found himself. 라는 문장을 읽으며 떠나지 못하는 내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Charlie만큼 마음 속에서 뜨겁게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년에 현재 직장에 너무 큰 실망과 혐오를 느껴 과감히 버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했으나, 여전히 마음 속에서 내가 가야할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많다. 나의 길이고 소명이라 믿어왔던 현재 길이 아닌, 정말 유의미하고 행복하게 시간을 바쳐 일할 수 있는 나의 길이 따로 있으면 어쩌나 지금도 생각하면 두렵다. 과감히 버리지 못함은 나 또한 오랜 시간 현재 나의 ‘구속’을 당연하게 여기며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여 왔기때문이다. 물론 나는 Charlie만큼 책임져야 할 가정은 없으나 그럼에도 일탈은 두렵다.

소인배라서 일탈의 용기가 없기에, 수많은 여성들로부터 도적적 비난을 받아 마땅한 Charlie의 결단이, 6펜스가 아닌 달을 찾아서 뒤 늦게라도 결단을 했고, 결국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 행복한 삶을 살아낸 Charlie가 이리 부러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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