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이네이스 1 ㅣ 아이네이스 1
베르길리우스 지음, 김남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평점 :
고대 서사시는 참 오랜만이다.
『아이네이스』는 천병희 역으로 감명깊게 읽었더랬다. 운명에 이끄는 삶, 디도와의 애틋하고 저주스러운 사랑, 끝없고 신비한 모험, 웅혼한 기상과 로마 건국까지, 천년제국의 건국 서사시로 부족함이 없었다.
부족한 건 없지만 아쉬움은 있다. 바로 호메로스의 모방작이라는 점. 이탈리아에 도달하기까지의 전반부는 『오뒷세이아』를, 현지인들과의 전쟁을 그린 후반부는 『일리아스』를 각각 닮았다. 그리고 이 책의 주석들을 읽어보면 선대 작품들의 표현들까지 닮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내용이 그렇다면, 시의 운율이라든가 이런 데에 훌륭한 점이 있어야 할 것이고, 단테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는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난 라티움어를 모른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김남우의 이 번역본은 조금 비스무레하게라도 다가가게 해 준다. 주제 넘지만, 나는 서사시에서 행수와 어순을 중요시 여긴다. 이는 강대진의 저서를 읽은 영향인데, 어쨌든, 김남우 본은 행수와 어순을 최대한 맞추려 애썼다는 점을 역자 후기에 밝히고 있다.
이 번역본의 또 다른 매력은 역자가 <18자역>이라 부르는, 각 행을 18자 이내로 맞추려 했다는 점이다. 좀 더 함축적이 되므로, 어쨌든 시 같이 보인다.
한 가지 더, 역자라 번역어로 우리말 고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했다는 게 느껴진다. '싸울아비' 같은 단어들이 그 옛스런 맛이 나게 한다. 『반지의 제왕』의 역자들이 최근 번역본에서 톨킨의 번역지침에 따라 우리 옛말들을 발견해 사용한 성과가 있었다고 밝혔는데, 그와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조금 어려워도 두고두고 곱씹어보게 된다. 어색한 부분이 종종 발견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런게 고대 서사시의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착각?)이 들게 한다.
게다가 주석은 또 어찌나 꼼꼼한지. 두어명의 연구자들의 주석을 소개하는데, 뒤로 갈수록 작가의 의도를 세심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고전들의 번역은 천병희와 강대진에 빚지고 있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아르고 호 이야기』 등
1권을 덮고나서 천병희 번역본을 펼쳐보았는데, 그냥 쉽게 풀어 쓴 산문 같다. 사람의 간사함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천병희 본이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이 작품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역본을 모두 읽을 것을 권한다.